이념을 넘어선 정의, 그리고 상식의 촛불
사진 출처: https://namu.wiki/w/2008%EB%85%84%20%EC%B4%9B%EB%B6%88%EC%A7%91%ED%9A%8C
2008년 어느 봄날, 뉴스 속 풍경이 이상하게 낯설지 않았다.
서울 광화문 광장에 촛불을 든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학생들, 직장인들, 아이 손을 잡은 부모들까지.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모두가 손에 촛불 하나씩을 들고 거리에 서 있었다. 당시 대통령은 이명박. 그는 집권 초기부터 파격적인 방식으로 정책을 밀어붙였다.
그중 하나가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개였다. 광우병 논란이 있었고, 국민들은 불안해했다. 하지만 대통령은 말했다.
“이제 우리도 값싼 소고기를 먹을 수 있습니다.”
그 한 마디는 이상하게 멍청하게 들렸다. ‘값싼 고기’는 있었지만, 그에 앞서 국민은 ‘믿을 수 있는 고기’를 원했다. 그는 설득하려 하지 않았다. 국민의 우려에 귀를 기울이기보다는, 가격이라는 숫자로 모든 것을 덮으려 했다.
그때부터, 나와 내 친구들, 가족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누구는 정부를 옹호했고, 누구는 거리로 나갔다. 내가 정부의 일방적인 정책을 비판하면, 돌아오는 말은 이랬다.
“너 좌파야?”
“빨갱이냐?”
정말 당혹스러웠다. 나는 그저 상식을 말했을 뿐이었다. 대화와 설득 없는 정치는 민주주의가 아니라고, 촛불을 향한 물대포는 공권력의 오용이라고... 그런 말들이 어느 순간, 이념의 낙인으로 돌아왔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나는 좌우가 아니라, 상식을 원해. 이 정부의 행동은 민주적이지도, 상식적이지도 않아. 만약 상식을 말하는 게 좌파라면, 나는 기꺼이 좌파 하겠다.”
그 촛불은 단지 조용한 분노의 표현이 아니라, 법이 반응하기 전에 먼저 작동한 정의감이었다.
“헌법은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고 권력의 남용을 방지하기 위한 규범질서입니다. 국민은 헌법 수호의 최종적 주체입니다.”
하지만 정부는 촛불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시민들을 방패로 밀어내고, 물대포로 흩어 뜨리고, 차벽으로 가뒀다. 마치 그 촛불이 위협이라도 되는 양, 민주주의가 아닌 질서의 이름으로 정당화된 진압이었다. 그 집회에서 수십 명이 다쳤고, 일부는 체포됐다. 그리고 몇 달 후, 또 하나의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
2009년 용산참사.
서울 재개발 구역의 한 철거현장에서 농성 중이던 세입자들을 경찰특공대가 강제 진압하는 과정에서 화재가 발생했고, 그 결과 철거민 다섯 명과 경찰 한 명이 목숨을 잃었다. 용산참사는 내게 묵직한 질문 하나를 남겼다.
“이 나라의 공권력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대화 없이, 설득 없이, 망치와 방패로 밀어붙인 나라에서 법은 정말 살아 있었던 걸까?
그로부터 몇 해 뒤, 박근혜 정부가 들어섰지만,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2015년 민중총궐기, 노동자, 농민, 청년들이 거리로 나와 ‘이대로는 안 된다’고 외쳤을 때, 정부는 또다시 물대포와 강제 진압으로 응답했다. 그리고 그날, 백남기 농민이 경찰의 직사 살수에 쓰러졌다.
그는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세월호 참사 이후,
광화문 광장에는 유가족들이 노란 리본을 붙이고 앉아 있었다.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며, 왜 구조하지 않았는지, 왜 진실을 감추는지를 물었다. 하지만 그 광장은 오래 열려 있지 않았다. 정부는 그들을 불법 점거자로 규정했고, 경찰은 차벽을 세우고, 유가족이 설치한 분향소와 천막을 철거했다. 심지어 청와대와 국정원이 유가족들의 동향을 사찰하고, 감시 보고서를 작성했다는 사실이 나중에 밝혀졌다.
슬픔은 표현의 자유로 인정되지 않았고, 국가는 그들을 ‘정치적 세력’으로 몰아붙였다. 그 시절은 단지 한 사건의 아픔을 넘어, 우리 사회가 가장 깊이 갈라졌던 시간이었다. 누군가는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며 진상 규명을 요구했고, 또 누군가는 “이제 그만하라”며 피로감을 드러냈다. 그렇게 한 사회 안에 두 개의 진실이 공존했다. 그 균열은 지금까지도 아물지 않았다.
문재인 정부에 대한 기대는 컸다. ‘촛불 혁명’으로 탄생한 정부였기에, 당연히 시민의 목소리를 가장 먼저 들을 줄 알았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이상적이지 않았다. 쌍용차 해고자 문제의 해결은 지지부진했고, 파인텍 노동자의 고공 농성은 400일을 넘기며 지속되었지만, 정부의 반응은 소극적이었다.
코로나19 시기엔 방역을 이유로 집회가 원천 봉쇄되기도 했다. 물론, 국민 건강을 위한 조치였지만, 그 과정에서 ‘집회의 자유’는 너무 쉽게 무시되었다.
“헌법은 현실과 괴리된 이상이 아니라, 시민의 삶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원칙이어야 합니다.”
2024년 12월, 윤석열 대통령은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전쟁도, 내란도 없었다. 단지 정권에 대한 비판이 거셌고, 국회는 대통령의 권력을 견제하려 했다. 그는 이를 국가 위기라 판단했고, 자신의 권한으로 계엄을 선언했다. 하지만 시민들이 다시 깨어났다. 다시 촛불이 광장을 비추었고, 군대 내에서도 불복종이 시작되었으며, 언론과 지식인들이 침묵을 거두었다. 그 움직임은 국회로 전해졌고, 곧바로 비상계엄 해제를 요구하는 결의안이 통과됐다.
“국회가 신속하게 비상계엄해제요구 결의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시민들의 저항과 군경의 소극적인 임무 수행 덕분이었습니다.”
2025년 4월 4일, 헌법재판소는 대통령을 파면했다. 8명의 재판관이 전원일치로 내린 역사적 결정. 그 결정문 속에는 단지 대통령의 위법 행위만이 아니라, 시민이 민주주의의 진정한 주체라는 선언이 담겨 있었다.
“피청구인은 국가긴급권을 헌법에서 정한 한계를 벗어나 행사하여 국회 등 헌법기관의 권한을 훼손하고, 국민의 기본적 인권을 침해함으로써 헌법수호의 책무를 저버렸습니다.”
그날, 우리는 헌법을 지킨 게 헌법재판관들만이 아니었음을 알았다. 헌법이 판단하기 전에, 시민은 이미 깨어 있었다. 침묵하지 않고, 무릎 꿇지 않고, 광장으로 나온 이들이 있었기에 법이 작동할 수 있었고, 정의가 회복될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 말을 꼭 남기고 싶다.
시민의 저항은 법보다 먼저 깨어 있었다. 그 깨어 있음이야말로, 이 나라가 아직 민주주의를 말할 수 있는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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