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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근 Aug 26. 2023

내 손에 핫소스가 묻어있다.

불안감의 이유: 작은 나태함


배달 음식을 많이 시켜 먹는다. 피자를 제일 좋아한다. 주로 컴퓨터 앞에서 먹는다. 식탁이 따로 있을 수 없는 작은 분리형 원룸에서 의자가 있고 상이 있는 곳이 컴퓨터 책상 밖에 없다. 인터넷에서 잘 꾸며진 워크스테이션, 책상, 작업공간들을 가끔 볼 때마다 나도 막연히 그렇게 만들고 싶은데 1,2년마다 집을 옮겨 다니다 보니 현재 사는 공간에 애정을 잘 주지 않는 것 같다. 군 시절 훈련 때마다 대충 펴고 접는 야전 텐트 같은 느낌이다. 


이번에 방 배치를 좀 바꿔서 키보드 옆에 음식을 놓을 수 있는 자리를 조금 더 만들었다. 기존엔 라지사이즈 피자 박스가 놓이긴 놓였는데 뚜껑을 펼칠 수 없었다. 이제는 뚜껑을 펼칠 수 있게 공간을 확보했다. 


나에게 워크스테이션은 라지 사이즈 피자박스가 뚜껑까지 펼쳤을 때 편하게 놓일 수 있으며 뚱뚱한 닥터페퍼 캔이 모니터 앞에 놓일 수 있으면 된다. 더불어 언제든 피자에 뿌려먹을 수 있게 분쇄된 페페론치노가 담긴 통이 비치될 수 있으면 더 좋다. 


피자를 먹고 상자를 치우다가 핫소스가 검지 손가락에 조금 묻었다. 아주 조금 티도 안 나게 묻어서 그냥 반대손으로 쓱 닦아내 버렸다. 배불러서 매트리스에 뻗어서 자다가 일어났다. 눈을 비볐는데 눈이 불타는 듯했다. 비몽사몽 왜 눈이 따갑지 정신을 못 차리다가 아까 대충 쓱 닦은 핫소스가 생각났다. 아 그냥 물티슈로 한번 더 닦을걸. 눈이 미친 듯이 따가워서 뜰 수가 없었다. 


실명되지 않기 위해선 당장 화장실로 가서 눈을 물로 씻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일어나는 게 너무 귀찮더라. 좀 버텨보기로 했다. 어차피 눈도 못 뜨는데 조금 더 눈 감고 자버려야지. 근데 눈을 감고 있어도 너무 따갑더라. 그러다 한 십분 지나니까 서서히 고통이 가라앉더니 눈을 뜰 수 있게 되었다. 


뭔가 어이가 없는데 뿌듯했다. 역시 난 건강해. 내 눈은 이 정도는 버텨야지. 그런데 컴퓨터 옆에 놓인 피자박스가 보였는데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핫소스 묻은 검지손가락을 귀찮아서 제대로 씻어내지 않기로 했을 때 내 눈이 불타오를 줄 알았을까. 그때 씻어냈으면 눈이 실명될 위기를 겪지 않았을 텐데. 아니면 눈이 실명될 위기일 때 빨리 일어나 물로 씻어냈으면 고통의 시간이 더 적었고 빨리 기상했을 텐데. 


아까 내가 손가락에서 미량의 핫소스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바로 닦아내지 않은 것처럼 내 인생에서 귀찮아서 아직 닦아내지 않은 핫소스들이 어딘가에서 불타오르기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그것들이 새끼손가락에 있었는지 검지손가락에 있었는지 엄지에 묻혔었는지 이제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과거에 닦지 않은 나태함은 스스로 앞길에 심은 지뢰가 되어 오늘날 직접 밟아 터뜨려야만 없앨 수 있게 되었다. 오늘의 핫소스처럼 나 혼자 잠깐 참아서 이겨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반대로 진짜로 물로 씻어내지 않으면 안 되는 독극물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면서도 결국 또다시 만난 과거의 핫소스들이 여전히 귀찮아 눈을 질끈 감고 고통을 참으며 외면한다. 오늘은 버텼지만 언제까지 내 몸이 버틸지는 알 수 없다. 그래도 막연히 또 오늘까진 괜찮겠지라고 나태하게 생각하게 된다. 이미 피부에 벤 나태한 핫소스가 정신까지 스며들어 내가 고통에도 대응하지 못하게 만들어버린 것 같다. 


어쩌면 나는 이미 핫소스에 세뇌당한 나를 무의식 중에 인지하고 있는 것 같다. 귀찮아 지나쳤던, 이제는 어디에 스며들었는지 알 수 없는 핫소스들을 오늘날 닦아내야 한다는 생각에 불안해서 나를 더 바쁘게 치열하게 몰아치는지도 모르겠다. 어디에 묻었는지 알 수 없는 과거의 작은 나태함들이 매일의 나를 불안하게 만든다.


그렇게 겉으로 허둥지둥하는 중에 이미 나태한 핫소스에 온몸이 젖은 나는 오늘도 피자박스 하나 놓을 수 있는 것에 만족하며 식탁 하나 없는 작은 방 안에서 다시 조심스레 핫소스 봉지를 뜯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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