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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월의쥰 Nov 10. 2023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 작가가 만들어낸 작가

다니엘 켈만 <명예>

… 요즘에 나는 실업자에다 회사에 취직할 가능성이 크지 않지만, 그때만 해도 난 대규모 통신 회사에서 번호를 관리하고 할당하는 부서의 팀장이었다. 따분하게 들리겠지만 실제 일은 더 따분했다. 아무도 내가 이런 일을 하리라고 생각지 못했고, 우리 어머니가 당신 자식의 빛나는 미래에 대해 말할 때도 이런 일은 예상치 못했다. 한때 나는 피아노를 썩 잘 쳤고, 그림도 어지간히 잘 그렸으며, 사진마다 나온 내 모습은 영리한 눈을 가진 귀여운 아이였다. 세상이 거의 모든 사람의 꿈을 꺾어 버렸는데 왜 하필 내 꿈은 실현되어야 한단 말인가. 독서는 직업이 될 수 없다고 우리 아버지가 말했고, 한때 난 그 말에 무척 분노했지만 내 아이들이 그 나이가 되면 나도 이 말밖에 해 줄 수가 없다. 독서는 직업이 될 수 없다고. 그래서 난 이동통신을 전문 분야로 전자공학을 전공하면서 당시 아직도 아날로그였던 …(후략)


​-다니엘 켈만 <명예> 임정희 역, 민음사 154~5


​<명예>는 중고서점에서 소 뒷걸음치다 횡재하듯 발견한 책이다. 이런 미친 책을 이제야 알게 되다니. 메타-자기 지시적-문학은 언제나 기꺼이 즐겁게 읽을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 이런 분야로 여전히 가장 흥분되는 소설가는 보르헤스고, 이론가는 애증의 호프스태터다.

최근에 메타 연극이라고 할 만한 작품을 한 편 봤는데 매우 실망스러웠다. 메타 문학은 함부로 할 만한 것이 못 된다. 내가 쓰는 행위에 대해, 그리고 내가 만들어낸 세계에 대해 직접 개입하는 판타지를 글을 쓰는 누구나 한 번쯤 꿈을 꿔볼 만은 하지만 작품에 작가가 직접 개입하는 만큼 유치해지기 십상이다. 꾸준히 메타 연극을 만들고 있다는 작가-연출가가 과연 메타의 의미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본 일이 있는지 궁금했다. 일차원적인 설정으로만 이용된 메타 연극은 쉽게 유치해지고 여간해서는 몰입하기 힘들었다.


​다니엘 켈만의 <명예>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돌림노래 형식을 보인다. 메타 문학의 핵심이 내용이 아닌 형식과 구조에 있다는 것을 잘 아는 명민하고 재능이 충만한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이 모두 끔찍하고, 매력 있고, 처절하다. 메타적 성격의 에피소드들이 중간중간 등장하며 독자가 읽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환기를 돕는다. 이것이 소설에 대한 소설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쓰고 있는 것은 누구인가? 소설 속의 작가? 혹은 이 모든 것을 쓰고 있는 작가?


​위의 인용문은 그냥 웃겨서 옮겨 적은 것이다. 감히 독서를 직업으로 선택하려는 생각을 한다는 자체가 웃기기도 하고, 의외로 그런 생각을 해본 사람들이 제법 되는가 싶어 그것 역시 웃기다. 독서가 일이 된다면 난 독서를 지금보다 더 좋아하게 될까, 혹은 덜 좋아하게 될까, 혹은 심지어 싫어하거나 증오하게 될까?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를 확인할 길은 없다.


​이 소설에는 기억에 남을 만한 여성 캐릭터가 다양하게 등장하는데 시니컬한 노인 로잘리에도 그렇지만 ‘동양’ 편에 등장하는 소설가 마리아는 특히 잊지 못할 것이다. 캐릭터도 그렇지만 그녀가 처한 상황은 나의 악몽에 자주 등장하는 상황과 매우 비슷하다. 말이 통하지 않는 낯설고 낙후된 곳에 홀로 남겨지고 어디를 봐도 구원은 없는. ‘동양’ 편을 읽다가 숨이 막힐 것 같아 끝까지 한 번에 읽지 못하고 덮어버릴 정도였다. 그전까지는 킬킬거리면서 잘만 읽고 있었는데 말이다. 비극은 인간을 기습한다. 도저히 피할 수 없는 것이 그 비극의 핵심이다. 난 제발 이 소설의 말미에서 마리아가 구원받은 소식을 읽게 되길 바랐으나 신도, 창작자도 무심하기도 하지. 말도 안 되는 기적과 같은 구원이 로잘리에에게는 깃들고 마리아는 비껴가는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작품 속 작가와 그 작가가 만들어낸 캐릭터인 로잘리에가 대화를 나누는 이야기는 의외로 평범하게 느껴졌다. 대중성을 지향하는 콘텐츠에서 메타적인 요소는 항상 그런 식-캐릭터와의 만남, 혹은 대화, 서로를 인식함-으로 등장한다. 특히 영화에서 자주 나오는 설정이기도 하고 나 또한 어렸을 때는 그런 식의 설정에 매료되어 머릿속으로 이야기를 구상해 본 적도 있었다. 이미 비슷한 내용의 메타소설들이 20세기 초반부터 꾸준히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서는 김이 빠졌지만, 어린 시절에 본, 여러 번의 자살 시도 끝에 자신이 죽지 않는 인간이며, 이는 그가 현실이 아닌 소설 속 인물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된 주인공이 자신을 창조한 소설가의 집에 찾아가 소설이 출간되기 전 원고를 태우며 소멸되는 것을 택한다는 내용의 이름 모를 영화가 머릿속에 생생하게 남아있다. (혹시 이 영화 보신 분이 계실까? 아주 어렸을 적에 tv에서 본 영화인데 제목을 모른다. ㅠㅠ) 이게 옛날 영화이니 원고를 태워서 해결이 됐다지만 요즘 시대라면 일단 작가의 랩탑과 패드와 클라우드, 메일 등등을 싹 다 뒤져서 일일이 삭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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