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한 10대 미혼모 <주노>가 불행해야만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잊을만하면 영아유기 사건이 한 번씩 터지는 것 같습니다. 절대적인 숫자로 보면 그렇게 많지는 않지만, 한 건이라도 일어나면 끔찍한 것이 영아유기 사건이죠. 하지만 임신중절이 법으로 보호되지 않는, 그리고 엄격한 유교적 가치관이 살아있는 한국에서는 어쩌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일 지도 모릅니다. (위헌 판결은 났지만 법 제정은 아직인지라... 아직도 불법입니다.)
왜 말을 못 하겠습니까. 부모한테 말하면 맞아 죽을지도 모르고, 사회에 알리면 '책임감 없는 년' 취급을 받고, 아이 아빠에게 알리면 겁먹고 도망가고, 임신중절을 선택한다 하면 낙태죄와 살인죄가 기다리고 있는데요. 적절한 피임을 하지 않아서 아이가 생긴 책임은 분명 본인한테 있죠. 하지만 중요한 것은 죄를 묻는 것이 아니라 해결 방안을 찾는 겁니다. 애는 이미 뱃속에 들어섰는데, 책임을 묻고 죄를 물어 뭐합니까. 그들이 최대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줘야지.
그래서, 제이슨 라이트먼 감독의 <주노>는 한국 사회에 살고 있는 여성들의 부러움을 사기에 충분합니다. 주노에겐 선택권이 아주 많거든요. 주노는 자기 주도적으로 남자 친구와 섹스를 결정하고, 고등학교 1학년에 임신을 해요. 감독은 키 155cm의 단신 엘렌 페이지를 자주 하이 앵글로 담으며 주노가 미성년자임을 부각시키죠. 하지만 주노는 전화 한 통으로 임신중절을 선택할 수도 있고, 부모님에게 알리고 임산부 영양제도 먹을 수 있었고, 아이를 입양시킬 좋은 집을 찾고 학교도 정상적으로 다닐 수 있었습니다.
만약 <주노>가 한국에서 만들어졌다면 엄청나게 암울해졌을 겁니다. 집도 절도 없는 10대 미혼모,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영양제 하나 제대로 챙겨 먹어본 적 없는, 그러다 양수가 터져서 어쩔 줄 모르고 아이를 낳고 유기하는. 학교를 어떻게 다녀요, 저런 더러운 년이 학교에 다니면 물 다 흐리는데. (라고 학부모들이 말할 겁니다) 부모님도 남부끄러워 애를 쥐 잡듯 잡을 거고, 낙태는 불법으로 숨어서 해야 하는 데다가 몇십 몇백의 돈이 필요하고. 생각만 해도, 스스로 목숨을 끊을 만큼 절망적입니다.
<주노>는 우울함을 의도적으로 싹 걷어냈어요. 좀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발랄합니다. 고통스러운 입덧 같은 것은 아주 가볍게 표현되고, 호르몬이 날뛰면서 이해할 수 없는 감정도 표현할 법도 한데 주노는 침착합니다. 출산의 고통도 순화하고 부모님의 반응도 순화하고. 사실 현실적으로 생각했을 때, 고1 딸애가 와서 임신을 했다는데 침착한 부모가 세상에 어디 있을까요. 하지만 감독은 10대 미혼모들에게 경각심을 일으키는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위로의 말을 건네고 있는 거죠. "임신했다고 인생 끝난 거 아니야. 우리는 이렇게 도와줄 준비가 많이 되어있으니 말만 해. 숨지 마. 죄진 것 아니야."
주노는 친구에게 임신 사실을 알리고, 어떤 방법을 선택할지 고민하다가 가장 쉽게 선택할 수 있는 '임신중절'을 선택합니다. 여기에 필요한 것? 전화 한 통이면 됐어요. 주노는 집에 있는 햄버거 폰을 들고 여성센터에 전화를 걸고, 여성 센터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주노를 들여보내 줍니다. 수술비 같은 것은 요구하지 않아요.
이와 반대되는 사회가 등장하는 영화도 있습니다. 2007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크리스티안 문쥬 감독의 <4개월, 3주... 그리고 2일>이 바로 그 영화인데, 공교롭게도 <주노>가 개봉한 연도와 겹치는군요. 이 영화는 루마니아 최악의 독재자 차우세스쿠가 강제한 출산 정책(1987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차우세스쿠가 도입한 피임 금지(피임기구 판매 금지, 월경 경찰 도입) 정책에 임신 중절 수술에 무거운 형벌을 내리는 강력한 정책으로 여성이 겪게 되는 끔찍한 사건을 다루고 있죠.
이 영화에 등장하는 대학생 가비타는 원치 않는 임신을 했는데, 아이를 낳을 여력이 없습니다. 하지만 차우세스쿠 정권은 임신 중절을 시도하는 여성뿐만 아니라 의사도 10년형에 처할 만큼 강력한 출산 정책 (이것도 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면)을 고수하는 상태. 가비타와 그녀의 친구 오필리아는 우여곡절 끝에 불법 시술 의사를 찾아냈지만 이번엔 돈이 문제가 됩니다. 충분한 돈이 없다는 거예요. 의사는 '이런 푼돈에 내 인생을 걸 수는 없다'라며 만약 안되면 몸이라도 달라(!)고 합니다. 가비타의 룸메이트, 오필리아는 친구를 위해서 이 의사에게 몸을 내주죠. 자, 임신중절이 음지로 흐르면 이렇게 끔찍한 일들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아니, 일어납니다. 1987년의 루마니아에서는 이것이 너무 당연한 일들이었으니까. <주노>와 비교해보면 어떤 사회가 더 바람직한지 확실히 보이지 않나요?
결과적으로 주노는 임신 중절을 선택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생각보다 별거 아니에요. 그냥 '옳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감독은 영화를 보는 이들에게 분명하게 메시지를 던져줘요. 임신중절도 여러분이 가진 선택지 중에 하나입니다,라고. 누군가(영화에서는 동양인 아이로 표현된)는 임신 중절을 죄악처럼 생각하고 비난하기도 하겠지만 그들의 생각은 전혀 중요하지 않게, 우스꽝스럽게 표현됩니다. 그래서 참, 영화가 좋았어요.
여기에 한국 영화라면 절대 등장하지 않았을 씬이 또 등장합니다. 주노가 입만 열면 폭언과 욕설을 쏟아낼 것 같은 대머리 아저씨(J.K. 시몬스)에게 임신 사실을 고백하는데 그들의 반응은 이렇습니다.
물론, 그들도 매우 당황하고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일'로 생각하지만 (차라리 퇴학이나 음주운전이 나았을 거라고) 그녀를 비난하지 않고 그대로 안아줍니다. 새엄마는 영양제부터 먹어야겠다 하고 아빠는 입양 가족을 만나러 갈 때 함께 가겠다고 하죠. 분노하지 않습니다. 한국 영화는 이렇게 못 만들어요. 만약 만들었어도, 현실성이 없다고 엄청나게 까였을 겁니다.
감독은 이 장면을 통해 미혼 임산모에게 두 번째 메시지를 줍니다. 혼자 끙끙 앓고 있지 않아도 된다, 더 경험 많고 여러분을 이해해 줄 수 있는 어른들이 주위에 있다, 고요.
만약 주노가 판단했을 때, 부모에게 이 사실을 밝히면 맞아 죽거나 적어도 심하게 혼이 날 것이라 생각했다면 주노가 이 말을 할 수 있었을까요? 임신은 죄가 아닙니다. 피임을 하지 않았다고, 무책임하다는 말도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차라리 책임을 질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제시해야죠. 감독은 이 신을 통해 사회적인 시선의 변화도 요구하고 있습니다.
주노가 마지막으로 선택하는 선택지는 입양입니다. 입양이지만 아무에게나 아이를 맡기고 싶지 않아요. 임신 중절까지 생각하긴 했었지만 그게 그 생명을 가볍게 여긴다는 뜻은 아니었으니까요. 하지만 여기서 감독은 하나의 옵션을 더하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주노의 가족은 초음파 검사를 하러 병원을 찾습니다. 초음파 기사는 아기의 양부모가 이미 정해져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거 참 다행이네요.'라고 말해요. 주노의 새엄마는 이 말을 놓치지 않고 무슨 뜻이냐고 따져 묻죠.
별거 아닌 말이지만 미혼모에게는 상처가 될 수 있는 말입니다. '넌 아이를 키우기에 충분하지 않아' 같은 말이잖아요. 이런 말을 들으면 위축되고, 내가 뭔가 잘못하고 있는 것 같죠. 감독은 "괜찮아. 직접 키워도 돼. 훌륭하게 키울 수 있어"라고 말을 겁니다. 그리고 새엄마의 예측은 사실로 드러나는데,
엄마가 말한 대로, 이 사람은 주노보다도 책임감이 없군요. 차라리 주노가 더 잘 키우겠어요. 남편의 고백에는 사실 꽤 심각한 반전이 숨어있는데, 영화 보시는 분들의 소소한 즐거움을 위해서 반전은 밝히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요즘은 첫 경험을 초등학교 때 하는 아이들도 많다고 합니다. 어휴, 말세다 싶겠지만 그 정도로 2차 성징이 빨라진 세대니까요. 음... 제가 상담을 해 주었던 한 친구는 고등학생이었는데 친구들과 쓰리썸(..)을 한 얘기를 굉장히 담담하게 할 정도예요. 분명 우리의 학창 시절과는 상당히 달라진 성 관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모든 종류의 성적 이야기에 면역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아니었어요... 고등학생의 쓰리썸은 꽤 충격적이었습니다)
그 친구들에게 섹스의 고결함과 생명의 가치를 설파하려고 한다 생각해보세요. 귓등으로도 안들을 겁니다. '콘돔을 꼭 사용하라'라고 가르칠 수도 있겠지만, 남자 친구가 '에이, 임신 안 해. 괜찮아. 너도 콘돔 안 낀 게 더 좋잖아'라고 하면 깜박 넘어갈 수도 있어요. 그러다가 덜컥 애가 생기면, 어떡하나요? 자동으로 대역죄인이 되는 건가요? 인생 끝장난 거예요? 한강 갈까요?
'그렇게 사회적으로 다 받아주면 도덕적 해이가 발생할 수 있다'라는 말은 제발 안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임신이 그렇게 만만한 게 아닙니다. 아무도 비난하지 않고 합심해서 도와준다 해서, 아이들이 '아! 임신은 별거 아니구나!'라고 생각하게 되진 않을 겁니다. 어쨌든 뱃속에 7kg짜리 태아를 넣고 다니는 것은 매우 불편하고, 희생이 따르는 일입니다. 몸 망가지고 호르몬도 날뛰고, 아이 낳을 때의 고통은 또 어떻고요.
얼마 전 <툴리>의 리뷰에서도 했던 말 입니다만, 제이슨 라이트먼 감독, 참 시선이 따듯해요. 그의 영화는 실제로 사람의 삶을 바꿀 수 있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메시지를 전달하면서 영화 자체의 '재미'도 절대로 놓치지 않아요. 영화를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는 감독입니다. 영화를 예술로 승화시키는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 보이지만,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세상을 바꾸고 싶어 하는 분 같아요.
결과적으로 <주노>는 모든 사람들에게 매우 추천할 만한 영화입니다. 가볍게 코미디라고 생각하고 즐겨도 충분하고, 메시지를 떠올려봐도 좋아요. 제이슨 라이트먼 감독의 이름이 여러분의 기억에 남게 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