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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상구 변호사 Sep 15. 2023

034 한가위 어느 재판 : 논리와 경험칙

(2023년 9월 15일 칼럼 기고분)

 18세기 조선 추석 무렵, 어느 관아에서 선비 하나가 ‘절도미수’로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배나무 주인이 “배밭에서는 갓 끈도 고쳐 매지 말라는 말이 있거늘, 가뜩이나 역병과 흉작으로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던 차였는데, 배밭에 나갔다가 바로 이 자가 배를 훔치려는 걸 목격했나이다.”라고 사또에게 선비의 죄를 고하자, 선비는 “배나무 밑에서 머리 위로 손을 뻗은 것은 사실이나, 배를 훔치려 했던 것은 아니옵니다”라고 간략하게 항변합니다. 


이에 대해 형방(刑房)은 “사또! 이 일 자체는 큰 죄라 볼 수 없겠으나, 이 자가 다른 마을 배밭에서도 배를 훔치다 적발됐던 적이 있사온데, 어인 영문을 모르겠으나 합의보고 유야무야시켰던 전례가 두 차례나 더 있다 하옵니다. 그리하여 금번에는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상습적인 일이라 여겨 정식으로 고하게 되었나이다”라며 재판의 경위를 설명합니다.


이때 선비의 국선 외지부(변호인)가 일어서서 이르길 “존경하는 사또 나으리. 접견을 해보니 이 선비가 예전에 배나무 주인들과 합의를 본 것은 땅에 떨어진 배를 만졌다는 이유로 절도범으로 몰리자 배값 주고 문제 삼지 않기로 합의한 것이지 절도를 인정했기 때문은 아니옵니다. 이 사건에서도 이 선비는  머리가 근지러워 갓을 고쳐 쓰려고 한 것일 뿐 절도의 범의 자체는 없었나이다. 결국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선비의 절도 범의가 입증되었다고 볼 수 없으므로, 이 자를 무죄 방면하여 주시기 바라옵니다”라고 변론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사또가 선비에게 “어인 일로 야밤에 배밭에 가게 되었습니까?”하고 묻자, 선비는 허름한 행색으로 “당시 제가 밤늦게까지 독서삼매에 빠져 있다가 불현듯 배(腹)에서 소리가 나기에 독서를 중단하고 인근 마을 배밭까지 한 바퀴 돌고 있던 참이었습니다.”라 답변을 합니다.   




   21세기 현재 형사재판제도는 실체진실발견을 이념으로 삼고 있지만, 증거재판주의를 기초로 하고 있으므로 증거불충분 등으로 인한 무죄는 실체진실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선현들은 끊임없이 진실발견을 추구해 왔는데, 그 방법론적 기준이 논리와 경험칙입니다.


법조문을 보겠습니다.

형사소송법 제307조(증거재판주의) 제2항은 “범죄사실의 인정은 합리적인 의심이 없는 정도의 증명에 이르러야 한다.”라고 규정하고 있고, 제308조(자유심증주의)는 “증거의 증명력은 법관의 자유판단에 의한다.”라고 정하고 있습니다. 

자유심증의 의미를 좀 더 명확히 하기 위해 민사소송법 제202조(자유심증주의)를 살펴보면, “법원은 변론 전체의 취지와 증거조사의 결과를 참작하여 자유로운 심증으로 사회정의와 형평의 이념에 입각하여 논리와 경험의 법칙에 따라 사실주장이 진실한지 아닌지를 판단한다.”라고 정하고 있습니다.


이때 ‘논리’란 플라톤식 연역법(3단 논법)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고 볼 수 있고, ‘경험칙’이란 베이컨식 귀납법(경험론)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는데, 경험칙 중에서 사회생활관계에서 축적된 경험칙은 자연법칙이나 법규범처럼 보편타당성을 갖는다고 단정할 수 없으므로 사회적 경험칙의 선택이나 판단에는 재량의 여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위 사안에서 배나무 주인은 ‘배밭에서는 갓 끈도 고쳐 매지 말라’는 논리를 펴고 있는데, 이는 배밭에서의 행동은 절도인 경우가 많다는 사회생활상 경험칙을 든 것입니다. 형방이 내세운 유죄 주장의 근거 또한 ‘과거에 유사한 사례가 있었으니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봐야 한다’는 사회생활상 경험칙으로 볼 수 있습니다.




   위 사례에서 사또가 21세기 형사법을 배웠다면 어떤 판단을 했을지 그 과정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① 일단 형사재판에 있어 사실(고의와 같은 내적 사실을 포함)에 관한 심증형성은 직접증거 뿐만 아니라 간접증거에 의할 수도 있는바, 배에서 소리가 났다는 사실은 배가 고팠다는 의미일터 절도의 범의를 뒷받침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합리적인 의심을 할 여지가 없을 정도의 확신을 갖게 할 증명력을 가진 엄격한 증거로써 범죄사실을 인정해야 하는데, 가난하다고 모두 절도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고 배가 고프다고 해서 무조건 절도로 가는 것은 아니니까 비록 선비의 주장이나 변명에 모순되거나 석연치 않은 면이 있어 유죄의 의심이 가더라도 선비에게 유리하게 판단할 수밖에 없겠군(대법원 2009. 1. 15. 선고 2008도8137 판결 등). 

② 더구나 합리적 의심이라 함은 논리와 경험칙에 기하여 요증사실과 양립할 수 없는 사실(갓을 고쳐 쓰려던 것)의 개연성에 대한 합리성 있는 의문을 의미하는 것이지 관심법(觀心法)을 포함하여 모든 의문, 불신까지 포함되는 게 아니므로, 선비의 주장이 사실일 개연성도 충분하다면 유죄의 온전한 입증이 이루어졌다고 보기 어렵다 이거지. 그러게 형방이 증거를 더 모았어야지. 쯧쯧. 

③ 그러고 보니 미수죄는 ‘실행의 착수행위’가 있어야 하는데, 선비의 손이 배와 접촉하지도 않았다면 선비가 절도의 고의가 있었다 해도 불가벌(不可罰)적 예비(준비) 행위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겠는걸.


   대략 위와 같은 사유과정을 거쳐 사또가 ‘심증은 100%이다만 물증이 없구나’란 취지로 씩씩거리며 무죄판결을 쓰려던 참에 관아로 합의서가 접수되었습니다. 


<풍요롭지만은 않은 한가위를 앞두고... 각박해진 세상, 쓸쓸한 마음에 탁주 한잔 나누며 대화를 나누어본 결과, 선비는 배나무 주인에게 직접 쓴 서예 글씨 하나를, 배나무 주인은 선비에게 배 한 줄을, 선물로 맞교환하고 앞으로 형·동생 삼기로 한다.> 


사또는 생각합니다.

‘아차! 선비는 찐으로 그냥 배가 고팠을 뿐이고, 자신보다 더 배가 고팠을 서민들의 동태를 살펴보기 위해 이웃 마을까지 한 바퀴 돌았을 수도 있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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