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분히 그럴만한 일인 거지
거짓말 같은 일도 일어날 것만 같은 날이기도 하니까
아직 햇살이 목덜미를 어루만지지 못한 새벽. 어둠이 깊게 깔린 도로 위로 바람이 느릿하게 스며든다. 오늘은 만우절이다. 하지만 어떤 거짓말도 오늘의 기억을 덮을 수 없다.
세상에는 발이 없는 새가 있다지. 평생을 날다가 지치면 바람 속에서 쉰데. 딱 한 번 땅에 내려앉는데, 그건 바로 죽을 때야.- <아비정전> 中
1분 1초라도 함께하지 않으면 그건 평생이 아니야. <패왕별희> 中
2003년 4월 1일. 장국영은 홍콩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에서 스스로 몸을 던졌다. 그의 나이 마흔여섯. 창밖으로 떨어지는 그의 마지막 순간을 본 사람이 있을까. 그의 팬들은 한때 만우절 농담이라고 믿고 싶었지만, 이 죽음은 사실이었다.
그는 떠나기 전 짧은 메시지를 남겼다. “한 명의 20대 청년을 알았다. 그와 탕탕 사이에서 누구를 선택해야 할지 몰라 너무 괴로웠다. 그래서 자살하려 한다.” 사람들은 이 유서의 의미를 두고 많은 추측을 했다. 가장 널리 퍼진 소문은 홍콩 영화계와 얽힌 삼합회였다. 장국영은 그들의 존재를 부정했다. 그리고, 그가 사라졌다.
그날 저녁, 거리는 유난히 고요했다. 해 질 무렵, 늦은 친구를 기다리며 길가에서 담배를 피우던 사람들은, 노을을 배경으로 펼쳐진 도시의 조용한 슬픔을 목격했을지도 모른다. 노을빛이 유리창에 반사되어 황금빛으로 물든 그날. 나는 그녀와 마지막으로 나눈 대화를 기억한다.
너무 슬퍼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태어남보다 죽음이 더 짙은 기억이 될 수 있다고, 그때 생각했다.
나는 1964년 4월 1일, 부산에서 태어났다. 막내였고, 사랑받았고, 공부를 잘해 서울대에 입학했다. 같은 학번에는 이름만 대면 알 법한 인물들도 많다. 친구들은 나를 두고 “얼굴이 하얗고 해맑은 친구”라고 기억할 것이다.
스물두 살이 되던 겨울, 차디찬 손이 나를 붙잡았다. 경찰들이 들이닥쳤고, 나는 끌려갔다. 그들은 선배가 어디 숨었는지 말하라며 나를 물속에 처박았다. 숨을 쉴 수 없었다. 그리고 나는 돌아오지 못했다.
너희 아들, 너희 제자, 너희 젊은이, 너희 국민의 한 사람인 박종철은 어디 있느냐.
<고 김수환 추기경, 1987년 박종철 열사 추모 미사 中>
살아 있었다면, 나는 지금 육십 대 초반이었을 것이다.
난 죽기 전에 단 하루만이라도 참다운 인간의 모습을 찾을 수 있는 사회에서 사는 것이 소망이다. 그리고 꾸준히 노력할 것이다. 어떠한 모습으로든. <1986년 3월, 박종철의 편지 中>
이제 남은 것은 기억뿐이다. 죽음은 사라짐이 아니라, 더 깊게 각인된 존재의 또 다른 모습일지도 모른다. 만우절, 그들이 떠난 날, 우리는 다시 그들을 기억한다.
만우절에 태어난 나는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가. 거짓과 진실이 뒤섞인 이 날, 죽음이 아니라 삶을, 사라짐이 아니라 남겨진 것들을 기억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