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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약 May 31. 2020

28개월 아들이 목욕을 시켜줬다.

82년생 풋내기 가장



맞벌이 부부의 육아일상은 어느 집이든 매우 가변적이다. 이를테면, 애가 아프다고 하면 둘 중 그나마 덜 바쁜 사람이 조퇴를 하던 연가를 쓰던 뭐든 어린이집으로 튀어가 애를 들춰안고 병원으로 뛴다던지 이런 것 말이다. 의사 선생님이 괜찮다 하면 가슴을 쓸고 집으로 데려오지만, '어 생각보다 상태가 많이 나빠졌어요' 하면 가슴이 덜컥 내려 앉는다.


입원. 으악.


야근. 이것도 골치다. 아빠가 야근을 하면 그나마 좀 낫지만 엄마가 야근을 하면,  시간이 늦어질수록 아이는 엄마를 맹렬히, 간곡히, 목메이게 찾기 시작한다. 엄마를 찾는 시점을 최대한 늦추기 위해 아빠는 아눈 뒤집어지게 좋아할만한 것들, 원하는 것들을 께하면서 '평화로운 시간'을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제는 아내가 늦게 퇴근하는 날이었다.


고기 무국 푹 끓여 아들과 먹을 셈이었는데 그 셈이 틀렸다. 아들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장난감 진열대에 놓인 자동차란 자동차는 다 꺼내서 나에게 본격적으로 놀이에 참여할 것을 강력하게 제안했다.


아빠. 핸드폰 치워요. 아! 만지지 마세요~~~


난 이미 회사에서 체력을 다 소진하고 왔는데 어쩌지.  요리는 못 하겠다. 계획 변경. 치킨 하나 시켜 나눠 먹자.


"네 ㅇㅇ치킨입니다."

"네 여기 어디어디 몇 동 몇 호인데요. 후라...휙!(뺏어감)아빠 전화하고 있어요? 어디 전화해요? 아빠 전화 어디해요? 아빠! 아빠!"

"고객님. 자녀분이 옆에 있어 잘 안들립니다. 메뉴 다시 불러주세요!"

"네 후라이드...휙! 아빠 전화해요? 엄마에요?"

"고객님. 다시 전화 걸어주시겠어요?"

"후라이드요!!! 아빠! 후라이드/아빠 후라이드/아빠 후라이드/아빠."

"네 알겠습니다!"


자동차 놀이라고 하면 대략 이렇다. 차 끼리 마주쳐서는 인사하고 어디가냐 묻고 안녕하고 가는 것, 내가 차를 몰고 가면 애가 쥐고 있는 공룡이 나타나 차를 간지럼 태우고 차는 카센터 아저씨에게 헬프쳐서 '공룡아 다음엔 그러면 안된다 알았지?/네~~' 대화를 나누는 것, 불이 나면 "불 났어요 큰일이에요" 내가 외치면 소방차가 나타나 불을 끄고 만약 소방차가 닿을 수 없는 곳에 불이 났다고 애가 소리치면 "헬리곱터 도와줘!" 내가 외치면 두두두 헬리곱터가 날아와 불을 끄고 나는 박수를 친다는 대략 이런 식의 내용이다.


 놀이는 단발성이 아니라 아이가 만든 규칙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왜 이것이 규칙이냐 말할 수 있는가 하면 이 놀이를 가만히 두면 두 시간 세 시간이고 끊임없이 같은 패턴으로 반복기 때문이다.


이 게임은 아이가 스스로 만족하고 파할 때까지 계속 되어야 한다. 물론 애써 잔머리를 굴려 아들의 '지루한 게임'에서 벗어나도 나에겐 별 문제는 없다. 다만, 하나 분명한 사실로 인해 아빠는 아이의 룰을 깨지 않는다.


아이는 아빠와의 이 시간을 하루종일 기다렸다.


이 와중에 밥 먹이고, 코 닦아주고, 기저귀 갈아주고, 야구 스코어도 틈틈히 보고하다 보면 3시간은 계곡물 흐르듯 이미 9시-10시의 웅덩이까지 도달해 있다. 이 쯤 되면 띠띠띠띠 집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아들은 바람처럼 달려가 엄마를 맞이한다. 나는 그대로 누워 버린다.


잘 해냈어!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다. 내도 지칠 때로 지쳐 돌아왔다. 안방에 뻗어 졸음이 온 몸에 마취제로 엄습해 올 즈음, "여보 애랑 같이 씻어!" 귓가에 사이렌이 울린다. "어어!" 반 정신이 나간 상태로 어그적어그적 욕실로 간다.


역시나 아들은 욕조 위에 자동차를 줄줄이 세워놨다. 물에 들어가니 아들이 나를 빤히 본다. "음?왜그래?" 물으니 애는 답은 안하고 아기용 목욕젤을 계속 펌프질 한다.

"어? 이러면 다음에 서원이 씻을 게 안남게 되는데?" 했더니  아들이 대뜸,

"아빠. 누워!"
"누워?? 이렇게?"
"아니아니~~ 이렇게 수영하듯이 누워!"

물놀이 하자는 건가 해서 엎드렸더니 다시 뒤집으란다. 그래 누웠어요 하고 있으려니 애가 손에 가득 묻힌 젤을 목이며 가슴 배 무릎 다리까지 열심히 발라준다.

나는 눈이 동그랗게 말려서는 아들이 시키는대로 움직이기만 했다. 아들은 중간에 힘에 부쳤는지 갑자기 자기 팔에 젤을 묻혀서는 팔 전체로 쓱싹쓱싹 목욕을 시켜줬다. 애가 힘이 세니 자연스럽게 안마까지 되었다. 감기던 눈에 번쩍 힘이 들어왔다. 우리는 목욕을 마치고 새로 산 수면용 커플 의상으로 갈아입었다.


드래곤볼의 손오공. 서로 에네르기파를 쏘기 바쁘다.


한 참 서로 노래하고 뒹굴고 쏘고 엎어지고 깔깔대고 하다보면 어느 새 잘 시간이다. 아들이 이불을 포옥 감싸고 누워 엄마를 부른다.

 

"엄마!"

"응 아들!"

"오늘 정말 재밌었어요."

"응 엄마도 너무너무 재미있었어요. 엄마는 서원이를 세상에서 제일 사랑해요!"


엄마면 어떻고 아빠면 어떠냐. 아내와 나는 기특해서 그저 웃기만 한다.




내가 애를 키우는 건지, 애가 나를 키우는 건지, 아이와 함께 살다보면 무엇이 정답인지 알 수 없는 지경에 이를 때가 종종 있다. 그래서 '육아'는 아이를 보살피기도 하고, 나를 보살피기도 하고, 내 어릴 적 모습을 되돌아보게 하기도 한다. 주니어와 생활한다는 것은 시공간을 초월하는 참으로 복잡미묘한 것이다.


28개월 아기가 서른아홉 아빠를 목욕시켜주는 이 특별한 경험은 사실 무어라 적기에도 아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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