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백약 Jul 12. 2020

너희 부모님이라면 어떻게 했을 것 같니?

82년생 친구 살이



그의 집 문이 열렸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매실이었다. 박스 두 개에 담긴 어마어마한 양의 매실.


"야. 이건 또 왜 샀어?"

"담그려고."

"니가?이 걸 다?"

"어. 하나는 청, 하나는 술 만드려고."

"쉬는 날도 별로 없는 애가 별 걸 다 하는구나... 아무튼 고맙다. 덕분에 쉬어간다."

"집이 완전 쓰레기거든. 알아서 잘 피해 다녀."

"니가 진짜 쓰레기집을 못 봐서 그래. 이 정도면 클린 컴플릿인데?"


널찍한 침대, 엄청 큰 소파와 테이블, 그 앞의 무지 큰 티비, 넉넉한 공간은 아니지만 무엇이든 해 먹을 수 있는 주방. 음? 복층이네? 오피스텔 찾는다더니 깔끔한 성격 따라 잘 골랐구만.


"나가자. 뭣 좀 먹자."

"그래. 술만 마시면 돼."

"난 안돼. 너무 피곤해."

"이 주변에 근데 내가 다녀본 적이 없어서 좀 걸으면서 찾아야 할 거야."


양평 출장이었다. 전주에서 네비로 찍었을 땐 3시간 나왔는데 아 역시 이론일 뿐, 실제 소요시간은 4시간 반이 넘었다. 해는 저물어가고, 새벽부터 하루 종일 현장에서 뛰니 온 몸에 기가 빠져 도저히 이대로는 못 가겠다 싶어 궁여지책으로 생각한 것이 마이클의 집이었다. 아내도 오다 사고라도 나면 큰일 난다 하여 안양으로 차를 몰았다. 그래. 어차피 내일 대체휴무인데 안전제일!


안양이라는 도시. 수도권 어느 도시가 그렇듯 겉으로 보면 컨트롤 씨, 컨트롤 브이다. 빌딩 빌딩 아파트 아파트 상가 상가 마트 마트. 얼마 걷다가 마이클이 선택지를 줬다. 고기, 곱창, 회 세 가지 중 골라. 음 좋아 회.


날씨도 제법 선선해서 밖의 간이 테이블로 자리를 잡았다. 앞에 온갖 물고기들이 꾸물꾸물 헤엄치며 자신의 차례만을 기다리고 있다. 도미야 미안하다. 잘 먹고 힘낼게. 좋은 세상으로 가렴.



"사장님. 소주 진짜 완전 시원한 걸로 주세요."


둘이 주거니 받거니 하며 출장은 어땠네, 이 동네는 이러네, 회사는 어쩌네 이 얘기 저 얘기 둥둥둥 술로 흘려보낸다.


"야. 우리 아들이 너 앨범에서 보면 알아본다?"

"진짜? 한 번 봤을 뿐인데? 설마."

"안 믿네? 영상통화 한 번 해볼래?"


역시나 아들은 화면이 뜨자마자 신난다고 짱구처럼 춤추며 이거 뭐야 아빤 뭐해 난리가 났다. '삼촌 만났어요 인사하세요' 하니 호기심에 가득 차서는 껌뻑 껌뻑 마이클을 살펴본다. 마이클이 재롱을 부리니 꺄르르 얼굴에 웃음기가 가득하다. "삼촌 놀러 오세요~~" 하고 전화를 마쳤다.


"와 신기하다. 그때가 한 살이 안되었을 땐데 나를 알아보네?"

"애들이 딱 자기 취향이 있어. 얘는 더 심하고. 너, 그리고 내 후배 한 명, 회사에 사무관님 한 명 딱 세 사람만 좋아해."

"왜 그러지?"

"그게 가만히 보니까 일단 인상이 좋아야 되고, 애가 좋아할 만한 제스처나 기본 행동이 깔려 있어야 하고, 나머지는... 그냥 얘 마음이야."


마이클은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소주를 입에 털어 넣는다. 자리 옮기잔다.



돼지를 부위별로 파는 가게였다. 내가 좋아하는 껍데기도 있다. 사람이 별로 없다. 가게 주인 양반의 얼굴에 그늘이 가득하다. 그래도 꿋꿋하게 친절로 손님을 대해준다.


"너 어떡할 거야?"

"뭘?"

"뭐긴 뭐야. 결혼. 한다며?"

"글쎄다..."

"여자 친구는 언제 오는데?"

"모르지... 걔 비자도 이제 없고, 온다 해도 할 게 없고, 둘이 벌어 살아야 되는데 그것도 안되고, 본지도 오래됐고..."

"얼마 전에 왔다며?"

"어."

"중국엔 언제 갔는데?"

"2월."

"뭐? 얼마 전이라는 게 2월이라는 거야?"

"어."


불판이 익었다. 사장님 이 정도면 먹어도 되죠 물으니 어유 그럼요 드세요 하신다. 고기 한 점 술 한 잔 또다시 시작이다. 맛집이네.


"그래서 요즘은 주말에 부모님 집에 있어. 평일에도 그렇고."

"부모님은 뭐라고 하셔?"

"엄마는 당연히 싫어하지. 왜 한국사람 안 만나냐고. 근데 이젠 좀 포기해서 할 거면 빨리 하고 아니면 헤어지라고만 하지. 아빤 아예 아무 말도 안 하시고."

"그래. 결정할 때가 됐어."

"그치. 근데 잘 안된다."

"그냥 내 생각이지만... 끝내는 게 좋을 것 같다. 코로나로 올 수 있을지도 미지수고, 그것보다 지금 얼마를 이렇게 끌었냐? 저번 가을부터 한다고 밀어붙였는데... 곧 있으면 1년 채우겠다. 우리도 이제 적은 나이도 아니고..."

"소개팅 시켜줄 거야?"

"니가 때려치우면 그때 해줄게."

"어떻게 때려치우지?"

"봐. 이렇게 숟가락을 들고 젓가락을 때려. 그리고 휙! 젓가락을 던지면... 안되지. 흉내만."

"재밌다."


요즘 절주하고 다이어트 중인데 이제 망했다는 둥, 둘째도 생기는데 벌써 갓난아기 키웠던 기억이 다 날아갔다는 둥, 전주엔 술 마실 사람이 없어 그게 아쉽다는 둥 술잔에 이런저런 이야기 배를 띄워 보낸다. 다짜고짜 마이클이 묻는다.


"근데 너 말야. 만약에 너 아들과 너의 목숨 중 누구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하면 넌 너 아들에게 목숨을 줄 수 있어?"

"말이야 막걸리야. 뭔 소리야?"

"아니 진짜로 묻는 거야."

"그치."

"정말?"

"어."

"왜?"

"왜라... 일단 뭐 난 살만큼 살았고, 내 아들은 살 날이 창창한데 내가 가는 게 맞지 않겠어?"

"난 아직 애를 안 낳아봐서 모르겠는데 나는 안 그럴 거야."

"아니. 너도 그럴 거야. 넌 분명히 그럴 거야."

"아니. 난 안 그래."

"그럼 소주 세 잔 연타로 마셔."


마신다. 바보 같은 놈. 이유나 들어보자.


"나는 난데 왜 내 자식과 목숨을 바꿔야 돼? 좀 이런 비유는 잔인하긴 하지만 만약에 우리 부모님이랑 나랑 둘 중 선택하라고 하면 난 내가 살 거야."

"하하하하하하하."

"왜 웃어? 난 진짜로 그럴 거야."

"당연히 그렇지. 당연히 그렇게 될 거고."

"왜?"

"야. 니 말대로 저승사자가 왔어. 그래서 너랑 부모님이랑 딱 세워두고 '자 부모가 살겠소 자식이 살겠소' 물었어. 너는 '제가 살게요' 했어. 그럼 말야. 저승사자가 부모님한테 물으면 뭐라고 답하실 것 같아?"

"음... 아마..."

"그래. 왜 그 뻔한 얘길 하고 있어. 부모님이 아들 셋을 낳아서 평생을 다 바쳤어. 외국에서 너 키운다고 엄마 아빠가 떨어져서 몇 년을 사셨어. 엄마 아빠도 자기 인생 산다고 하면 너한테 그렇게 할 아무런 이유도 없어. 조금 더 선택지를 넓혀볼까?"

"어떻게?"

"저승사자가 '음 부모의 뜻이 그렇다니 그럼 엄마 아빠 중 한 명만 데려가겠소' 하면 어떻게 될까?"

"그러게.."

"내가 살게요 그러시겠어? 엄마는 성민 아빠 그동안 너무 고생했어요 제가 갈게요 하실 거고, 아빠는 성민이는 엄마가 필요합니다 제가 가지요 하실 텐데 그럼 그때 너한테 선택권을 주면 너 어떻게 할래?"

"하하하하. 그냥 내가 가는 게 낫겠다."

"그래! 부모자식 관계라는 게 이게 말로 설명이 안돼요."

"넌 아기 나오는 거 봤어?"

"봤지."

"막 기절하는 사람도 있다는데?"

"그게 사람이라서 그래. 사람이기 전에 생물인 걸 잊어버린 거야. 아니 내 자식 나오는 게 징그러우면 똥오줌은 어떻게 치우냐?"

"낳아보니 어때? 그런 어떤 느낌 말야."

"느낌이라... 그냥... 그래. 한 가지 생각나는 게 있어."

"뭔데?"

"애 백일이었는데... 그냥 부모님 모시고 집에서 조촐하게 잘하고 사진도 찍고 재밌게 보냈어. 다 가시고 집 치우고 애 재우려는데 애가 갑자기 우는 거야. 그래서 안고 서재로 들어갔는데 갑자기 눈물이 나는 거야. 끌어안고 펑펑 울었어."

"왜 울었어?"

"나도 몰라. 그냥 울었어. 내 새끼 내 새끼 이러면서. 그게 참... 말로는 이게 설명이 잘 안되는데 정말 이상한 기분이 들었던 건 맞아."

"음... 재미있군. 아. 내일 나도 쉬고 싶다. 그럼 또 술 마시면 되는데."

"쉬어."

"아마 영원히 쉬라고 할 거야."


이른 아침, 흔들어 깨우는 손에 눈을 떠보니 앞에 국수 한 그릇이 놓여있다.




"간장 국수 같은 거야. 해장하고 가. 문은 밖에서 아래로 당기면 자동으로 닫혀. 다음에 서울 올 땐 미리 전화하고."


후다닥 옷을 집어 입고 마이클은 그렇게 나갔다. 나도 주섬주섬 일어나 물 한 병을 다 마시고 뉴스를 켜 둔 채 면을 후루룩 후루룩 들이켰다. 주변을 둘러본다. 여자 친구와 함께 한 사진이며 액자며 기념품 온통 사랑 천지다. 아. 충고랍시고 함부로 말하는 게 아니었는데. 전화가 온다.


"그 테이블에 보드카 두 개 있지?"

"어."

"그거 갖고 가. 하나는 그냥 보드카고, 하나는 내가 담근 거야. 맛을 비교해 보라고. 그리고 그 옆에 위스키도 가져가. 치바스보다 더 부드럽고 진짜 가성비 짱이야."

"아니 이 많은 걸 어떻게 가져 가? 그냥 너 먹어."

"냉장고 열어봐봐."

"왜?"

"열어봐. 거기 문 두 번째 칸에 와인 하나 보일 거야. 그것도 가져가. 진짜 맛이 괜찮아. 그리고 탄산수도 종류별로 있으니까 내려가면서 마셔."

"아니 그러니까..."

"냉장고 옆에 마트 봉투 보이지? 많으니까 거기 잘 싸서 차에 넣어 가."


차를 몰고 오는 내내 생각했다. 마이클은 자식 낳으면 간쓸개 다 내주겠구나.







매거진의 이전글 그가 포장마차에 숨은 이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