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돌이 할머님은 고고하신 분이었다. 늘 새벽같이 일어나셔서는 정갈한 옷차림으로 불경을 외우시고 정성스레 먹을 갈아 붓글씨를 쓰셨다. 꼬부랑 허리에 거동도 힘드신 몸을 이끄시고 집구석구석을 쓸고 닦으셨다. 그렇게 매일매일을 꾸준하게 사시다 돌아가셨다. 장례식날, 나는 할머님 사진을 보며 진정으로 극락왕생을 기원했다.
방학이면 맨돌이네서 자주 묵었다. 청운초등학교 사이 골목을 따라 들어가면 고목나무 밑 구멍가게가 보이는 삼거리 오른쪽에 위치한 3층 집. 정말 마르고 닳도록 놀러 갔다.
우리는 그곳을 맨돌씨티, 또는 라스베이거스라 불렀다. 들어가기는 쉬워도 나오기가 어려웠다. 피파, 위닝, 각종 만화책 등 그 나이 때에 놀 수 있는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었다. 그곳의 세 시간은 밖의 3일과 같았다. 3층 할머님 방을 제외하면 사실상 그 층의 모든 공간을 맨돌이가 썼다. 아니, 우리가 썼다.
나는 잠이 짧았다. 새벽이면 혼자 일어나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시고 의자에 걸터앉아 해 뜨는 광경을 지켜보곤 했다. 그러다 종종 할머님과 마주쳤다. 그럼 황급히 일어나 인사를 드리고 안부를 여쭈었다.
할머님은 매번 내 손을 부여잡으시며 ‘자주 놀러 와서 얘 좀 잘 챙겨주라’ 신신당부를 하셨다. 나는 ‘저희가 챙겨 받는 거예요’ 하며 또 놀러 오겠다고 고개 숙여 인사드리고서 집으로 조용히 돌아갔다.
그때, 할머님 말씀을 좀 더 귀 기울여 들었어야 했다. 놓친 부분이 분명히 있었다.
나쁜 애들이랑 못 어울리게 해 달라는 이야기였다. 나는 그게 우리 중 누군가를 지칭하는 것인 줄 알고서 죄송한 마음에 ‘저희가 더 신경 쓰겠다’ 고만했다. 할머님 눈가에 맺힌 눈물을 좀 더 생각해봤어야 했다. 고2 무렵, 맨돌이가 우리를 부르는 횟수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우리 말고 누군가가 이 집에 들락거리고 있었다.
고3이 되어, 나나 영뽀는 맨돌이를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우리 집은 화재로 사단이 났고, 영뽀는 어머니 간병에 제 코가 석자였다. 돌파구는 하나였다. 같은 반이었던 우리는 맨 앞자리 중앙에서 두 번째 좌석에 앉아 공부만 했다. 영뽀는 머리를 밀었다. 서로 교대로 자면서 깨워주고 알려주고 공유했다. 청운동을 잊어버렸다.
수능이 끝나고 동네 친구들은 모두 종로 2가에 모여 축하파티를 했다. 그때 맨돌이가 생각났다. 전화를 걸자 없는 번호라는 멘트가 나왔다. 청운동으로 전화를 걸었다. 맨돌이가 사라졌다.
맨돌이에게 전화가 온 것은 저녁 9시경이었다. 지금 당장 와 줄 수 있냐고 했다. 어디냐 물었더니 제기동 포장마차란다.
“거긴 왜 있어?”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고 혼자만 와.”
“이 밤에 어디가??” 안방 문 사이 졸음 가득한 엄마 얼굴을 뒤로하고, 나는 주섬주섬 옷을 챙겨 서둘러 집을 나섰다.
유달리도 가로등이 없는 동네. 아파트 단지 사이로 검푸른 고가도로가 지나가는 철골 더미 시멘트 구역. 비가 올 것 같은 칙칙한 날씨 탓인지 을씨년스러운 한기가 살갗을 더욱 조여왔다. 수능 정시가 이제 막 끝난, 스무 살 2월의 겨울밤이었다.
비닐 문을 걷자, 우중충한 검은 패딩을 간이의자에 두고 앉아, 오뎅국물에 소주 하나 두고 홀짝거리고 있는 놈 하나가 딱 들어왔다.
“왔냐?”
한 동안 우리는 말없이 술만 마셨다. 닭똥집 하나를 안주로 시켜놓고 따라주고 마시고 따라주고 마셨다. 반시간쯤 지났을까, 내가 운을 뗐다.
“어디 갔었어?” “어. 부산.” “부산?? 부산... 거긴 왜?”
수능날, 맨돌이는 새벽같이 나와 시험장을 제끼고 서둘러 부산으로 향했다. 연고도, 친구도 없는, 아무도 모를 그곳으로 쌈짓돈만 챙겨서는 무작정 떠났다. 도대체 무엇 때문이었는지 묻기 전에 녀석이 먼저 실토했다.
“그게 내 최고의 복수였거든.” “무슨 복수?” “내가 걔한테 구라 쳤어. 너 시험만 보면 우리 집에서 알아서 좋은 대학 보내줄 거라고.” “뭔 개소리야? 그리고 걔는 누군데?”
한 잔 입안에 톡 털어놓더니 술병을 만지작 거리며 뜸을 들인다.
“ㅁㅁㅁ.” “뭐?????”
일진 축에는 끼지도 못했던, 하이에나처럼 그 바운더리만 기웃대던, 금테 안경을 쓴 깡마른 체격에 복도 바닥에 침만 뱉고 다니던 그놈. ‘민간인’도 아니고, ‘건달’도 아닌 ‘반달’ 같은 놈. 그놈이 바로 할머님이 말했던 자식이었구나.
먼저 손을 내민 건 맨돌이 자신이었다. 처음엔 그 무리에 끼어 다니는 게 꽤 멋지게 느껴졌다고 했다. 그러나 애초부터 맨돌이는 그런 축과는 성분상 맞지 않았다. 순진하고, 여렸다. 무리들도 금방 눈치챘다. 곧 물주로 전락했다. 호구나 다름없었다.
대략 들어본 이야기로는 상납금처럼 매달 얼마씩 쥐어줘야 했던 것 같다. 거기에 수시로 그놈이 돈을 요구하면 어떻게든 마련해야 했다. 부모님 방안까지 뒤져 돈을 갖다 바쳤다. 그렇지 않으면 혹독하게 맞았다. 폭력은 갈수록 더욱 심해져서 돈을 주던 말던 그놈 내키는 대로 샌드백이 되어주었다.
“넌 그 지경이 되도록 말 한마디 안 하고 뭐했어? 우리 애들 뒀다 어디 쓸려고? 뇌가 어디 간 거야?” “그게 사실 싫었어.” “뭐가?” “말하는 게.” “왜?” “너나 영뽀나 다 그냥 부러웠어. 멋있어 보였어. 그래서 나도 뭐라도 이겨보고 싶었어.” “이겨?”
할 말을 잃었다. 누가 무엇으로 뭘 이긴단 말인가. 이 지경에 이르러서야 마치 경쟁에서의 ‘패배’를 시인하듯 찾아와 고개를 떨구고 있는 녀석의 모습은 충분히 노여움을 일으킬만했다.
하지만 맨돌이는 그런 분노 유발자가 될 수 없었다. 폐부를 찌르는 듯한 애처로움과 같이 살아야지하는 일종의 공생 본능을 불러일으키는 이상한 재주를 지닌 녀석이었다. 덩치는 산적 같은 놈이...
“종로를 못 들어가겠어.” “지금 같이 들어가면 되지.” “나중에...” “왜? 너가 무슨 죄 졌어?” “너 그런 느낌 아냐?” “...?”
2년 내내 그놈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고 했다. 히죽히죽 웃는 놈의 얼굴만 보면 이빨이 부딪힐 정도로 덜덜덜 몸이 굳어지고, 또 맞아야 할 것 같은 극도의 공포감을 안고 산다고 했다. 맨돌이는 트라우마의 굴레에 완전히 갇혀버렸다.
부산 바닥을 수개월 간 전전긍긍하며 떠돌았다는 이야기를 들려줬다. 유흥업소에서 일하며 세상 돈 뿌려지는 광경을 그림처럼 설명해줬다. 나는 묵묵히 소주만 마셨다.
맨돌이는 제주도로 갔다. 더 먼 곳이 필요했다.그가 찾지 못할 더 먼 곳으로.
녀석이 떠난 자리, 나는 매콤한 닭발 하나를 더 시켜 소주 두 병을 더 마셨다. 물인지 술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