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라기를 거부한 소년

"양철북"

by mindy


양철북은 그 누군가 "찝찝한" 영화라고 말했던 것같다. 그 찝찝함이 어디서 오는가를 짚어보는 것도 이 영화를 보는 한가지 방법일수도 있을 것 같다.


오스카라는 "스스로를 저주한 꼬마"의 눈에 비친 사회는 부조리한 것 투성이다. 어른들이 카드놀이를 하는 식탁밑에서 남자의 발이 여자의 치마속을 헤집는 것을 목도한 3살 생일에 어른의 세계에 환멸을 느낀다. 3살짜리가 이런 생각을 하는 게 가능할까? 그러나 이 꼬마는 태어나자마자 "자의식"이 있었다. 물론 소설이라서 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는 엄마 뱃속으로 다시 돌아갈까 하다가, 엄마가 "세살 생일에 양철북을 선물해주자"는 말을 듣고, 그 양철북을 받기위해 태아로 되돌아가는 것을 포기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어차피 "탯줄"이 없어져서 다시 돌아가가는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한다.


꼬마 오스카는 성장을 멈추는 방법도 다른 사람들을 골리는 수법으로 하게 되는데, 스스로 계단에서 굴러떨어져 성장이 멈추지만, 그 원인은 "지하실문"을 닫지 않은 제 아버지(알프레드)의 불찰로 보이게끔 한다. 이 아버지는 요리를 잘하고, 가게를 갖고 있으며, 어느정도는 가장의 역할을 하기위해 노력하는데, "독일인"이라는 점과 거칠고, 단순무식함이 오스카의 공격대상이 된다. 단순무식함은 말대가리를 미끼로 해서 잡은 장어, 그것 때문에 온통 구토에 시달리던 오스카의 엄마, 아그네스에게 장어요리를 먹이려고 하는 잔인함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오스카의 엄마 아그네스는 폴란드인 얀과 일주일에 한번씩 호텔에서 급한 정사를 즐긴다. 얀은 오스카의 집에 방문할 때도 아그네스에게 접근하고, 둘은 아슬아슬하게 그런 상황을 이어간다. 오스카도 얀의 아이인지, 알프레드의 아이인지, 영화에서는 모호하다. 자라지 않고, 양철북을 몸에서 내려놓지 않고 소리를 질러 문제를 일으키는 아들, 구역질나는 생선음식을 먹이려는 남편, 자신을 낳고 독일군에 쫓겨 다시 나타나지 않는 아버지, 남자들로부터 사랑을 받지만, 그안에서 갈팡질팡하는 여인이다. 그녀는 어느날부터는 가게에서 파는 통조림을 따서 그 안에 있는 생선들을 손으로 먹기 시작한다. 생선을 먹지않던 그녀였는데 생선을 가득 쌓아놓고, 꾸역꾸역 입으로 밀어쳐넣는다. 이 광경을 본 아그네스의 엄마는 딸의 임신사실을 알게 되는데, 그날 아그네스는 결국 자신의 목숨을 끊는다.



폴란드인이자 엄마의 애인이었던 얀은 섬세한 남자이지만, 여자를 지켜주지 못한다. 잠깐씩 만나서 정사를 즐기고, 오스카에게 새 북을 사라고 선심을 쓸뿐이다. 아그네스가 남편과 싸운날, 그녀를 위로하는 것도 얀의 몫이지만, 그 위로라는 것이 그 순간을 모면할 성적희롱 같은 것이다. 자라지 않는 자식에 대한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아그네스에게 또다른 출산이란 죽는 것만도 못한 일이었을 것이다. 오스카는 독일군이 쳐들어들어오는 날, 얀을 폴란드 저항군들이 모여있는 우체국으로 이끌어 그곳에서 결국 죽음을 맞게 한다.


오스카는 생부일지도 모르는 폴란드인 아버지와, 호적상의 독일인인 또하나의 아버지를 가지고 있으며 옛날부터 그땅에 살고있던 작은 민족인 카슈비안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다. 게다가 양철북을 파는 장난감 가게 주인인 유태인 아저씨의 관심을 받기도 하는, 자신의 정체성을 찾을 수 없어서 자라기를 거부하게 된것이지 싶다.


평화로울 때는 그 무엇이어도 괜찮았지만, 나치가 세력을 확장하고 세계 2차대전이 일어나면서, 독일인에 줄을 서야 하는 사회상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 영화는 쉽게 어느편에 서지 못하는 작은 꼬마 오스카를 통해서, 그저 조롱거리만 찾는 작은 악마를 보는 것같다. 어떻게 생각하면 저항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어른세계에 대한 꼬마의 저항은 소리를 질러 엄마와 남자친구가 있는 호텔의 창문을 박살내는 것, 양철북을 빼앗으려는 아버지의 폭력에 맞서 소리를 질러 집안의 시계 유리를 깨고, 자신을 진단하려는 의사 진료실에서는 자신을 험히 다루는 간호원과 의사를 향해 소리를 질러 실험용유리관을 박살내, 그안에 들어있는 태아를 비롯한 실험액에 들어있던 것들이 밖으로 흘러나오는 것 등으로 나타난다. 타인과의 소통이 불가한 오스카라는 소년을 보면서 그 당시 암담했던 사람들의 마음을 상상하게 되기도 한다.


오스카는 세상을 구경하는 구경꾼의 역할을 하고싶었지만, 결국 구경거리밖에 될수밖에 없었다. 그들에게 운명은 그런것이라고 서커스단의 단장은 알려준다.

난장이들의 서커스단에 합류해서 독일군인들을 위한 위문 공연을 하는 동안, 사회에 어느정도 적응하는가 했지만, 그곳에서 만난 자신이 사랑했던 난장이 여인이 포탄에 죽고, 오스카는 집에 돌아온다. 그래도 난장이들과 어울릴때 자신의 정체성을 찾은듯 보이기도 했다.



오스카는 가정부로 들어온 마리아라는 소녀와 성행위를 즐긴다. 몸은 작은 소년인데, 조숙한 그는, 아버지의 여자와 관계를 맺는다. 그녀가 아이를 낳았을때, 동생이라며 안겨주는 그애를 쳐다보며, 너는 내 아들이야, 하는 그 모습이 우스꽝스럽게 섬뜩하다.


작은 악마 오스카의 마지막 과업(?)은 독일인 아버지를 죽이는 일로 나타난다. 나치에 협력했던 그를 소련군들이 나타났을 때, 나치 뱃지를 그의 손에 쥐어줘서, 그 뱃지를 몰래 삼키려다 소련군에 총탄세례를 받는 것으로 말이다. 제 어머니를 제대로 사랑하지 않았으며, 독일군이 왔을때 협조했던 그를 죽이므로 자신이 해야할 일을 했다고 오스카는 느낀다.


그는 제 아버지의 장례식에서 이제는 다시 성장해야겠다는 결심을 한다. 그의 나이 20살이 되던 때이다.


이 영화의 첫번째 장면은 너른 감자밭에서 감자를 불에 구워먹는 오스카의 할머니로부터 시작한다. 할머니는 군인들을 피해 도망해오던 한 청년을 자신의 네겹 치마밑에 숨겨주면서, 오스카의 엄마를 낳게 된다. 할머니는 "우리는 독일인도 아니고, 폴란드인도 아니다. 우리는 카슈비안이다. 너희들이 아무리 그렇게 말해도 우리는 너희와 같아질 수 없다"고 말한다. 오스카와 그 가족들이 폐허가 된 단찌히를 떠나게 되는데, 할머니는 그곳에 남는다. 세상에서 의지할 단한사람 할머니를 떠나며 오스카는 울부짖는다.



오스카는 성장을 멈추는 것으로 모든 문제로부터 비켜서있으려고 했었다. 어리다는 이유로 사람들은 그를 제대로 대우해 주지 않았고, 나중에 커서도 아이취급을 당했다. 오스카는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양철북을 두드리며 괴성을 질러서 생존을 이어나갔다.


20년간 성장을 멈췄던 그 이야기를 통해서, 양철북의 작가 귄터 그라스는 우리에게 어떤 메세지를 주려고 했을까? 약간의 검색을 통하여 본 귄터 그라스는 "시민운동"에 열심인 운동가이자 작가라고 나온다. 그가 죽을때까지 투표 독려운동 등을 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현재의 독일을 만드는데 큰 공이 있다고도 한다. 그는 2차대전에서의 독일인의 전횡과 죄과를 발본색원하여 다시는 그런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아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을 실천에 옮겼다는 것이다.


아마도 생각조차 하기싫은 자신의 어린시절에 대한 처절한 회고록이 아닐까싶다. 함께 어울렁더울렁 하며 살았던 사람들이 싸우고, 죽이고, 광기에 미쳐 돌아가던 그 당시 일에 대해서 정리한 소설이겠다싶다.


성적 장면이 너무 자극적이고, 표정 하나없이 3살부터 20살까지 같은 몸을 가진 오스카란 작은 악마를 통해서 제도가 깨지고, 그틈을 통해, 히틀러같은 희대의 사이코가 정권을 잡았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줬다. 그리고 그 작가가 나중 고백한 바에 따르면, 독일 친위대에서 어렸을 때 일하기도 했었다는 말을 했었다. 이런 저런 경험과 자신의 정체성을 통하여 새로 시작되는 나라가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 함께 고민하잔 내용이리라.


그런데, 처음에 말했듯이 좀 찝찝하긴 하다. 어린애가 성에 조숙한 성인연기를 해서 그런가싶기도 하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많은 섹스신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말하자면 나쁜면으로의 인간의 본성을 건드렸다. 사랑 배려 이런 것보다는 괴성과 꽹과리같은 소란한 북소리만 있는. 오스카가 실망한 것처럼, 어른들의 세계는 섹스와, 술과 함께한 음식, 카드놀이, 전쟁등 어느것도 추구할만한 게 없어보였다는 점 때문에 그런 것같다. 그나마 하나 희망이라면, 오스카가 "이제는 성장할 거야"라고 말하고, 성장을 시작했다는 점, 할머니는 제땅을 지키기 위해 남아서 다시 벌판으로 돌아갔다는 점등이겠다. 할머니는 딸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는 죽고 싶지도 않고, 살고싶지도 않지? 나도 그런 삶을 살았지만, 이렇게 살아있다"라면서.


죽는게 나을 것 같은 삶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아그네스를 보면서 깨닫는다. 그녀가 아들을 사랑하지만, 그애 때문에 "환장할 것 같은" 그 마음을 잊기위해 다른 사람과의 정사나, 남편과의 싸움에 다 소진하지 않았었더라면, 사정은 조금 더 달라졌을까?


그리고 더하나 보탠다면, 민족이라는 굴레가, 역사적 변혁기에 섰을때 패권다툼으로 번지고, 민족말살 행위까지도 나온다는 사실도 상기시킨다. 여러 민족이 어울려사는 캐나다는, "복합문화정책"이라는 제도를 표면에 내세운다. 각 민족의 고유성을 존중하고 계승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한민족이 고유한 한 나라를 이룬다는 것이 현대에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 되어버렸다. 민족간 다툼이 아니라, 함께 사는 사람들이 어떻게 조화롭게 살아가느냐로 그 나라의 수준을 점쳐볼수 있을 것이다. 오스카의 괴성과 꽹과리 소리는 우리에게 경종을 울리고 있다. 현대의 인종차별로 나타나는 여러 현상들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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