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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dy Apr 19. 2020

진정한 페미니스트는 누구인가?

"여성의 설득"을 읽고




"설득"이란 말이 갖는 힘에 대해 생각한다. "설득"시킬 힘이 없어서 나만 볶으며 살아가고 있는데, "설득하는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보여주는 그 책, "여성의 설득"에 설득되었다.


"설득"은 한두마디에서 시작하지만, 평생을 걸리는 작업이 된다는 것을 책을 읽으며 깨닫게 된다. 설득당했지만, 배단당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배반과 설득은 그리 먼 단어들이 아니다. 삶이 그런 것처럼 설득도 배반도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대신 주제가 명확하다. 어떤 부분을 행해서 "설득"을 행사할 것이냐에 관한 것. 이 책은 "설득" 이전에 "여성"이라는 대전제를 가져왔다. 쉽게 말하면, "진정한 페미니즘이란 무엇인가?"가 부제목쯤 될 것같다. 흔히 생각하듯,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페미니즘만을 말하고 있지 않다는데 이책의 반전도 도사리고 있다.





1980년초 대학생활을 하던 나의 이야기를 끌어들여보자. 나는 뺑뺑이에 의해 추첨된 여고를 다녔지만, 왜 여고여야 하는지, 의문을 품었었다.  그당시엔 몇 학교를 제외하곤 남녀공학이 드물었다. 남녀공학이 있을지라도 남녀합반은 또 극히 적었을 것이다. 지금은 남녀공학 학교가 많아지고, 합반도 많으리라고 본다. 문제가 생길 걸 우려해서 아예 못만나게 했던 구시대의 유물이 차차 없어져가서 다행이다. 나는 대학만은 남녀공학을 가야된다고 생각했다. 내가 선택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리하여 대망의 남녀공학 대학교를 가게 된다. 그 대학에서 여학생으로 느낀 것은, "이 세상의 끝날은 남녀의 성전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아무리 잘난(?) 여학생일지라도, 가장 못난(?) 남학생보다 열등하다,라고 느끼게끔 하는 일들이 일어났었다. 이게 나를 괴롭혔다. 모두 다 그런 것은 아니었겠으나, 자존심 낮은 여학생이 되어 남학생들을 "가재눈"으로 쳐다보았던 적도 많았다. 학생회는 물론, 아주 작은 조직까지 모두 남학생에 의해 운영되었다. 여학생 수가 남학생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었다는 것도 있었겠지만, 여학생들이 운신을 펼수 없는 구조적인 문제가 컸다. 그때 학생회관 2층에는 "여학생 휴게실"이라고 있었다. 여학생들만 있을 수 있는 피난터 같은 곳이었는데, 그곳에서 지친 몸을 기대앉아, "성싸움은 불가피하다"고 생각했던 것같다.


대학을 졸업하고 보니, 내가 기피했던 여자대학을 나온 친구들 중에는 "리더쉽"이 남다른 친구들을 볼 수 있었다. 남녀공학에서 내가 배운 것은 오히려 남자의 우월을 인정하고, 보조역할에 만족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일찍 터득했다는 점이랄까? 여학교 졸업자들이 스스로를 세우고, 힘을 키울때, 남학생들이 만든 구조안에 안주했었다.


"여성의 설득"에 나오는 대학신입생 그리어는 축제 기간중에 우아하면서도 강인한 페미니스트 페이스 프랭크의 강연을 듣게 된다. 그리어는 그전에 대런이라는 남학생으로부터 성추행을 당했고, 그 충격에 시달리는 중이었다.


"다음 경험을 향해서 뛰어들어요. 당신의 "외부적 목소리"를 써보려고 노력하는 게 어때요? 난 가끔 가장 유능한 사람은 스스로 외향적이 되는 법을 익힌 내향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페이스의 이런 강연을 들은 그리어는 "머리가 쪼개져서 열린 것 같았다"고 말한다. 그리어와 페이스의 긴 인연은 이날 강연장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리어는 토라져서 몸을 돌리고 자기 몸을 껴안았다가 자신이 이런 행동을 TV 드라마와 영화에서 봤음을 깨달았다. 감정적으로 연약한 여자아이가 방어적으로 자신의 몸을 감싸고 팔짱을 끼거나 스웨터 팔을 길게 잡아당기는 것. 그녀는 왜 자신이 이런 정해진 여성의 역할을 아주 쉽게, 기꺼이 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랬던 그리어는 자신의 강요된 여성성을 극복하면서, 소외된 여성들을 위해 일하는 페이스에게 발탁되는 행운을 얻게 된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존경하는 스승과 함께 하는 그녀를 따라가는 즐거움이 크다. 그리어는 마리화나를 하는 부모, 제대로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는 부모 밑에서 거의 홀로 자기성장을 한 친구이다. 그점은 부모와 같지 않은 삶을 살고자 하는 굳은 의지, 노력으로 나타난다.




그리어의 남자친구 코리를 주목해보자.

포르투갈 이민자의 아들로, 부모님들은 미국인 사회에서 약간은 아웃사이더지만, 자신의 장점으로 부모의 약점을 덮으면서 성장한다. 코리와 동생은 천재와 가깝고, 집안일은 엄마가 도맡아하는 전통적인 집이지만, 화목한 가정이다. 그늘이 들것 같지 않은 이집에 어둠이 깃든다. 천재소년 코리의 동생이 엄마가 후진하는 차에 치어 죽게 된다. 모두의 사랑을 받던 알비의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위기가 된다. 코리는 그리어와 사귀면서, 필리핀에서 높은 연봉을 받으면서 일하다가, 집으로 돌아오게 되고, 코리의 아버지는 아들을 죽인 아내를 용서하지 못해 고향 리스본으로 떠나버린다. 아들을 죽인 코리의 어머니는 일상생활이 불가능한 상태가 된다. 책을 읽으면서 어떤 불행이 올까, 나름 조마조마했다. 너무 밝은 건,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삶도, 삶을 표현하는 책도 말이다.


코리 가정에 닥친 그 불행은 나의 예감을 적중하게 해주었지만, 너무 슬펐다. 그런데 그 불행을 극복하는 코리의 대응법은 내가 상상할 수 있는 바가 아니었다. 불행 이전에는 코리는 명특하지만, 여자친구에게 솔직하지 못했고, 어머니가 가족을 위해 베푸는 온갖 시중에 대해서도 아무런 죄의식을 갖지 못했다. 남자로서 누리는 그런 혜택에 대해서 어떤 의식도 없었다고 봐야 한다.


프린스턴대를 나와 전도유망한 청년이던 그는 마닐라 지점에서 일하던 것을 다 내려놓고, 집으로 돌아온다. 엄마가 어떻게 동생을 발견하지 못하고 치었는가, 그걸 연구하다가 동생이 잔디밭에 납작이 엎드려, 그가 키우던 거북이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있었음을 발견한다. 엄마의 부주의가 아니었음을 알아낸 것이다.


정신못차리고, 약물등을 했던 어릴때 어울렸으나  관계를 단절했던 사촌을 방문해, 그와 헤로인을 같이 피우기도 한다. 그런 아픔의 시간들을 지나, 엄마를 간호하고, 집안을 치우고, 살림을 도맡아 하게 된다. 야망에 불타있는 여자친구와 갈길이 달라 헤어지기까지 한다.


코리는 엄마가 일하던 "청소"일을 맡아 집안을 위해 조금씩 일하면서, 자신의 인생을 다시 시작한다. 아무런 희망이 보이지 않는 그런 일상으로 보이는 일들을 말이다.





꽤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친구 "지"로 화제를 돌려본다. 판사 부부의 딸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찾는데 많은 시간을 보내는 인물이다. 부모의 기대와는 다르게 "동성애자"이면서 그리어에게는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인물이다. 친구 그리어가 페이스와 같이 일하게 되면서 자신도 "추천"해주길 바란다며, 페이스에게 보내는 편지를 그리어에게 부탁한다. 그러나 그리어는 "페이스"를 친구와 나누고 싶지 않아, 그 부탁을 오랫동안 모른척한다. 그리고 술김에 페이스에게 친구가 부탁했지만, 나는 그러고 싶지 않다고 말하기도 한다. 페이스가 친구의 편지를 책상에 갖다놔 달라는 말을 했음에도 편지를 전하지 않는 우를 범한다.


나중에 이 사건은 페이스와 그리어가 "안좋게 헤어지게 되는데 기름을 붓는 역할"을 하게 된다. 페이스의 일은 부자인 옛 애인 에밋 슈레이더의 후원을 받아 운영되는 여성재단이다. 에밋은 이루지 못한 자신의 사랑에 대한 감상적인 접근으로 페이스에게 물질공세를 쏟아부었다.  그리어는 재단의 일을 열심히 했으나 누군가가 저지른 비리를 파헤치지 않고, 많은 사람을 속이는 그 사실만큼은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해 페이스에게 따지지만 페이스는 한발 물러난다. 돈에 쪼들렸던 지난날들의 기억 때문에 재단의 후원을 거부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페미니즘은 여러 모양으로 다른 형태로 이뤄지는 것을 보여준다.


다만 재단의 비리 때문에 그리어가 물러났다면, 두사람의 관계는 그리 틀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페이스는 그리어에게 여러 사람앞에서 "친구의 구직 희망 편지를 무참히 감춘 그 사실을 폭로한다". 결국 그리어가 자신의 성공을 위해 친구에게 거짓말한 사실을 꼭짚어서 말한 것이다. 페미니스트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보다 높은 도덕성일 것이다. 정의와 약자를 위한 삶을 외쳐오다가, 이런 치명적인 도덕적 결함이 들춰내졌을때 서로간 깊은 상처를 입는다.


그리어는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면서도 페이스에게서 잔인함을 발견한다. 그동안 페이스를 존경해서 최선을 다해 일해왔던 모든 시간들이 무모하게 느껴지게 된다.


이 책은 페이스의 관점에서도 기술된다. 그녀가 거쳐온 삶은 거짓은 아니었다. 자신이 속한 곳에서 많은 사람에게 영감을 주었으며, 여성들을 자리에서 털고 일어나게 했다. 수없이 많은 좋은 일중에서도, 다른 사람의 돈을 받아서 재단을 운영해야 했던 일은 그만큼 위기가 있었던 것이다. 재단에 돈을 기부한 그사람은 옛날 페이스를 사랑했던 사람으로, 큰 의미없이 자신의 자족감을 위해 그 일을 해왔고, 페이스는 그걸 받아들였다. 그것이 비극의 시작이었을 것이다.


결국 그리어는 페이스 재단에서 나와서 친구에게 자신의 잘못을 고백한다. 이 책에서는 "쌍년"이라는 욕이 가끔 나온다.


"여자... 여자를 싫어하는 여자는 세상에서 가장 심한 쌍년이지."


그리어는 자신이 바로 "쌍년"이었다고 고백한다. 지는 대안학교 교사를 시작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다가 큰 상처를 입은 사람을 도와주는 외상심리 상담사가 된다. 지는 그리어를 바로 용서하지는 못하지만, 스스로의 길을 찾은 다음 이렇게 말한다. 지와 그리어가 걸오온 길은 다르다. 그러나 그들은 나중에 한길에서 만나게 된다.


"난 두 종류의 페미니스트가 있다고 생각해. 유명한 사람들, 그리고 그 나머지. 그 나머지는 조용히 가서 자신이 해야 하는일을 하지만 별로 인정은 못받고, 훌륭한 일을 하고 있다고 매일같이 말해주는 사람을 갖지 못한 그런 사람들이야."




그리어는 직업을 잃고 나서야, 자신을 위해 멀찍이 서있어준 어머니를 보게 된다. 세상에서는 아무런 빛도 없이 살았지만, 영특한 딸의 앞길을 막지 않기 위해 되도록이면 멀리 서 있어 주었던 그녀의 어머니, 도서관에서 광대로 분해 아이들에게 웃음을 주는 자신의 엄마를 무시했었고,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았으나 그리어는 그런 엄마를 또다른 눈으로 보게 된다. 엄마의 이런 말들도 의미를 갖는다. 아이를 혼자 음식을 먹게 했던 그녀의 부모는 나름대로는 자신들의 무책임을 아이에게 전염시키지 않기 위한 최선의 방책이었던 것이었나 보다.


"우리 한번도 편안하게 산 적이 없지. 우리 둘 다 약간 물러나는 경향이 있어. 그래도 우리가 몇 가지 하긴 했어. 그리고 너를 가졌지. 그건 별거 아닌 게 아니야."



헤어진 남자친구인 코리가 자신의 엄마를 시중들면서 청소일을 하는 것을 하찮은 일이라 여겼지만, 그 일은 꼭 필요한 일이었고, 그의 간호 덕분에 코리의 엄마도 회복하게 된다. 그리어의 엄마는 코리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페미니스트 재단에서 일한 사람은 내가 아니니까 내 지식 범위 밖에 있는 거긴 하다만, 그 애는 가족이 무너졌을 때 자기 계획을 포기한 사람이야. 어머니와 함께 있기 위해서 집에 돌아와서 어머니를 보살피고 있지. 아, 그리고 자기 집을 청소하고, 어머니가 청소하던 집들까지 도맡아 일하고 있어. 난 잘 모르겠다만, 코리가 일종의 대단한 페미니스트 같은데. 안 그러니?"


코리는 사랑하던 동생을 잃은 경험에서 나온 게임개발을 시작하게 된다. 사이버상에서 헤어진 사람을 찾는 주제로 게임을 개발하게 되고, 투자자를 찾는등, 사회일선으로 나선다. 그러는 동안 코리의 엄마는 회복되어 이모의 집으로 합류한다.


코리와 코리엄마, 그리고 지까지 모두 정신상담을 받는다. 지는 자신의 동성애자 취향에 대해서, 코리엄마는 아들을 잃어버린 후 사회복지사의 방문을 받고 약도 꾸준히 먹는다.


누구에게나 엎으러질 때가 있음을 이 책에서는 보여준다. 그때는 좀 쉬어주어야 함을. 하찮은 일은 하나도 없음을. 코리에게 헤로인을 권했던 사촌도, 기적적으로 중독치료를 받고 회복되어 결혼한다. 코리는 마리화나는 가끔 하지만, 헤로인은 멀리하게 된다.


그리어와 코리는 이런 일들을 지나면서 결혼하고, 새로운 삶을 꾸린다. 그리고 그리어는 이런 모든 경험을 담아 책을 펴낸다. 그 책은 1년간 베스트셀러에 오른다. "외부적 목소리". 그리어는 이제 아이도 있고, 사회적으로 영향력있는 페미니스트가 되어간다. 페이스와의 경험이 있기 때문에 더 신중하게 길을 열어나갈 것이다.. 페이스의 시대에서 그리어의 세대로 페미니즘은 흐른다. 그리고 또 젊은이들은 그들의 세대에 맞는 주제들을 들고 나아갈 것이다.


나는 대학때 느꼈던 그 물음(남녀의 성 불평등) 때문에 결혼이 힘들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결혼전 이 문제를 꺼냈다. "가정내에서 남녀가 평등하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걸 받아들여야 결혼할 수 있다." 다른 몇개의 조건(?)에다 이것을 보탰다. 남편은 "너무 쉽게" "자신은 그럴 수 있다"고 대답했다. 그 쉬운 대답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는 한마디로 이야기할 수 없는 무엇이다.


중요한 건, 나도 쉽게 잊어버리는 사람이라서, "성의 불평등"에 대한 나의 질문을 잊고 살았다.  "여성의 설득"을 읽기전에는 그러했는데, 앞으로 무엇이 전개될지 나도 알수가 없다.



이 책이 내게준 가장 중요한 교훈은 위대한 삶이 따로 있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아픈 부모를 위해 엄마와 함께 있어준 코리와 같은 삶, 코리 엄마같이 가정을 지키기 위해 청소를 했던 그 시간들, 그 모두가 너무 소중한 일이라는 것이다.  코리가 엄마곁에 머물지 못했으면, 코리는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찌질이로 온 가족이 기피하던 마약중독자 사촌에게 인간적으로 마음을 주었던 그, 사촌이 기사회생한 사건도 기억에 남는다. 페미니스트는 억눌렸던 여성인권에 대한 의식을 가지고, 그것을 조금이라도 불식시키기 위해 인간적인 접근을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져야 하는 타이틀이 아닌가 한다. 여성이든 남성이든 상관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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