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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dy May 19. 2020

사랑 그리고 죽음

"스토너"  - 존 윌리엄스 소설 리뷰

세익스피어 소네트 73번


그대 내게서 계절을 보리

추위에 떠는 나뭇가지에

노란 이파리들이 몇 잎 또는 하나도 없는 계절

얼마 전 예쁜 새들이 노래했으나 살풍경한 폐허가 된 성가대석을

내게서 그대 그 날의 황혼을 보리

석양이 서쪽에서 희미해졌을 때처럼

머지않아 암흑의 밤이 가져갈 황혼

모든 것을 안식에 봉인하는 죽음의 두 번째 자아

그 암흑의 밤이 닥쳐올 황혼을.

내게서 그대 그렇게 타는 불꽃의 빛을 보리.

양분이 되었던 것과 함께 소진되어

반드시 목숨을 다해야 할 죽음의 침상처럼 

젊음이 타고 남은 재 위에 놓인 불꽃

그대 이것을 알아차리면 그대의 사랑이 더욱 강해져

머지않아 떠나야 하는 것을 잘 사랑하리.


이 시는 스토너가 영문학으로 빠져드는 계기가 됨과 동시에 평생의 스승으로 모시게 된 아처 슬론과 만나는 결정적인 시가 된다.

농업을 공부해 부모님을 돕고자 했던 스토너는 자신이 살아왔던 세계와 다른 영문학을 접하면서, 성실과 열심으로도 풀리지 않는 문학앞에서 어쩔줄 몰라한다. 어느날 강의실에서 교수의 질문을 받게 되면서, 시가 주는 감상에 대해 한마디도 못하지만, 그는 처음으로 문학적인 시선과 마음이 자신에게 찾아왔음을 알게 된다. 스토너가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은지를 알고난 지금 이 시를 다시 음미해보면, 그의 삶이 시 한편에 녹아있는 듯도 하다. 스토너라는 자연인은 "잘" 사랑하다 죽음의 침상에서 "잘" 죽는다. 



책 "스토너"를 읽었다. 작가는 이미 사망한 존 윌리엄스(1922년-1994년)이며, 소설의 배경이 1910년부터 1950년대 중반에 해당한다. 책의 첫 출간은 1965년이었고, 재발간된후 빛을 보고 있다고 한다. 문학은 남고, 사람은 가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든다. 세익스피어가 사라진지, 400여년이 지났지만, 우리들은 세익스피어란 이름을 알고있다. 스토너는 비록 소설속 인물이지만, 사람들 마음속에 다시 살아남을 만큼 강력하다.


죽음과 사랑


이렇게 주제를 잡아도 좋을 것 같다. 스토너의 스승 아처 슬론은 스토너의 열정과 성실을 알아본다. 스토너는 교수와의 대화에서 자신이 가야할 길을 알아챈다. 영문학과 사랑에 빠진 것이라고 아처 슬론은 그에게 말한다. 


아처 슬론은 결혼도 하지않았고, 세상에 대해선 삐딱하며, 오로지 연구에만 온생을 바쳤다. 그가 죽었을때 단한사람 스토너만 목놓아 울었다. 그래서 그의 죽음이 고귀해졌다. 누군가가 진정으로 그를 알고, 존경하며, 그의 사라짐을 슬퍼해준다면, 이세상에 왔다간 이유가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토너는 정말 치열하게 살았다. 생각대로 흘러가진 않았지만, 사랑할 사람을 사랑했고, 열정을 바쳐 공부했으며, 대학과 학생들에게 최선의 것을 남겨주기 위해 노력했다. 곁에 있던 사람과의 사랑에 성공하진 못했지만, 마지막까지 우정을 지킨 친구도 있었고, 나쁘지 않았다.


스토너에 관한 리뷰들을 읽어봤다. 그의 삶이 행복했는가? 불행했는가? 그것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았다. 그가 열정을 바친 것치고는 제대로 대우를 받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20세기초 세계 1차, 2차 대전이 일어나던 그때임을 생각한다면,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그 일을 좋아했던 그 사람의 삶이 꽤 훌륭하다고 말할 수 있다. 휼륭했지만, 자신의 행복을 쟁취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다는 건 인정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그의 부모, 그의 친척, 그의 아내와 아내의 가족들의 삶등 그 소설속에 드러난 삶들이 모두 거의 무채색이었던 것을 고려한다면, 그나마 스토너는 자신의 힘으로 삶에 색깔을 입혔다고 볼수 있다. 요즘같은 총천연색은 아닐지라도, 다섯 색깔 이상으로 윤기있는 삶이었다.


처음 스토너가 겪은 좌절은 부인과의 사랑이 어그러진 데서 온다. 첫눈에 반하다(?)는 것이 갖는 맹점도 있었을 테고, "진심으로 자기자신이 되어본 적이 없는 그여인"은 여러 사람에게 해악을 끼친다. 주입받은 성교육, 스스로 할줄 아는 일이 없었던 어떤 여인을 사랑한 죄였을까? 그녀는 끝까지, 스토너를 코너로 몰아넣는다. 집착과 몰이해가 가져다주는 삶의 부정적 영향을 그 여인을 보며 느낀다. 


"한달도 안돼서 그는 이 결혼이 실패작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1년도 안 돼서 결혼생활이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버렸다. 그는 침묵을 배웠으며, 자신의 사랑을 고집하지 않았다."


첫번째 사랑을 잃고, 다음에 얻은 사랑은 딸 그레이스였다. 어머니처럼 딸을 키웠다. 딸 양육을 남편에게 일임하고 누워버린 아내 덕분에 그는 딸 그레이스와 아름다운 관계를 맺어나갔는데, 그 장면도 사랑스러웠다. 그러나 아내 이디스가 돌변하여 딸에 대한 잘못된 교육을 시도하는 바람에 남편인 스토너가 설자리가 없어진다. 아내 이디스는 자신의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다른 사람들의 눈에 자랑할만한 딸을 만들기를 원했던 것이다.


아내에 의해서 딸과의 사랑이 끝나고, 그에게 찾아온 사랑은 제자인 캐서린이었다. 어쩌면 이 부분이 가장 아름다웠을 수도 있다. 결국엔 이것도 끝나고 말지만. 오랜후에 떠나보낸 애인의 잘쓰여진 책을 품에 안게 된다. 그곳에서 "W.S에게"라는 자신에게 보내는 헌사를 보게 된다. 사랑의 밑창을 보느니, 그렇게 떠나보내고 그의 사랑을 확인하는 아름다움으로 마감한 것도 괜찮다.


스토너가 또 열정을 기울인 부분은 학과내에서의 강의와 연구, 학생들과의 관계였다. 총장, 학장, 학과장등 대학교내의 알력등이 나온다. 100여년전의 일인데도 어쩌면 비슷하게 흘러가고 있는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든다. 교수를 갖고 놀려고 하는, 천재인척 하는 학생과의 대결도 볼만하다. 그리고 그 학생을 두둔하는 또다른 교수, 그가 학장이 되면서 그는 어이없는 수업을 배당받게 되는등. 그런 굴곡속에서도 열정을 갖고 교수직을 천직으로 삼아 학생들을 이끈 스토너 교수에게 경외감을 안가질 수 없다. 일은 스토너 그 자체였다. 그가 암으로 죽게 되면서, 마지막으로 손에 들었던 것도 자신의 저작물이었다. 그 책이 움직임을 멈춘 그자신에게 떨어져내림을 느끼며 자신의 죽음을 관조했다. 그가 강의와 혼연일체가 되면서 깨닫게 되는 문학의 신비에 대한 글도 주목할만한다.


"문학, 언어, 정밀하고 기묘하며 뜻밖의 조합을 이룬 글 속에서 그 무엇보다 검고 그 무엇보다 차가운 글자를 통해 저절로 모습을 드러내는 마음과 정신의 신비, 이 모든 것에 대한 사랑을 그는 마치 위험하고 부정한 것을 숨기듯 숨겨왔지만, 이제는 드러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그러다가 대담하게, 종내는 자랑스럽게."


작가 존 윌리엄스 역시 소설속 주인공처럼 영문학 교수였다. 그는 지난 1994년에 죽었고, 전세계에서 주목을 받고 베스트셀러로 떠오른 이 책의 인세는 부인에게 가고있다고 한다. 좋은 문학작품에 딸려오는 물질적인 보상도 있다. 어느 인터뷰에서 존 윌리엄스는 이 책은 좋은 소설이며, 나중에라도 유명해질 것이라고 말했다는 글을 읽었다. 작품이 작가를 떠나 세상에 유영하다가 누군가의 마음과 만난다. 그리고 그 작품은 그안에서 살게 된다. 이것은 물질적인 보상을 뛰어넘는 많은 사람에게 거저 주는 문학의 미덕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스토너를 읽어보라고 말하고싶다. 특별히 영문학을 전공하는 자들의 필독서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싶다. 나는 잘 모르겠는, 많은 영문학 이야기가 나온다. 나는 그것을 한국문학으로 바꿔가며 읽기도 했다. 나는 대학때 손창섭 작품을 읽으면서 소름이 끼쳤었다. 아무것도 안하기의 끝판왕이라 해야하나? 전후 정신적 공황상태를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는 느낌이었다. 문학가는 고통스런 직업임이 틀림없다. 


그는 끝까지 자신에게 진실된 사랑을 주지못하는 아내에 대해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고, 마지막을 지켜주러 온 친구에게 감사했으며, 고생으로 나이보다 더 늙어보이는 딸의 미래를 걱정한다. 


하여튼 그는 모든 것을 다했다. 그것도 최선을 다해서. 그랬기 때문에 그의 삶은 더할 수 없이 고귀하다. 행복하냐를 떠나서 그의 삶은 여러모로 남기는 바가 많다. 스토너를 만나고, 나는 그의 삶을 자꾸 반추한다. 살아있음은 사랑하는 일이며, 정열을 바치는 일이며, 뚝심으로 밀어부치는 일이다. 그리고 내가 할일은 스토너를 만난 일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해야 한다는 것이다. 존 윌리엄스는 이 책을 쓰느라 얼마나 많은 밤들을 헤맸겠는가 마는, 나는 몇시간이라도 그의 작품에 대한 경의를 표해야 한다. 그것이 내가 할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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