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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dy Aug 13. 2023

거제도와 통영 꼭 가고 싶었는데

눈썹을 휘날리며 쏘다녔다

시카고 동생은 어쩌다 계획이 없는 빈시간이면, "한구찌" 해야 한다며, 시장이라도 갈 태세였다. "한 구찌"가 어디에서 온 낱말인지는 몰라도, 우리끼리는 그 말이 통했다. 금같은 시간이 아깝다는 것이다. 나보다 일찍 한국에 입국했고, 3주가 안되게 머물렀던 동생은 가고 싶은 곳은 많으나, 시간에 쫓겨 포기해야만 했다. 나는 그보다는 넉넉한 시간이 있어서 그애가 가고 싶다면, 추임새를 넣으며 한번 계획해 보자 그리 말했었다. 그중에서도 우리 둘이 가보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던 곳이 통영과 거제도였다. 2박 3일이 힘들다면, 1박이라도 해서 그쪽 동네 냄새를 맡고 와야 할 것처럼 느껴졌다.


동생의 출국 며칠 전에 인천 사촌동생이 가족모임 때문에 우리들을 시내 음식점으로 라이드 해준 적이 있다. 사촌동생과 거제도 이야기가 나왔는데, 왜 못가느냐, KTX 취소된 것이 종종 나오니, 내일 새벽이라도 떠날 수 있지 않느냐 부추겼다. 그말에 동생이 그럼 오빠가 KTX표 좀 알아봐 주고, 내일 새벽에 우리 둘을 기차역에 데려다 달라고 바짝 들이대기 시작했다. 인천 사촌언니네서 하루 자고, 그담날 다른 계획들이 있었고, 그런 다음엔 서산 언니네 가기로 했던 것은 이미 우리들의 머릿속에선 휘발되어 버린 상태였다. 세상없는 약속도 다 저버리고, 가고 싶었던 남쪽나라로 바로 떠나고 싶었다. 침 튀기며 통영과 거제도 이야기를 하다가, 정신을 차린 것은 바로 나였다. 인천 가족들도 많고, 천안에서부터 사촌언니도 올라와있고, 시카고 언니형부도 있는데, 새벽부터 우리끼리 사라진다면, 그건 아니지 않나, 하면서 말이다. 사촌동생도 부추겼다가 우리가 그렇게 거세게 엉겨 붙을지는 몰랐던 지라, 잠시 혼미해하다가 정신을 차렸다. 그렇게 우리의 통영행은 무산이 됐다. 


아이들은 시간이 되는 대로 쇼핑을 즐기는 것 같았다. 서로 시간이 맞으면 함께 다녔는데, 홍대입구가 볼만했다. 거리에서 노래 부르는 사람 구경하기도 하고, 춤추는 사람들도 있고. 특이한 것은 한국사람뿐 아니라, 갈고닦은 실력을 선보이는 외국청년들도 많았다. 


아이들은 "올리브 앤드 영"이 있으면 참새가 방앗간을 못지나가듯 들러서 화장품을 고르곤 했다. 남대문에서는 한국전통 인형을 드디어 만났다. 조카가 전통인형을 찾았는데, 그 비슷한 것들을 내가 찾아내어, 그걸 구매할 수 있었다. 캐나다에서 태어나 40여 년을 산 조카는 한국에서는 가격을 흥정해야 한다고 들었는지, 상인들에게 꼭 깎아달라고 하곤 했다. "그러지 말아요. 나 먹기 살기 힘들어, 남는 게 없어" 하면, "저는 늙으신 아버지께 선물하려고 하는데, 좀 깎아주세요" 하면서 눙을 쳐, "야, 그러지 말고 다 드려.." 하면서 옆구리를 찔러야 했다. 아이들은 캐나다 친구들에게 줄 선물들을 액세서리, 가방, 양말 등등으로 골랐다. 나도 내가 없는 동안 내 대신 조금 더 길게 일했을, 캐쉬어들을 위한 선물을 골랐다. 


조카는 맨 아래쪽 작은 인형들을 거의 다 샀다. 신랑신부 인형은 빼고. 
여고생 남고생 자석인형을 사왔다. 우리들 일주일 스케줄 적어놓은 것 위해 붙여놨는데, 볼 때마다 귀엽고, 웃음이 난다.

둘째와 조카가 떠나고 그 다음날 시카고 동생도 떠난 후 어느날 나홀로가 됐다. 그날 양평의 시이모님과 약속을 했다. 양평까지 오는 건 어려우니 이모님이 잠실에서 만나자 했다. 그렇게 만났는데, 이모님은 연상 "나도 시골사람이라 어디에서 식사를 해야할지 모르겠네" 두리번 거리셨다. 우리는 잠실역에서 밖으로 나가지 않고, 연결되어 있는 롯데백화점으로 들어갔다. 그곳 음식코너를 발견해서 자리를 잡고 앉았는데, 한국에서 비싸면서 실속없는 음식점 한곳을 발견했다면 그곳이었다. 컨베어벨트에 따라 음식이 흐르는데, 접시에 소량의 음식이 담겨있고, 좋아하는 것을 내려서 먹는 방식이었다. 나중에 보니, 접시의 테두리 색깔에 따라 음식값이 달라졌다. 이모가 먹고싶은 것 내리라고 성화해서 튀김 한접시, 초밥 몇개 등과 소라가 있어서 그것도 내리고, 나름 먹었지만 이모는 바로 드시고 오셨다고 거의 손을 안댔는데, 나중에 계산하는데 꽤 많이 나왔다. 시골사람 두 사람이 백화점맛을 톡톡히 봤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연세가 있으신 이모님과 오랜 시간 있을 수는 없고, 일찍 헤어졌다. 지하철을 타려고 하는데, 롯데타워 가는 길이란 문구가 보인다. 그래 나온 김에 가보자, 해서 홀로 롯데타워를 올라갔다. 빌딩 꼭대기, 꼭 가봐야 하는 곳은 아닌 것 같다. 그래도 올라가느라 긴 시간 줄 서고, 가서 볼 것도 없었던 뉴욕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보다는 조금 더 흥미로왔고, 가서도 아기자기함을 느낄 수는 있었다. 뉴욕도 그렇고 서울도 그렇고, 그런 데서는 야경을 봐야 한다는 말을 들었던 것도 같다.


컨베어벨트에서 원하는 것 내려먹는 음식점. 소량의 접시 하나에 2천원에서 만원까지 한다. 오른쪽은 롯데타워에서 내려본 서울 시내 전경

또 홀로 갔던 곳 중에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가 있다. DDP라고 불리는 이곳은 지하철을 타면 자주 지나가게 되고, 환승역으로 귀에 낯익은데, 볼거리가 있을 것 같았다. 이곳은 정형화되지 않은 곡선을 살린 건축물로 밖에서부터 눈이 호사스럽다. 외계인들의 우주비행체처럼 보이기도 한다. 거대한 달팽이 형태의 이 건물은 한국이 첨단산업 사회임을 일깨워준다. 특별한 형태의 가구들이 전시되어 있고, 사진 갤러리도 열리고 있어서 흥미롭게 둘러봤다. 쉼터에서 잠시 앉아서 휴식을 취했는데, 바닥의자가 마음에 들었다. 


동대문운동장이 있던 곳이 DDP로 개조됐고, 그 주위 거리에는 밤이 되면 도깨비시장이 열린다. 시카고 형부가 인터넷에서 정보를 알아냈는데, 매일밤 "가짜 명품 가게"가 그곳에 선다고 했다. 명품 복제품이 다 없어진 것으로 알았는데, 밤마다 그곳에 노란 텐트가 쳐지고 사람들이 끓었다. 나는 그렇다 치고 한국에 있는 언니는 그곳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서울 시내에 그런 곳이 있는지, 언니도 처음 알았다는 것이다. 그곳이 도깨비시장으로 불리는 까닭이 있겠다. 언제든 사라질 수 있는 시장이므로.


DDP  건물과 내부. 왼쪽 아래 바닥의자에 앉아서 휴식을 취하는 관람객들. 입장료가 없었던 것으로 알고있다. 오른쪽 역시 건물 사이에 설치된 벤취들. 그 모양이 특별하다.




그집의 룰은 하나였다. 편하게 내집처럼 머물수 있지만, 그 룰을 지켜달라는 엄숙한 부탁이 있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화장실을 사용한후 커버를 닫고 물을 내려달라는 것. 습관이 들지 않아서 쉽지 않았다. 예리한 그녀의 청각에 매번 노출되어, 쫓겨날뻔했다.


위생관념에 철저한 서울의 딸집에서의 일이다. 물을 내림과 동시에 커버를 닫고 웃는 해프닝을 연출하며, 아슬아슬하게 경고를 비켜나갔다. 


딸을 생각하면, 좀 심하다 싶은 것들이 있다. 원칙을 철저히 지키고, 옆길을 보지않는다. 융통성이 없는 것은 나와 남편을 닮지않았다. 위생관념도 중간 정도하는 우리랑 다르다. 한 생명은 부모로부터 떨어져나와 새로운 인격을 형성하고 그길로 줄기차게 나아간다. 


좋아하는 일에 가열차게 몰두하는 것도 좀 다르다. 나중에 보면 선구자적인 면이 있다. 요즘 그애의 관심은 자전거타기이고, 그에 더해서 철인 3종 경기 분야를 연습하겠다 한다. 달리기를 시작했고, 수영을 다시 하겠단다. 


그건 그렇고 딸은 내가 한국에 있는 동안 일주일 내내 일하고 쉬는 주말을 가족들을 위해 비워놓았었다. 첫 2주간은 동생과, 사촌언니와 함께 했고, 나중 2주간은 나와 움직였다. 


서울의 숲은, 뉴욕의 센트럴 파크가 생각났다. 서울 한가운데 조성된 상당히 규모가 큰 공원이었다. 딸과 함께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돌아다녔다. 서울숲에서는 빌딩들이 바라보였다. 가까이에 녹지가 있어서 도시인의 쉼터가 되어주리라. 뚝섬 근처라고 하는데, 서울 지리가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는다. 나중에 친구를 만났는데, 자신의 집이 서울숲 근처라서 자주 산책한다고 했다. 사방에 입구가 있고 입장료를 받는 곳도 없어서, 더 친근하게 느껴졌다. 주차비는 필요하다고 한다.


서울숲에서는 높이 솟은 빌딩들이 바라다보였다. 각종 테마공원이 있고, 소풍코스, 산책로등 도시인들의 쉼터가 되고있다


그 다음에 갔던 곳은 남이섬이었다. 이곳이 또 그리 평화로웠다. 대한민국 안에 또다른 미니국가가 있는 형식으로 운영되었다. 배를 타고 나미나라 공화국에 입국하게 된다. 관광지의 콘셉트이지만, 세상에서 가장 작은 나라 방문하는 셈치면 그런대로 신선하다. 


이곳은 개인(민병도)이 섬을 사서 지역 주민들과 커뮤니티를 형성하여, 오랜시간 공들여 공원을 만들었다 한다. 민영휘 후손이라 하여 일각에선 친일자본이 섞인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있지만 그건 오해라는 글을 읽었다. 좋은 뜻으로 시작하여, 많은 사람에게 평온하고 특별한 추억을 선사하게 해주는 곳이니, 크게 개의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남이섬도 그렇고, 아침고요 수목원도 그렇게, 누군가 발벗고 나서는 사람에 의해서 시작되고, 그 뜻을 이어받아 잘 발전시켜 수많은 사람에게 영감을 주는 곳으로 태어난다. 그안에 깃든 흑역사를 꼬집어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는 있으나, 잘된 것은 격려하고 응원해주는 것이 좋지않을까.


남이섬에는 며칠묵을 수 있는  펜션이 곳곳에 있었다(오른쪽 아래가 그중 하나).  여러 가족이 연합모임할때 이곳서 하면 좋을 것 같다


내가 가고싶어했던 곳중에 서촌이 있어서 큰애랑 길을 나섰는데, 그다지 흥미롭지는 않았다. 카페에서 차를 마시고 도로를 따라 걸으니, 윤동주가 머물던 하숙집이라는 팻말을 달은 집도 있었다.  조금 더 걸으니, 얕은 산이 보이고, 인왕산 입구라는 사인이 보인다. 그 길을 따라 올라가니 윤동주의 흔적이 있다. 윤동주가 자주 찾는 숲속이었나 보다.  윤동주 시인의 언덕에서 잠시 머물기도 했다. 숲이 깊어지는 것같아 걱정하자, 큰애가 자신이 자전거 라이딩할 때 다니는 길이 조금 있으면 나온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 길을 따라 가면 북악산에 갈수 있다는 것이다. 산을 올라갈 수 있을까, 반신반의하며 길을 올랐다.


결국 북악산 정상까지 올라갔다. 자전거 도로라서 그런지 경사가 완만하고 올라갈만 했다. 마침 해지는 노을도 만나고. 그날 정상에 있는 편의점에서 사먹었던 아이스볼은 잊지못하겠다. 친구들에게 아이스볼을 먹어봤느냐고 물어봤는데 아무도 그런 아이들이 없었다. 나는 사진을 보여주며, 얼떨결 북악산 등반과, 정상에서의 아이스볼 맛을 자랑하는 짜릿함을 느꼈다.


북악산에서 만난 노을과 등반후에 먹는 빅구슬 아이스 볼. 그 맛은 절대 알려줄 수 없다.
서촌 끝자락에 있던 윤동주 하숙집터, 그 뒷산에는 윤동주 시인의 언덕이 있었다. 
인왕산이든가, 북악산이든가 가다보니 이렇게 야외무대가 있었다. 시낭송회나 작은 음악회등이 열리는 곳인것 같다. 


한국을 떠나기 이틀전이었든가, 거의 모든 일정을 마치고 딸네집으로 오는데 몸이 무거웠다. 열이 났다. 그다음날이 내 생일이었다. 하루 자고나면 괜찮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거의 하루종일 누워있었다.  딸과 저녁식사를 하러가자고 했었는데, 아무래도 밖에 나갈 수 없을 것 같았다. 딸이 걱정말고 쉬라고 해서 몇번이나 잤다깼다 했다. 그러고나서 조금 나아졌는데, 딸은 케이크를 특별주문해서 가져오고, 음식도 주문했다. 타이음식으로. 자다 일어난 복장으로 촛불을 끄고, 함께 음식을 먹었다. 지극한 아이의 정성에 눈물이 났다. 


출국 하루전에 만나기로 했던 친구들과의 약속도 지키지못하고 조용히 이틀간은 집에 있었다. 코로나는 아닌 것 같은데, 너무 무리해서 몸살이 왔나 했다. 당시는 공항에서 코로나 검사도 안할때여서 마스크를 쓰고 얌전히 있다가 캐나다에 도착해서 늦은밤에 코로나 검사를 했더니 양성반응이 나왔다. 너무 놀라서 마지막쯤에 만났던 사람들에게 검사를 해보라고 했는데, 모두 괜찮았다. 언제 걸렸던 것인지, 그 다음날은 또 음성이 나와서 코로나에 걸렸던 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나도 혼돈스러웠다. 그래도 마지막에 집에서 조용히 있었던 것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캐나다로 돌아온후 한동안 후유증이 있었다. "너무 재미가 없다"를 넘어서 "캐네디언들은 무슨 재미로 살아가나?" 이렇게 뜬금없는 걱정이 들었다. 고삐풀린 망아지마냥 놀고와서 내가 봉착한 절벽같은 무의미성에 나도 놀랐다.  지난번 글에서 이야기했듯이 책을 읽고, 생각을 하고, 기도를 하면서 점차 자리를 잡아나갔다. 씨를 심을 시기에 한국에 나갔기에 언니가 씨뿌려준 상추와 고추가 자라는 모습을 보며, 내가 가진 것들과 내가 보듬어야 할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집안 정리를 다시 꼼꼼이 했다. 가장 공을 들인 곳이, 내가 사용하는 제2의 방. 이방을 정리하면서, 마음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한국은 내가 맘껏 뛰어노는 옛날의 금잔디이고, 나의 생활은 무덤덤하면서 아름다운 캐나다가 아닌가, 뭐 그런쪽으로.


시간이 나면 잡초는 뽑아내고, 한국에서 사온 열무씨를 심으면서 이땅과 화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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