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같았던 단풍여행
수피리어 호숫가 여행을 다녀온 지도 벌써 3주가 지났다. 지금까지도 이쪽은 푸름이 훨씬 많은 걸 보니, 단풍을 기다리다간, 가보지 못하고 말뻔했다. 기회가 왔을때 일단 저질러보는 것이 맞는 것같다. 우리는 만족할 만한 단풍의 바다도 만났으니 말이다. 우리의 최종여행지는 바차와나 베이(Batchawana Bay)라고 할수 있다. RV 팍 주인은 마을 이름을 알려달라는 우리에게 굳이 마을이라고 부를만하지 않다고 했다. 캐나다 횡단하는 고속도로 트랜스 캐나다 바로 옆에 있고, 수센머리 북쪽이며 수피리어 호숫가라고 하면 조금 설명이 될지 모르겠다. 어떤 큰 마을도 아니고, 시즌에만 여는 몇가게들이 있을 뿐이다. 5대호중 가장 크다고 알려진 수피리어 호수 저편은 미국이다. 캐나다 횡단여행을 하는 사람들과 물류 운송자들은 트랜스 캐나다 고속도로를 잘알고 있다. 테리팍스도 이길을 뛰어서 위니펙쪽으로 갔고, 우리도 작년 미국여행을 하고 집으로 돌아올때 지나쳤던 곳이다. 우리가 사는 곳으로부터 차로 8시간 걸리니 상당히 먼곳으로 온셈이다. 단풍기차가 그다지 추천할만 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것으로 유명하기 때문에 우리가 와볼 생각을 했다. 바차와나 베이라는 이름은 살면서 들어볼 일이 없는 무명의 곳이었다.
이번 여행은 한사람 한사람에게 충만함을 안겨주었다. 자매들이라고 성향이 다 같진 않다. 그래도 많은 부분이 비슷하여 여행이 훨씬 즐겁고 쉬웠다.
가장 먼저는 먹을 것, "사먹는 음식에 대한 선호도가 아주 낮은점"이 닮았다. 각자 한두가지씩 밑반찬을 준비했다. 배추김치와 깻잎김치, 첫날에 먹을 콩나물김칫국은 내가 가져가고, 동생들은 오징어무침, 멸치볶음, 김 언니는 오이무침을 가져왔다. 막내는 피망과 사과를 프리마켓에서 한보따리 사와서, 피망은 매끼니 상에 올라왔다. 오이처럼 쌈장에 찍어먹으니, 시원하고 달콤하니 좋았다.
밑반찬만으로 밥을 먹은 건 아니었다. 언니는 각종 양념을 앙증맞은 통에 다 준비해와서 어디서나, 음식조리가 가능했다. 야채를 사서, 샐러드를 해먹고, 된장찌개뿐 아니라, 소고기 바비큐를 만들어먹었다. 또 닭날개를 재워서 오븐에 구워먹고, 아침은 주로 과일과 빵을 먹었다. 한끼도 허투루 먹지 않았고, 배를 두드릴만큼 잘먹었다. 언니가 가져온 밥솥이 3인분짜리로 밥이 부족할까 싶었다. 그래서 한 숟가락씩 서로 퍼주는, 난 괜찮다며, 다른 사람에게 패스하다가, 나중에는 손으로 집어서 던지는 웃지못할 해프닝을 벌이기도 했다. 동생 한명이 심각하게 밥을 그렇게 많이 먹지않는다고 저항하는 바람에 언제나 조금 먹어서인지 매끼니 조금씩 남았다. 마지막날쯤엔 남은 쌀이 부족할듯했는데, 살곳도 없고 하여 조금 애를 끓였는데 전에 남긴 밥이 있어서 나머지 쌀을 안치니, 부족함없이 잘 먹었다. 한끼는 언니가 반죽해온 수제비도 해먹고, 한끼는 라면을 끓여먹기도 했다. 무엇을 먹어도 얼마나 맛있었는지. 사실 밖에서 한두번 사먹을 기회가 있었지만, 메뉴를 찾다가 숙소에 도착해서 맛있게 밥을 해먹는 것으로 결말이 나곤했다. 음식에 대한 취향은 비슷했기에 가능했다는 생각이 든다.
돌아오는날 저녁은 반듯이 식당에서 먹자, 고 노래를 부르면서 왔는데, 가고싶은 곳이 문을 닫아서, 우리집에 와서 얼려놓았던 밥과 불고기를 꺼내고, 또한 얼려놓았던 배추시래기를 꺼내서 된장국을 끓여서 마지막 음식을 함께 했다. 돈을 쓰자고, 쓰자고 노력했는데 결국 마지막 정산을 해서 돈을 돌려받기까지 했다. 막내의 기부금 100달러가 없었어도 될뻔했다. 어쨋든 풍성한 결산이었다.
조엔: 언니의 소원성취 여행이었다고 말한다. 언니는 작년에 서부쪽으로 차박여행을 갔었다. 온타리오에서 밴쿠버까지 20일이 걸려서 차로 여행했다. 차에서 자는 것을 "너무 좋아하는 줄"은 알았지만, 그런 큰 사고를 칠줄은 우리들은 몰랐다. 얼마가 될지는 모르지만, 가다가 힘들어지면 온다고 떠난 사람이 조금씩 조금씩 달리다보니, 결국 왕복 9500km를 주파했다. 운전하면서 힘들었고, 월마트 주차장에서 잠을 청하기도 하고(언니가 잤던 그 월마트를 이번에 방문해봤다^^), 주유소 한편에서 자기도 하면서 그 길을 달린 언니의 가장 아쉬운 점은 차를 타고 가면서 풍경을 보는 것이 너무 좋았는데, 그런 곳에 차를 주차하고 쉬고 갈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이번 여행은 쉬고 싶은 곳에서 충분히 쉬면서 하는 여행이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해변가를 걸어보는 것도, 키높이가 맞는 나무에 열린 사과열매를 따는 것도 모두 작은 소원이었고 그걸 이루기도 했다.
동생은 언니의 손을 붙잡고, 어린아이에게 걸음마를 걸리듯 언니를 이끌었고, 챙겨주었다. 우리의 계획은 언니가 할만한 것들로 채웠고, 운전부터 어려울만한 일들은 우리들이 했으니 언니의 호흡에 맞추었다고 하면 될까. 대신 언니는 차와 여행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야무지게 준비했고, 여행의 가장 큰 동력이 되었다.
언니는 차박여행을 좋아하는데, 이번에는 그걸 이루진 못했다. 어쩌면 그것은 언니가 다음 여행을 꿈꾸게 되는 동기가 될지도 모른다. 살림에 필요한 것들이 부피나가지 않게 다 챙겨진 언니의 차는 언제든지 차박여행을 떠나도 상관없을 정도로 준비가 되어있다.
바니: 동생은 집안의 보물같은 반짝이는 별이다. 오랫동안 떠돌며(?) 살았다. 선교사 부부로 살면서 선교와 공부로 가족들 곁에는 많은 시간, 그들 가족이 부재했다. 공부를 마치고 토론토에 정착하나 했더니, 이번엔 미국으로 가게 되었다. 미국의 한인교회에서 영어권 목사로 섬기다가 요즘엔 남편이 미국신학대학에서 교편을 잡게 되어 미국살이중이다. 그래도 공부를 마친후에는 우리들과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동생은 심리상담사로 일하는데, 미국에선 영주권자가 아니어서 일을 할수가 없는 중이다. 그 동생이 현재 토론토에 나와있다. 동생은 아픈자들에게 위안을 준다. 함께 기도하면서 그 상황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나름대로 해결하는데 도움을 준다. 동생이 이끄는 북클럽 회원으로 나도 많이 참여했는데, 그애는 눈물이 많고 공감이 뛰어나고, 하나님의 아름다운 사람으로 살고자 하고, 다른 사람들도 그쪽으로 이끄는 특별함이 있다. 동생은 지난 글에서 이야기했지만, 하나님의 잔칫상에 초대받았다고 말했다. 그리고 해바라기를 너무 좋아하는데 우리의 숙소옆에 해바라기가 심어져있었다. 밭이라기엔 약하지만, 참으로 잘자란 노란 해바라기가 우리의 들고남을 구경했다. 해바라기 옆에서 화사하게 웃고있는 동생의 모습은 사진으로도 담겼지만, 잊지못할 것 같다.
케이: 동생은 시간을 분초로 쪼개서 살고있는 비즈니스 우먼이다. 사람을 떠나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번 여행은 정말 사람을 만나지 않은 여행이었다. 기차를 타는 시간, 여러 사람속에 있었지만, 오롯이 우리 자매 4명의 여행이었다. 동생은 바쁨속에 빠지지 않고 틈을 만들면서 자신에 대해서 더 많이 알아가는 중인 것 같다. 특별히 음악에 대한 갈망같은 것. 내가 가져간 핸드폰 삼각대가 큰 역할을 했다. 동생은 우리들에게 합창을 녹음해보자고 했다. 그애가 가끔 그런 것을 요구하는데, 시간이 없는 중에 하려면 쉽지않다. 예전에 한번은 음정이 맞지않아, 그애의 계속된 지적에 나는 아주 곤욕을 치렀었다. 이번에는 집에서도 연습하고, 해변가에서도 하고, 우리들은 함께 소리를 맞췄다. 이번에 불렀던 노래는 시편 40편 "하나님의 음성을" 이었다. 동생은 언젠가는 음반을 만든다고 할수도 있을 것 같다. 모두 흰색 윗옷과 까만바지를 가져오라고 해서, 단체복을 입고 해변에서 녹음하다가, 몇번이나 틀려서 깔깔대며 다시 시도하기도 했다. 본인만큼 절실하지 않은 우리들이 그애 요구에 모두 즐겁게 응해주었으니, 그애의 꿈꾸던 여행의 모습이 아닐 수 없겠다. 방에 박혀서 기타를 연주하면서 배경음악을 녹음하기도 했다. 해지고 해뜨는 장면 모두를 화면에 담고, 혼자 뮤직비디오를 위해서 촬영을 하다가,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여행에서도 엄청 바빴다. 언니는 그런 케이를 보고, 이곳에 와서도 비즈니스를 한다고 놀렸다. 한시도 허투루 쓰지않는건 밖에 나와서도 마찬가지다.
민디: 기차여행때까지 마음에 드는 사진을 한장도 건지지 못해서 마음이 심란했다. 그런데 로빈슨 클리프에서 그 모든 갈증이 풀렸다. 좋은 사진을 건지느냐, 아니냐에 대한 것은 아니다. 주변 눈치를 안보고, 충분히 여러 각도로 찍을 수 있었고, 또 찍기만 하느라, 감상을 하지 못할 수도 있는데, 누구 하나 어서 가자, 그만 가자 하지 않아서 좋았다. 찍어주는 사람이었는데, 찍히는 사람도 되어서 맘에 드는 사진도 만났다. 휴식겸 점심먹을 장소를 찾는데, 교통 사인에 민감한 나는 자주 장소를 발견했다. 단지 피크닉 테이블 그림만 그려있어도 그안에 가면 방문객을 위한 쉼터가 마련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곳을 자매들이 좋아하면, 내가 그 장소를 준비한양 기분이 한껏 올라갔다.
클리프에서 발을 삐끗한 다음에 숙소에 오니 발이 부어오르고 좀 아팠다. 동생은 찬물 수건을 해서 갖다주고, 지퍼백에 얼음을 얼리고 저녁하는 것등, 모든 일들을 본인들이 했다. 나는 가만히 앉아있으라고 했다. 그렇게 동생들의 돌봄을 받으니, 나도 어느덧 "어른 대접"을 받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남편에게서 문자가 왔다. "싸우지는 않고?"라고 말이다. 여행은 서로를 돈독하게 만들어주기도 하지만, 서로 다름으로 인해서 문제가 꼭 생긴다. 우리는 돌아오는 길에 여행에서 좋았던 것과, 못다한 말들을 했다. 나는 처음 예약할 때, 조급했고, 바로 바로 대답을 하지않는 동생에게 "짜증"을 느꼈다. 인터넷 예약이라는 것이 쉬운 것 같아도 그렇지 않다. 좋은 데 골라야지, 결제해야지 결정에 대한 피로가 쌓인다. 나중에 동생이 배를 타는 것이 어떠냐고 물어왔을 때, "배를 타면 뱃삯도 많이 들고, 예약도 해야한다, 검색해봐야 하고"라며 말을 잘랐다. 네가 할 것이 아니면, 그런 아이디어를 내지말라는 소리나 마찬가지였다.
나중에 하루를 벌게 되면서 배타고 가면 어떻겠느냐는 이야기가 나왔다. 바니가 중간에서 많이 알아본 것 같았다. 나도 그러는 것이 좋겠다고 동의했다. 결국 배 예약은 내 담당이 되었는데, 4사람의 법적 이름과, 차량의 종류, 차 사이즈 등도 필요했다. 언니집에 가서 차를 자로 재고, 그렇게 배 예약을 마쳤다. 그런 일들을 이야기했다. 동생은 그런 일들이 얼마나 힘든지 알기에, 자신이 해야하는데 할 시간은 없어서 여행에 적극적일 수가 없다고 했다.
각자의 방법이 있는지라, 목소리가 큰 사람의 말을 주로 따르게 된다. 막내 목소리가 큰편이다. 요즘은 아주 작아지긴 했어도 말이다. 자신의 의지대로 관철하려고 해서, 우리들의 신경이 날카로와질뻔한 상황을 몇번 맞닥뜨리기도 했다. 그때마다 누군가의 양보로 스르르 풀어지는 것을 봤다.
언니와 바니가 집앞 베란다에서 밤늦도록 이야기를 나누는 어떤날 밤, 나는 집안에 있었다. 그날은 어쩐지 몸이 으슬으슬했다. 여행에 몸이 깊이 담가지지 않았다. 모두 탄성을 지르는 장면에서도 그만큼은 아니었다. 그날 편안한 의자에 앉아서 숙소에 마련된 여행안내글을 읽었다. 그러면서 우리가 할만한 것들이 있음을 알게 되고, 그 이후로 조금씩 발동이 걸렸던 것 같다. 같이 있지만, 혼자 있을 수도 있는 적절한 여행이었다.
여행을 잘 마치고 났는데, 갑작스레 케이와 언니가 코로나에 걸려서 비상이 걸렸다. 케이는 억지로 더 쉴수밖에 없는 사정이 생겨서, 두문불출해야 했다. 그녀는 여행에서도 바쁘더니만, 영혼의 쉼을 위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다.
글을 맺기 전에 생각나는 그 할머니 이야기를 하자. 우리들이 기차 번호가 뒤쪽이어서 빠르게 움직이며 가는데, 몸이 비대하고 잘 걷지못하는 할머니가 우리앞에서 워커를 의지해 걷고 있었다. 기차에 가까이 다가가다가 잠시 휘청이고 주저앉아서 깜짝 놀랐다. 주변 사람들과 승무원들이 도와 할머니를 일으켰다. 언니도 전동차를 타기 때문에 그 할머니의 일이 남의일 같지가 않았다. 단풍구경을 위해 아가와 캐년 목적지에 멈췄다가 다시 돌아가려고 하는데, 기차 입구에서 그 할머니를 다시 목도하게 되었다. 할머니가 지팡이 대신 의지하던 워커안에 끼어, 무릎이 땅에 닿아 있고 몸을 움직이지 못하시고 계셨다. 옆에서 그분을 빼려고 여러 장정들이 돕고 있었다. 할머니는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서질 못하셨다. 옷은 말려 올라가고, 정말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보호자라고는 남편인 뿐인 것 같았는데, 그분도 도움을 주기엔 미흡해보였다. 우리는 그분 모습을 보고 그래도 전망대를 보겠다고 뛰어갔다가 왔는데, 나중에 언니에게 그분의 이야기를 마저 들었다. 여러 사람들이 그분을 워커에서 일으켜 세우느라 애썼다는 것이다. 그렇게 참담한 모습은 처음 봤다면서. 그런 몸으로 단풍 구경을 왔다는 것도 안타까웠지만, 그 마음을 어찌 다 짐작하겠는가.
나중에 내릴때 그분이 앉은 곳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얼굴이 밝으셨다. 앞에 앉은 아시안 부부와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셨는지, 정말 좋은 만남이었다고 서로 인사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내가 그분의 입장이었다면, 왜 이런 몹쓸 여행을 왔나, 얼굴이 사색이 되어 있을 것 같은데, 그런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내려가는 4시간 동안 평정을 회복했다 싶었다. 그것 또한 너무 감사한 광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