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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정을 잊어버리셨나요?

by 이성진 Feb 10. 2023

시작도 하기 전에 녹아버렸네

의심 없는 겨울이었다.

같은 나라인데도 기차는 마법같이 나를 다른 계절로 데려다주었다.

‘서울 사람들은 이런 날씨가 익숙한가...’

시베리아 기단의 병정들이 옷깃 사이로 스며와 창을 들이밀었다.

남쪽 따뜻한 지방에 사는 나는 이 도시에서 한없이 이방인이다.

무언갈 두고 나오는 오랜 버릇이 있다. 대개는 자잘한 해프닝으로 끝나곤 했는데 인생의 방향을 바꿀만한 사건도 더러 있었다. 의무경찰 면접을 보러 갔던 날, 신분증을 방에 놔두고 와서 팔자에도 없는 공군에 입대했다든가 하는 뭐 그런. ‘팔굽혀펴기 20회’ 정도는 거뜬하게 통과하라고 키운 광배근은 꺼내지도 못한 채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다시는 중요한 일에 준비물을 두고 오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다짐을, 경찰청에서 집까지 걷는 한 시간 반 동안 곱씹었다.

그러니 조금은 나아진 셈이다. 적어도 '전날'에 수험표를 놔두고 왔다는 사실을 눈치챘으니 말이다. 기차로 3시간을 달려 도착한 곳에서 발견했단 게 좀 그렇지만.

현재 시간 PM 11:45

면접 시간 AM 9:30

아침 일찍 눈을 떠서 재빨리, 그것도 생전 처음 가는 장소에서 프린트 집을 바로 찾아서 무사히 수험표를 출력할 자신이 없었다. 늘 그랬듯, 시간에 빠듯이 일어나 헐레벌떡 면접장까지 뛰어갈 게 뻔했다.

정류장에 내렸다. 다음 버스까지 50분이 남아있었다. 환승을 한 번 해서라도 목적지에 가는 심야 버스가 있다는 사실에 감사해야 할지, 길거리 한복판에 덩그러니 남겨둔다고 원망해야 할지 모르겠다. 일단 따뜻한 곳이 절실했다. 얇은 수트 바지가 덮지 못하는 복사뼈 부근에 감각이 사라지고 있었다. 이 춥고 깊은 밤에 택시를 타지 않는 이유는 그게 더 비싸기 때문이고, 삼 천원짜리 롯데리아가 아닌 피시방에 들어간 이유는 그게 더 싸기 때문이다. 천 원이면 따뜻한 난방과 정수기 물이 있는 곳. 뼈까지 시린 밤, 피시방은 에덴동산이 된다. 어차피 수험표 출력도 해야 할 터였다.

숱한 알바를 거쳤음에도 아직 피시방 알바 경험은 없다. 그럼에도 야식거리 주문이 밀려 들어오는 시간대에 알바 직원이 정신없다는 것만은 바로 느껴졌다. 그런 사람을 두 번이나 붙잡고 물어보는 건 다분히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여기 프린트 돼요?”

“프린트는 아무 컴퓨터에서나 다 할 수 있는 거예요?”

솔직히 좀 쫄렸다. 그는 팔에 화려한 문신을 하고 있었고 귀와 코에, 정확히는 고리를 걸 수 있는 곳이면 죄다 피어싱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지만 어쩌랴. 물러날 곳이 없다. 여기서 수험표를 출력하지 못하고 숙소에 가면 일정은 꼬일 것이고 당장 내일 면접에 지장이 생긴다. 바짓가랑이를 붙잡더라도 난 환승 버스가 오기 전 여기서 꼭, 프린트를 완수해야 했다.

요즘 현금을 들고 다니는 이가 드물다. 계좌이체와 카드결제, 각종 페이가 익숙한 현대인들이다. 나 역시 지갑을 따로 들고 다니지 않는데 생각해보니 프린트 값을 카드결제로 해줄지는 미지수였다. 지금 피시방을 나가서 근처 ATM기에서 돈을 뽑고 다시 와서 출력하고 결제를 마친다....는 건 너무도 험난해 보였다. 그때까지 얌전히 버스가 기다려준다는 보장도 없었다. 만 원 뽑는데 천 원을 수수료로 떼이는 일도 적잖이 속이 쓰렸다. 돈 없으면 아껴야지 뭐 별수 있나.

계좌이체로 할 수 있게 빌어야겠다고 마음먹고 그 알바 직원에게 갔다. 컬러로 출력된 내 수험표를 그는 찬찬히 보고 있었다.

“컬러는 한 장에 오 백원인데... 뭐 안 주셔도 돼요.”

번거로운 결제를 귀찮아하는 것인가. 그렇더라도 어찌 서비스의 대가를 지불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나는 한껏 난처한 표정으로 ATM까지의 최단거리를 잠자코 떠올렸다. 배 아래쪽이 살살 아파왔다.

“저도 이번에 대학원 지원하거든요. 저는 건국대.”

달이 조금 기울었는데 밖은 여전히 을씨년스러웠다. 피시방 앞에는 포장마차가 두 개 있었고 빨간 가림막 위로 후더운 김이 오르고 있었다. 평소였으면 들어가서 한 잔 하고 싶다는 생각이 동했을 터였지만, 글쎄다, 기온은 퍽 낮아도 난 더 이상 춥지 않았다. 마음 깊숙한 곳에서 무언가 따뜻한 것이 계속해서 피어오르고 있었다. 근처 편의점에서 이 천원짜리 커피를 하나 사 그 알바에게 가져다주었다. 돈은 이럴 때 쓰라고 지금까지 아꼈던 것 같다. 우리는 서로의 처지를 눈빛으로 보듬어주었고 다 잘 될 거라는 말을 주머니에 챙겨주었다.

한파에 얼었던 손이 풀렸다. 스르륵 녹은 건 내 마음인데.

호의를 권리로 착각하지 말라는 교훈을 알지만, 호의를 주고받는 것만큼 따뜻한 일이 세상에 또 없다는 것을 안다. 인구 천만 도시에서 대학원 생활하면서 사람에게 데일 일은 숱하게 많겠지만, 그만큼 좋은 사람들을 만나 행복한 순간으로 빚어내겠지. 그 믿음 하나로 나는 2년을 어떻게든 버텨내겠지. 면접 전날 이토록 우연히 포근함을 선물 받은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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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진 소속 직업 출간작가

오늘도 한껏 무용하게 저자

대학원에서 조경을 배우고 있습니다. 이따금 기행에 몸을 던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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