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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성진 Nov 04. 2023

흰 천과 바람,
함께 춤출 사람만 있다면 어디든

보통이란 말엔 퍽 무서운 힘이 있어서, ‘웬만하면 한 번씩은 해본’ 일을 ‘모두가 한 번씩은 해본’ 일로 보게끔 하는 착시효과가 있다. 세상에는 뜨거운 물로 손수 내린 드립커피를 안 먹어본 사람도 있을 테고 장염으로 고생해본 적이 없는 사람도 존재한다. 보통 그러하다는 말은 그러할 가능성이 통계적으로 높다는 것일 뿐 예외는 늘 있기에 “그거 보통 다들 한 번씩은 해보지 않나?”라는 말은 가벼이 뱉을 말은 아니다. 당신이 깜짝 휴가와 함께 용돈을 쥐여 주는 스윗한 상사가 못 된다면 말이다.


자신이 보통의 경계 밖에 놓여있다는 사실을 목격하는 건 썩 유쾌한 경험은 아니다. 또래 이들과 건너온 세월이 비슷할 터인데 남들 한 번씩 다 하는 걸 못 했다면 시간이 없었거나, 돈이 없었거나, 그도 아니라면 용기가 없었다는 이유가 아니겠는가. 딱히 할 이유가 없어서 안 한 거라는 소심한 반항을 해봐도 물 위에 떠다니는 기름이 된 것만 같은 생각에 씁쓸한 맛만 감돈다.


스스로 보통 사람이라 여기는지와 관계없이, 한 가지 확실한 건 보통의 사람들도 보통에서 벗어날 때는 있다는 것이다. 나의 경우는 스물일곱 먹을 때까지 여태 강원도를 가본 적 없었고 스키를 타본 적이 없었다. 어머니가 강원도 평창군 봉평 쪽이 고향인지라 ‘메밀꽃 필 무렵’은 골백번도 더 읽어봤지만 ‘산허리에 핀 메밀밭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달빛 아래 빛나는 모습’은 상상으로나 할 뿐, 남쪽 나라 부산 사람에게 강원도는 어쩐지 멀기만 했다.


그랬던 자가 보통 사람으로 가는 기회를 얻었다. 이 나이에 스키장 알바라니. 삼십 대 중반에 시작하지 못하는 건 키즈모델 말고는 없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지만 몇몇 직종과 업장에는 암묵적인 나이 상한이 존재한다. 스키장이나 놀이동산같이, 고단한 현실 바깥에서 달콤한 환상을 파는 곳이 대체로 그러한데, 활기 넘치는 분위기가 사람을 기쁘게 한다는 점에서 젊은 알바를 쓰는 게 낫다고 받아들여지는 듯하다. 부리는 사람 입장에도 나이 어린 사람-그럼에도 될 수 있으면 군필을 선호하는 건 놀라울 일도 아니다-이 덜 껄끄러운 게, 적어도 여기 한국에서는 자명한 사실이다.


강원도 평창, 심지어 봉평에 있는 스키장에서 휴학을 핑계 삼아 일하고 있자니 감회가 새로웠다. 일평생 한 번도 밟아보지 못한, 지도에 표시되지 않은 미지의 땅(terra incognita), 동시에 어머니의 고향 땅(motherland)과도 같은 곳에선 어떤 일들이 나를 반겨줄까. 새로움의 옷을 입고 찾아올 보통의 나날들에 적잖은 기대를 실었다.


세상은 많은 이들이 더불어 살아가는 곳이라 보통의 기준은 사회를 돌아가게 하는데 효과적인 수단이지만, 그 보통의 기준에 눌리어 자신만의 리듬을 잃는 게 우리, 보통의 사람들이다. 훗날 탐탁지 않은 결과에 마주하고서 ‘내가 원해서 그런’ 건 아니었다는 변명을 하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 중이다. 세계가 내놓는, 보통 그렇게 한다는 것들을 뜨개실 풀듯 마구 해체해서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것들로 겉뜨기 안뜨기 짜내고 있다. 순전히 ‘내가 원해서 그런’ 것들로 하루하루를 예쁜 바구니에 잘 담아냈으니 언젠가 날 잡고 꺼내 볼 요량이다.


세계를 해체해서 내 방식대로 조립한다는 거창한 소리를 해대지만, 이런 내가 발 딛고 사는 기반이 바로 이 세계며, 사회고, 공동체임을 안다. 시스템의 한 부분인 인간이 저 좋은 것만 취하겠다고 외치려면 제 잇속만 챙기는 암세포와는 무언가 다르다는 걸 내보여야 할 테고, 이를 내 평생 숙제로 안고 가기로 했다. 어디 사회만 탓할 일인가. 보통의 인간상을 설정해놓고 암묵적으로 유도하는 건 공동체가 영속하는 데 필수적이며, 남들 하는 대로만 살아도 손해 볼 것 없다는 어머니의 말은 내게는 딱 맞지 않을지언정 틀린 말도 아니다.


보통의 인간상, 대학원생에게도 그런 게 있으려나. 아무래도 논문을 쓰고 굵직한 프로젝트에 참가해 경험을 쌓아 교수든 연구원이든 다음 단계를 차근히 밟는 것 정도가 아닐까. 앞으로 나아갈 생각을 해야지 자꾸 맴돌기만 한다는 쓴소리는 나를 미워하는 이가 아닌 가장 아끼는 사람들에게서 나온다. 생채기와 연고가 동시에 얹히는 느낌이다.


그들 마음의 온기를 느낀다. 걱정함을 이해한다. 나라고 대가리가 꽃밭으로 가득 차서, 인생 따위야 되는 대로 사는 사람이겠는가. 인간은 관성에 무력한 존재라 오르던 사람은 계속 올라야만 마음이 편하다. 파병을 위해 스스로 중장 계급장을 떼고 대대장으로 6.25 전쟁에 참전한 프랑스 몽클라르 장군의 선택은 보통 사람들로선 결단할 수 없는 일이다. 달콤한 과즙만 흐를 것 같은 지위의 맛이 인생의 선택폭을 좁히며 가능성의 세계를 잠식해버리니까.


그대는 부디 그대의 삶을 살기를 바란다. 나는 과거를 발판 삼아 앞으로 뛰쳐나가는, 그것도 좌우로 소소하게 갈리는 골목길이 아니라 고속도로처럼 한 방향으로 쭉 뚫려 있는, 그런 직선의 방식으로 삶을 담아내고 싶지 않다. 우리가 사는 자연은 대체로 매끈한 곡선이다. 나뭇잎도, 새의 날개도, 지구의 모양도. 이따금 돌고래의 모양과 같이 유선형으로 생의 샛길로 빠지고 싶고 가끔은 꼭대기를 목표로 산을 오르다가도 이어질 하산의 과업을 묵묵히 받아 내고 싶다. 막막한 마음에 한숨 한 번쯤이야 크게 쉬겠지만 곧바로 띠를 허리에 동여매며, 퍽 의연하게.


판타 레이(Panta rhei). 그리스의 옛말처럼, 만물은 흐른다. 나의 시간도 돌고 돌아 어딘가 머무르기야 하겠지만 머지않아 자리를 털고 일어날 요량이다. 앞이든 뒤든, 위아래를 막론하고 함께 춤을 출 사람만 있다면 나는 어디든 갈 수 있을 테니.



눈꽃 핀 1월, 휘닉스파크 몽블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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