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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성진 Apr 20. 2024

정말이지 삶은, 어떻게든 나를 속이려 든다

내일의 눈꺼풀을 들어올릴 자신이 없을 때면 곱씹는 어구가 있다. 푸시킨의 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제안하는 어투로 보니 뒤에는 어째서 슬퍼하지 말아야 하는지, 왜 노하지 않아도 되는지가 이어지겠지만, 시의 첫 구절에서 그대의 가슴이 울렸다면 아마 ‘삶이 속였다’는 표현의 당돌함에서가 아닐까.     


준비했던 공모전에 또 떨어졌다. 정말이지 삶은, 어떻게든 나를 속이려 든다. 내가 속았다는 사실을 직시하는 일은 메이플 아이템 하나에서도 썩 유쾌한 일은 아니지만, 삶이 나를 속인다는 건 당근마켓 판매자가 속이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다. 굳이 같은 점을 꼽자면 모든 속임에는 일종의 기대가 전제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삶이 나를 끊임없이 속이고 있다면 그건 내가 끊임없이 삶에 기대를 걸고 있음을 반증하는 일이다.


내일이 오늘보다 좀 나았으면 하는 소망을 비난할 수 있는가. 오늘보다 나은 내일, 예년보다 풍족한 올해, 더 높은 자리, 더 의미 있는 삶의 형태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묻는 영화의 물음에 내놓아도 나쁘지 않을 답안이다. 닿고 싶은 목표를 설정하고 그것에 맞게 노력하다보면 기대는 내심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간절히 원하면 온 우주가 도와준댔는데... 뭐 나름 열심히 하기도 했고.’     


삶이란 녀석과 질리도록 싸웠다. 가끔은 아등바등 이겨먹기도, 이따금은 못 이기는 척 져주기도, 때때로 외면하거나 이용해먹기도 하면서 정이 들어버렸나. 이제는 얘도 나를 좀 알고 나도 얘를 좀 안다고 말해도 될지 모르겠다. 오래 본 친구는 웬만해선 다툴 일도 없다. 애초부터 영혼의 아귀가 딱 들어맞아 그런 게 아니라 어디가 모가 났고, 어디가 흠이 있는 만큼 잘난 녀석인지를 몸으로 부대끼면서 체감했기 때문이다. 무엇인가가 꼭 되고 싶어 삶에 기대를 걸고, 오래된 친구에게 또 속고 슬퍼하며 제 반쪽을 원망하기에는 내 튼튼한 다리가 아깝다. 어디로든 갈 수 있고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사람. 나는 해적왕이자, 집시이자, 조르바이자, 디오게네스이다.


『장자』에 나오는 말마따나, 칭찬이나 비난에 무심한 채 용이 되기도 하고, 뱀이 되기도 하면서 흐르는 대로 살아가고 싶다. 무언가 되겠다고 떼쓰지 않고 잘 되면 잘 되는 대로, 안 되면 안 되는 대로, 세상 만물과 더불어 살아가되 세상 만물과 다투지 않아 그것에 부림 당하지 않는 모습으로.


햇빛이나 가리지 말고 나와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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