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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수 Jul 25. 2023

선생님 제가 PTSD 인가요?

다시 찾아온 우울증에 대하여


이직을 했다. 커리어의 마지막 미련이라면 디자이너로서 좋은 디자인 팀과 함께 하는 것. 이미 다 타버린 열정 속에 희미하게 남아있던 마지막 불씨는 그뿐이고, 지금 이 회사에서 그 미련의 불씨를 털어버릴 수 있으리라.


그런데 왜일까. 이유 없이 “또” 눈물이 차오른다.

아, 우울증 자네 또 왔는가.


조용히 우울증 자가진단을 검색한다. 몇 개의 사이트가 뜬다. 광고 영역을 제치고 보니 국가트라우마센터, 도봉구보건소, 삼성서울병원 많기도 하다. (우울증 자가진단 항목은 어딜 가나 비슷하니 무엇이든 상관없다.)


자 어디 한번 점수를 매겨볼까?


“나는 요즘 슬프다”라는 항목에 또 눈물이 가득 차오른다. “매우 그렇다”, “일주일에 3-4회 이상”


우울증이 의심되므로 전문가의 진단을 받으세요.


아 또야 진짜 지겨웡


또 병원에 가야 하는구나. 이미 3년 전 꾸준히 정신과 진료를 받아본 경험도 있었고 막연한 거부감이나 편견은 없었다.

그런데, 가기 싫었다. 정확히 말하면 정신과를 내과처럼 방문해야 하는 내가 싫었다.


“나 자신이 싫다“고 느끼는 것 역시, 우울증 증상 중 하나라는 것을 경험상 잘 알고 있었기에 나 자신을 타이르며, 또 내가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병원을 예약했다.


2년 만에 다시 찾은 정신과.


어… 모르겠어요. 그런 것… 같아요? 네 가끔… 그런 식으로 그랬던 것… 같아요.


여기에서 눈물을 흘려야 완성


어버버어버버. 정신과 선생님 앞에선 세상 청승맞은 바보가 된다. 울일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차오르는 눈물을 막을 길이 없어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는 나를 코를 푸는 비염 환자 보듯이 바라보는 선생님. 정확한 진단을 위한 몇 가지 질문을 던진다. 정말 핵심을 잘 물어보시네 감탄하면서도 슬픔은 몰려온다.


마지막으로 질문 있으세요?


저… 혹시 제가 요즘 흔히 말하는 PTSD라는 건가요?


아. 우울과 불안은 높지만, PTSD는 아니에요. 건강하게 잘 지낸 시간도 길었잖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아…


예를 들어서, 화재를 경험한 사람도 모두 트라우마가 생기진 않아요. 하지만 불을 바라보는 관점은 다른 사람들과는 전혀 다르겠죠. 과거와 현재를 분리하는 힘은 부족할 수 있어요. 그걸 길러야 해요.


끄덕끄덕.


그렇구나. 약봉지를 넉넉히 받고, 앞으로 잠은 잘 자겠다. 잘 왔다. 건강해지자. 약간의 슬픔과 성취를 느낀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왜 우울증 같은걸 앓는 건지 스스로가 원망스럽다. 나의 이런 기분을 아무도 이해해주지 못할 것이고, 나아가 나를 비난할 것이라는 막연한 불안도 느낀다.


하지만 이 또한 증상 중 하나일 뿐 사실이 아니거니와, 우울은 나의 잘못이 아니다. (그렇게 의식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차갑지만 따뜻한 정신과 선생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다.


막상 우울증상이 발현되면 본인의 의지로 치료하긴 힘들어요. 우리가 심한 감기에 걸렸을 때 물을 많이 마시고 이겨내자고 생각하지 않잖아요. 마음도 마찬가지예요. 아프면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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