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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켓 팝송 Aug 16. 2019

벤줄

 병귤. 


 요즘에는 한라봉, 천혜향, 레드향 등 다양한 귤이 제주도에서 난다. 그래도 가장 흔하게 먹는 귤은 온주밀감이다. 이 온주밀감은 일본에서 들어왔다. 그런데 제주도에서 오래 전부터 재배했던 귤이 있다. 

 제주도 예전 집 마당에는 팔삭이나 병귤을 심었다. 내가 유년시절을 보낸 화북 우리집 우영팟에는 벤줄이라 부르던 병귤이 있었다. 벤줄은 제주도가 원산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모양은 백열등처럼 생겼다. 세로로 주름이 많이 나 있다. 병귤나무는 우영팟에 한두 그루 심었기에 요즘처럼 전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지붕보다 더 높이 자라는 경우도 흔했다. 

 우리집 병귤나무도 키가 컸다. 우영팟엔 병귤나무가 있었고, 비파나무도 있었다. 병귤나무와 비파나무. 나는 그 나무 아래에서 자랐다. 5월에는 귤꽃이 피고, 10월에는 비파꽃이 핀다. 나는 벌처럼 그 꽃 주위를 붕붕거리며 돌아다녔다. 

 제주시 도련동에는 수령이 200년가량 된 병귤나무가 있는데 국가지정문화재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우리집에 있던 그 병귤나무도 그대로 뒀다면 천연기념물이 됐을지도 모를 일이다. 

 병귤은 약귤이라 불렸으며, 텃밭에 심어 기력이 쇠했을 때 약으로 먹는 귤이었다. 비파나무 열매는 마음껏 따 먹어도 뭐라 하지 않았지만 병귤나무는 우리집의 보호수였다. 

 하지만 요즘은 병귤나무를 보기 힘들다. 서귀포 감귤박물관에 가야 볼 수 있다. 할아버지가 병석에 누워 있을 때 애석하게도 가을이어서 약으로 만들 수 없었다. 병귤나무를 보면 할아버지가 생각난다. 내게 대나무 활, 생이총 만드는 법을 알려준 할아버지. 젊으셨을 때는 한의학을 공부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할아버지는 아침마다 책을 소리내어 읽었다. 한문으로 된 책들이었는데, 내게 천자문을 가르치기도 했다.  

 내가 아직 덜 익은 벤줄을 따서 먹으려고 하면 제사상에 올릴 거라며 지청구를 놓던 할아버지. 제사가 끝나고 며칠 지난 어느 날이었다. 할아버지가 나를 불렀다. 할아버지가 방에서 벤줄 두 개를 꺼내 내게 내밀었다. 

 “돌코롬할 거여.”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날, 나를 불러 당신의 다리와 팔을 주물러 보라고 했다. 팔다리가 시멘트처럼 딱딱했다. 안마를 받던 할아버지가 눈물을 흘렸다. 아마도 팔다리에 감각이 없어서 그랬던 것 같다. 할아버지 주름진 손 위에 놓여있던 노란 벤줄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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