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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n nch Mar 19. 2018

새벽

새벽이라고 하니 늘 마음에 품고 다니던 대사가 생각난다. 영화 '다크나이트' 중 하비 덴트가 기자들에게 하던 말이. '해 뜨기 직전의 새벽이 가장 어두운 법입니다.' 사실 이 말에 동의하지는 않는다. 해가 완전히 등지고 있는 3-4시가 더 어두울 수 밖에 없으니까. 그럼에도 저 대사는 사실관계를 떠나 곱씹을수록 단내가 풍겨온다.

 하비 덴트가 극중 저런 대사를 한 이유는 들끓는 범죄가 최고점을 지나 곧 사그러들 것이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실로 시민들은 범죄 때문에 두려움에 떨고 있었으니까. 희망이 우리에게 다가오기 전, 그 직전의 순간은 우리에게 가장 큰 인내와 고통을 감뇌하게 하는 것일까.

 이화여대에서 일어난 잔잔한 파도는 광화문에서 범람하는 파도가 되어 사회를 휩쓸었다. 평화시위, 평화의 승리, 그리고 정의의 승리라는 수식어들과 함께. 전 정부의 행보는 시민의 뜻이 아니었기에 부패였고 새벽이었다. 지금, 우리는 조금 웃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달라진 정부가 우리에게 '희망'을 가져도 좋다고 말하는 것 같으니까.

 그러나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이게 아니다. 단지 '이화여대'를 언급해야 했을 뿐이다. 그래 이화여대다. 파도를 만든 것은 여성이었다. 사회에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큰 조직들, 세력들이 아닌 '약자'로 취급되는 여성이!

 우리나라의 여성들은 분명한 사회적 '약자'이다. 임금에서의 불평등, 출산후 단절되는 경력 그리고 가정주부. 직장 내에서 행해지는 숱한 성희롱과 성추행, 이에 대해 불편함을 토로하면 불편한 분위기를 만든 피의자가 되는 현실.

 무엇보다 심각한 문제는 여성혐오이다. 강남역 살인사건과 같이 수면위로 드러나는 혐오는 오히려 걱정거리가 안된다. 사회에 만연히 퍼져있는 미지근한 차별의 언어, 수치심의 언어가 수많은 여성들의 정체성을 좀먹고 떳떳하게 살지 못하도록, 다시말해 여성 스스로가 자신을 '약자' 규정하고 그 한계를 분명하게 설정하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이건 비단 여성의 문제일까. '왜 그렇게 받아들여.' '농담이잖아.' '왜 그래 분위기 이상해지게.' 이 말 한마디에 마음이 불편했던 여성은 위로가 아닌 주변의 눈총을 덤으로 받게 된다. 남성은 모른다. 그들의 그 미지근한 말들이 어떻게 여성에게 작용하는지. 그 미지근한 말만큼이나 자신의 생각이 얼마나 미지근한지.

 가장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은 여성을 이해하는 학문인 페미니즘이 여성에 의해서만 소비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중요하다. 그렇지만 그렇다고해서 여성을 좀먹고 찢어놓는 말을 내뱉는 이들이 달라질게 전혀없다. 오히려 그 학문으로 인해 여성들은 자신들에게 행해지는 폭력을 더 명확하게, 분명하게 인지할 뿐이다. 아아, 언제까지 여성들은 짙은 새벽에 서서 자신을 등지고 있는 태양을 그저 희망하기만 해야할까.

 오늘도 무심코 지나가는 말 한마디 한마디를 상기시켜본다. 내 말이 누군가에게는 새벽을 상기시키고 있지는 않을까. 새벽이 새벽인지도 모르는 나는 오늘도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있지는 않을까. 언제쯤 남성들은 우리가 짙은 새벽에 있다는 걸 알 수 있을까. 언제쯤 여성들은 새해의 태양처럼 떠오르는 희망을 바라보며 미소지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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