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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쥬니킴 Dec 05. 2023

2014년 10월 이후, 달라진 것들 (1)

Rebirth #6 일기 쓰기

며칠 뒤 통원치료를 받아도 될 만큼 상태가 호전되었다는 검진결과를 듣고 나는 곧장 집으로 왔다.  

거의 2달 만에 집이었다.


최대한 안정을 취하며 엄마가 해주는 특별 보양식들을 먹으며 회복하는데 전념하는 일상을 보냈다. 목발이 없으면 걸을 수 없었지만 그래도 열심히 한 발짝씩 걷는 연습을 하며 재활에 힘썼다.

밥, 재활, 잠, 밥, 재활, 잠의 연속이었던 일상.


얼른 회복해서 학교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집에서 누워만 있으면 나는 더 우울해질 사람이니, 어떻게든 학교로 돌아가 이번 학기를 마치는 게 훨씬 나을 것 같다는 엄마의 특단 조치였다. 엄마가 생각보다 나를 너무 강하게 보는 것은 아닐까 밉기도 했지만, 사실 엄마도 예상치 못한 사고를 당한 후 다리를 다쳐 장애인이 되셨던 분이기에 엄마의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조언을 무시할 수 없었다. (내 앞에서 엄마가 눈물을 보인 적이 없는데, 아빠의 말에 의하면 엄마는 내 병간호 후 집에 가서 그렇게 우셨다고 한다. 엄마가 다리가 불편한 걸 나도 그대로 물려받게 된 것 같아 죄책감을 컸다고 한다. 우리 둘 다 그저 사고였을 뿐인데 말이다.)


힘껏 재활운동으로 하루를 보내고 나면, 자기 전까지 회복 및 쉬는 시간을 가졌다. 자연스럽게 사색에 잠길 수 있는 시간이 많았고, 종종 내가 살아온 인생을 회고하는 시간을 가지고는 했다. 아무래도 큰 일을 겪고 난 다음이라 더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 내가 만약에 진짜 죽었다고 치자.
호랑이는 가죽을 남기고 죽는다는데, 나는 무엇을 남기고 죽지?




아무리 생각해도 답을 내릴 수 없었다. 내 이름 석자를 제외하고 아무것도 남기는 게 없는 것 같은데..?

재학증명서..? 과제들..? 이런 거 말고 나는 무엇을 남기고 죽을 수 있을까?


아차 싶었다. 내가 살아있었다는, 나만의 증거물이 없다니.

내가 흘려보낸 소중한 기억들과 시간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이대로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채 죽을 뻔했다는 사실에 아찔했다. 물론 각종 사진과 서류들로 '나의 살아있음'을 증명할 수 있었지만, 내가 남긴 나만의 기록이 없다는 것이 매우 아쉬웠다. 이 땅에 발 붙이고 살았었다는 나만의 흔적. 그 흔적을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2014년 10월 1일 이후, 나는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눈이 오면 학교를 못 가고 집에만 있었다. 유난히 추운 겨울이었다.








1. 일기 쓰기


일단 있었던 일들을 영수증처럼 기록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무슨 글을 써야 할지 막막했다. 글이라고는 대학교 입학을 위해 써본 자기소개서가 전부였기 때문이다. 일단 몇 월 며칠에는 무슨 일이 있었고, 몸 컨디션은 어떤지, 오늘은 누구를 만났고, 어떤 음식을 먹었는지 모두 적어보기로 했다. 물건을 사면 영수증을 찍어주듯, 무엇이든 다 남긴다는 생각으로 하나씩 적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나 둘 적게 된 글들은 일주일, 한 달, 일 년 치의 기록이 되었고, 어느새 나는 하루의 시작과 마무리를 기록하는 '일기 쓰는'습관을 갖게 되었다. 하루하루 살아있다는 것을 누구에게 증명이라도 하듯 매일을 기록했다. 차곡차곡 쌓이는 기록들을 보며 뿌듯하기도 했다. 일기를 쓰며 그날 있었던 일들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다리가 불편했지만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며 맛있는 밥을 먹은 날이면 일기를 적는 내내 그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아 내가 살아있기 때문에 좋아하는 떡볶이도 먹을 수 있고, 좋은 사람들과
좋은 시간도 보내고 나를 위해 재활도, 운동도 할 수 있는 거구나.
하루하루가 너무 소중하고 감사하다'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더 나아가 '일기'는 내가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게 해 주었다. 살아있음을 증명하고자 쓴 기록들이 나에게 큰 활력을 주었다. 그때 죽지 않고 살아서 이렇게 행복한 일들을 기록할 수 있음에 감사했다.



2016.12.11 일기 중 일부 발췌
사고 이후, 바뀐 것이 있다면 '기록을 남긴다는 것'에 대해 굉장히 집착하게 되었다는 것.
이젠 하루라도 안 쓰거나 밀리면 몸이 간지럽다. 내가 어떤 감정으로 누구를 만나서 몇 시에 무엇을 했는지, 이런 사소한 것들에 대해 다 기억하고 싶다. 그때의 감정, 공기, 분위기, 머리, 옷 스타일, 음식이며 장소며 모두 다. 그 모든 것들 하나하나가 다 소중하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에 대해 하루를 마무리하며 기록하면 살아있는 느낌이 든다.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인지 일기장이 너무 소중하다. 올해도 나를 책임져줄 17년도 다이어리가 도착했는데 내년엔 어떤 일들로 기록될지 너무너무 기대된다! 내년도 잘 부탁해!






2022년도 다이어리는 어디로 갔을까.. 도저히 못 찾겠...



그렇게 2016년도부터 올해 2023년까지 총 10권 가까이 되는 기록들이 쌓였다. 여전히 일기 쓰는 시간은 나에게 하루의 가장 중요한 시간으로 차지하고 있고, 스스로 더 단단한 나를 만들 수 있는 습관으로 유지 중이다. 정말 무탈하기도 했고, 행복하기도, 슬프기도 했던 하루하루를 덤덤히 채운다. 오늘도 나는 살아있음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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