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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린숲 Aug 22. 2019

침전하는 마음

눈을 뜨자마자 눈꺼풀이 무거워, 이대로라면 오늘 컨디션은 글렀다, 생각하며 다시 눈을 감는다. 다시 눈을 감자, 또 잠들다 깨면 후회의 한숨을 쉬겠지, 벌써 후회가 몰려온다. 너무 환한 방에서 끈적한 땀과 함께 깨어나는 것을 싫어한다. 생각이 많은 눈꺼풀이 파르르르 떨린다. 지하철에서 눈을 감고 있을 때와 비슷하다. 눈은 붙여야겠는데 생각이 많다. 제대로 잠들 것이 아니면 차라리 일어나는게 낫다. 이도 저도 아닌 시간은 여기서나 저기서나 쓸모가 없다. 


순간의 모든 행동력과 결단력을 눈을 뜨는데 쓰고, 여력을 몸을 일으키는 데 쓴다. 아침 운동은 못 하겠다. 이미 내키지 않은 일을 온 힘을 다해 해버린 터라, 운동까지 할 의지력은 없다. 운동을 건너뛰는 바람에 늘 뭉쳐있는 어깨가 뻐근하다.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면 어느 정도 풀리는 것은 알지만, 조깅 만큼은 아니다. 역시나 샤워를 했어도 어깨는 여전히 뻐근하다.


배는 고프지 않지만, 배가 고프지 않다고 생각하는 동시에 뭔가를 먹어야겠다는 식탐이 차오른다. 먹는 것을 생각하자 배가 고픈 것도 같다. 아침 고정 메뉴인 아메리카노와 토스트 대신 라면 두 개를 끓인다. 밥이 없어서 두 개를 끓인다. 한 개만 끓여서 먹으면 늘 아쉽기 때문이다. 라면 두 개는 속을 더부룩하게 만들고 죄책감을 몰고 온다. 틀림없다. 뒷 일을 알고서도 두 개를 끓인다. 막을 도리가 없는 식탐이다. 본능을 제어하지 못했다는 자책을 입에 물고서 라면 두 개를 헤치운다. 


라면 두 개를 먹은 속이 기분 나쁘다. 시원하고 달콤한 것으로 나쁜 기분을 치우고 싶다. 냉동실에서 아이스크림을 하나 꺼낸다. 시원하고 달다. 시원하고 달콤한 시간은 짧고 더부룩한 속이 더 더부룩해진다. 아이스크림에 대한 죄책감이 기분 나쁜 라면 두 개의 꽁무니에 달라붙었다. 떼어 낼 수가 없는 기분이다.


떼어 낼 수 없는 기분을 모르는 척하기 위해 별 관심도 없는 드라마를 1화부터 10화까지 몰아서 본다. 아침부터 몰아 본 별 관심도 없는 드라마의 엔딩을 보자 하루가 다 끝나가려 한다. 아직 시작도 안 한 오늘인데. 머리가 지끈, 무겁다.


쌓여 있는 설거지를 한다. 오늘 한 행동 중에 제일 생산적이다. 드라마를 보는 동안 옆에서 야옹대던 고양이가 생각나 빗질을 하고 이빨을 닦인다. 고양이는 빗질과 칫솔질이 싫어서 몸을 비틀어댄다. 하려던 일을 마저 끝내기 위해 고양이를 강하게 붙잡는다. 고양이는 발톱을 세우고 나의 손을 할퀸다. 피가 난다. 나에게 화가 난다. 죄책감을 떼어내려고 자기만족을 위해 했던 일이다. 15년을 함께한 고양이다. 모를 리가 없다. 피를 보며 내가 자초한 일이다, 한숨 짓는다. 한숨 짓지 않기 위해 일찍 눈을 떴는데 결국 한숨을 짓고 만다. 이왕 나온 한숨, 크게 한 번 더 내쉰다. 


딱히 안 좋은 일이 있었던가. 그런 것도 아닌데 마음은 끝도 없이 움츠러든다.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 고양이도, 친구도, 가족도, 애인도, 나조차도. 


처음 겪는 기분이 아니라서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때 되면 오는 기분이다. 내일이나 모레쯤이면 떠나갈 것을 안다. 그동안은 내 안을 들여다본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기분이 이럴만한 이유는 늘 거기에 있다. 퉁퉁 부른 라면 두 개가 있든, 곰팡이가 핀 냄비가 있든, 꽉 막힌 욕조 구멍이 됐든, 뭐가 됐든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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