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한 알에 만원, 별 다섯 개 미슐랭 디저트를 만들며
생각 날 때마다 감상하는 영화 <리틀포레스트>를 보면서, 아, 저 밤조림은 무슨 맛일까, 늘 궁금했다. 밤조림을 만들며 흐르는 평화로운 시간과 분위기까지. 언제 곧 꼭 만들어 먹어야지 했는데, 최근에 드디어 밤조림을 만들었다.
구매한 생밤의 양이 생각보다 적어서 식재료마트 세 군데를 더 돌았는데도, 생밤을 더 구하지 못했다. 한 줌의 밤, 너무나 아쉬운 마음으로 밤조림 만들기 여정에 들어갔다. 먼저, 밤껍질을 까기 위해 생밤을 뜨거운 물에 한 시간 정도 불린다. 그날 저녁, 크리스마스 영화 한 편을 틀어 놓고 밤껍질을 깔 준비를 했다. 룰루랄라, 신나는 마음이 든다. 불린 밤 하나를 들었다. 칼을 쓰면 손을 다칠 것 같아서, 잼 나이프를 사용했다. 어라? 잼 나이프로는 불린 밤을 뚫을 수 없다. 이때부터 이미 알았다. 고난의 시작이구나. 한 줌의 밤이라서 참 다행이구나.
과도를 가져왔다. 잼 나이프가 들어갈 작은 틈만큼만 밤의 끝을 잘랐다. 잼 나이프로 밤껍질을 살살 벗겨내기 시작했다. 밤의 속껍질은 최대한 유지되어야 밤조림이 깨지지 않고 예쁘게 나온다. 그래서 힘껏 힘을 쓸 수도 없다. 너무 약하지도 세지도 않은 아귀힘을 사용하려니 손에 힘이 더 들어간다. 수저로 벗겨볼까. 예전에 제삿날 저녁, 할아버지가 밤껍질을 벗기던 생각이 났다. 수저를 가져왔다. 수저로 벗기다 밤에서 삐끗 미끌어져 손바닥에 수저가 콕 박힌다. 억, 아프다. 아, 맞다, 수저는 밤 속껍질 벗길 때 사용하셨었다. 다시 잼 나이프를 가져왔다. 밤이 불긴 불은 건가. 칼로 밤 끝을 살짝 잘라내고 그 틈을 잼 나이프로 파고들어, 속껍질이 상하지 않게, 살살인 듯 아닌 듯 밤껍질을 벗기기를 반복한다. 몇 개 벗겼지? 뭐, 아직 세 개? 포기할까. 포기하려면 빨리하는 게 낫다. 아니다. 그래도 시작한 일 끝은 보자. 저건 무슨 영화지. 방금 무슨 이야기가 지나간 거지. 영화를 되돌려 보기 반복하며 한 줌의 밤을 두 시간 넘게 깠다. 룰루랄라는 진작에 온데간데 없고, 내 퉁퉁 불은 손과 탈탈 털린 멘탈만이 남아있다. 기진맥진한 마음으로 깐 밤에 베이킹소다를 붓고 하루 동안 불려놓았다.
다음날, 불린 밤을 30분씩 두 번에 걸쳐 끓이고 헹구어 낸 후, 밤의 굵은 심지를 제거한다. 이때에도 밤의 속껍질을 최대한 정리해주면서 심지를 제거한다. 굵은 심지 제거하기는 다소 흡입력이 있다. 재미까진 아니더라도 소소한 중독성이 있다. 다행이다. 속껍질이 많이 상한 밤은 이 과정에서 몇 개 깨져버렸다. 깨진 밤을 먹어본다. 맛있다. 이대로 다 까서 먹어도 맛있을 것 같다. 결승선을 남겨두고 잠깐 이성을 잃었지만, 이내 정신을 붙잡고 굵은 심지를 모두 제거했다.
밤 양의 절반 정도의 설탕 넣고, 물을 자박하게 부은 후, 30분을 중불에서 끓인다. 10분 남겨두고 간장 1큰술, 청주 2큰술을 넣고 마무리한다. 청주가 없어서 대신 화이트와인을 넣었다. 다 졸여진, 뜨끈한 상태의 밤조림을 먹어본다. 밤의 자체의 고소함과 밤시럽의 달콤함, 간장의 적절한 감칠맛이 만나, 밤의 맛을 최상으로 끌어올렸다. 파는 맛밤보다 23배쯤 맛있다.
밤조림을 만들면서 영화 같은 시간과 평화를 얻을 수는 없었지만, 포기하지 않고 끝끝내 완성한 이 달콤함이 나의 리틀포레스트다. 상상했던 것과는 다른 포인트에서 환희를 느낀 나는, 결과적으로 행복했다. 내 안의 숲은 역시 맛있는 음식이면 빛이 든다. 별거 없이 소박하고 욕심 없는 나의 작은 숲. 우리의 숲.
애런에게 밤조림 세 알을 주며 말했다. 별 다섯 개 미슐랭 레스토랑에서 나오는 디저트야. 밤 한 알 당 만원이야.
밤조림의 온전한 맛을 느끼기 위해, 따뜻한 차와 함께 아끼고 아껴 먹고 있다. 밤조림 한 병이 냉장고 한구석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든든한 일이다. 냉장고에서 세달 동안 숙성하면 더 맛있는 밤조림이 된다고 하는데, 그때까지 남아 있을지는 의문이다. 어찌 되었건, 앞으로 밤조림을 다시 만들 일은 없을 것 같다. 밤조림을 만든다고 리틀포레스트는 아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