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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경채 Feb 27. 2019

우리 회사로 오지 마세요, 제발

월가로 온 초능력자들

악명 높은 뉴욕 월스트리트에서 한국 여자로 살아가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같은 회사에 근무하는 동기들과는 다르게 좀 특이한 경험들을 할 기회가 많았다.


[다양성]이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매우 중요한 미국에서는 많은 회사들이 MBA 학생들을 인턴 혹은 풀타임으로 채용할 때 별도의 특별전형들을 운영한다. 흑인 학생들을 의한 특별전형, 라틴계 학생들을 위한 특별전형, 인디언 부족의 후예들을 위한 특별전형, 성소수자를 위한 특별전형 등.


이 모든 종류의 특별전형들은 그 취지에 맞게 비슷한 배경, 혹은 비슷한 [특별함]을 갖춘 면접관들이 그룹을 이루어 채용할 사람들을 선별한다. 문제는 월가 투자은행의 경우 백인 남자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특별함]의 정의는 의외로 굉장히 간단하다. 즉, 백인 남성이 아닌 사람이 특별한 사람이다. 여자인 데다가 심지어 동양인인 Associate (주로 MBA를 마치고 월가로 들어올 때 주는 직급)은 투자은행 본부 전체를 통틀어 단 한 명도 없었다. 나는 유니콘이었다. 그렇게 특별할 것도 없는데 [특별한] 사람으로 분류된 나는, 회사의 거의 모든 특별전형 채용에 다 투입되었다.


가장 황당한 상황은 내가 Veterans 특별전형, 즉 미군으로 군생활을 하다가 그만두고 MBA를 온 친구들을 위한 채용 과정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동양 여자가 이 업계의 특별한 프로파일이라는 이유로 백인 남자들이 대부분을 이루는 Veterans 집단의 리크루팅에 투입되는 아이러니함이란.


뭐 과정이야 어찌 되었건 MBA를 하면서 미군을 하다가 온 친구들을 만날 기회가 많이 있었고 그들의 애국심과 리더십을 상당히 높게 평가했기 때문에 이 상황에 대해 크게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업무적인 지식은 와서 배우면 되기 때문에 주로 지원 동기, 리더십 경험, 전반적인 상황 판단 능력 등을 집중적으로 지원자들에게 물어보았다.


문제는 의외의 곳에 있었다. Veterans 전형 지원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들어볼수록, 또 그들이 면접을 잘하면 잘할수록, 우리 회사는 고사하고 이 업계에 오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우리 회사나 이 업계를 “까려는” 이야기가 절대 아니다. 한 가지 가장 기억에 남는 예를 들어보겠다.


미군으로 10년간 있었던 존이라는 친구를 전화로 인터뷰했다. 레주메를 제대로 볼 시간이 없었던 나는 늘 하는 자기소개 질문을 생각 없이 던졌다. 존은 미국 공군의 비행 조종사였는데, 평범한 조종사가 아니었다. 그는 미국 국방부에서 개발하는 최첨단 비행기들을 가장 최초로 비행하며 극한 환경에서 비행체를 “스트레스 테스트”하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즉, 쉬운 말로 비행기 부서지나 직접 조종해서 실험해보는 사람이었다. 신형 비행기의 극한 기온 테스트를 위해 혼자 남극 대륙을 3일간 비행한 적도 있고 극한 압력을 테스트하기 위해 우주 대기권과 성층권 사이의 애매한 초고도에서 장기간 비행한 적도 있다고 한다. 자신은 힘든 상황을 잘 견딜 수 있고 군에 있을 때 100명 정도의 조종사들을 직접 비행하며 이끌었기 때문에 리더십도 있다고 했다.


비행기 조종석에 앉아있는 존을 상상해보다가 지금 내가 앉아있는 Madison Avenue, 36층 구석의 자리에 양복을 입고 앉아 코딱지만 한 엑셀 칸에 정신적으로 갇혀있는 존을 상상해본다. 이 사람을 내가 평가한다는 것 자체가 어이가 없고 과연 이런 사람이 월스트리트에 오는 것이 지구에 해가 되지는 않을까 갑자기 차원이 다른 고민을 하게 되었다. 슈퍼맨을 잡아다가 책상에 앉히면 이런 느낌일까? 이런 케이스는 너무 많았다. 해양 연구원, 원자력 에너지 박사, 인질극 협상 전문가 등. 당신들은 제발 그 능력으로 지구를 위험에서 구하고 핵노잼 회사원 일은 초능력 없는 나 같은 사람에게 맡기란 말이다!


물론 월가에 출사표를 던진 그들도 그들만의 이유가 있다. 아무도 대놓고 말은 안 하지만 금전적인 이유가 많고, 군에서도 오래 하지 못하는 high stress 직무에 지친 경우도 많다.


내가 그들을 감히 평가한다는 사실 자체가 우습지만 또 내가 뭐라고 오지 말라고 유난을 떠는 것도 우습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최대한 공정하게, 그리고 회사와 약속한 대로 정직하게 사람을 판단해서 뽑되, 그 사람들이 본인에게 맞는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정확한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다. 그래서 인터뷰 마지막에 늘 5-10분을 남겨놓고 Investment Banker (투자은행가)라는 직업의 좋은 점과 나쁜 점을 최대한 정직하게 전달하고자 했다.


당시 내가 채용했던 미군 출신 친구들은 지금까지도 연락하는 사람이 많다. 월가에 남은 친구들도 있고 떠난 친구들도 많지만 그들은 이 직업의 양지와 음지를 모두 다 말해줘서 고맙다는 이야기를 한다. 이 직업을 오버셀 (Oversell: 과도한 영업)하는 것이 너무 당연한 월가에서 들어본 적이 없는 말이라, 처음에는 좀 미친 사람인 줄 알았다고 한다.


월급쟁이가 되려는 미국의 슈퍼맨들, 지구를 위해 말리고 싶지만 초능력이 밥을 먹여주지는 않는 현실이라 씁쓸하다. 쓰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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