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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seudomin Oct 27. 2017

칼륨을 기억하나요?

실습 일기

원소기호 19번. 칼륨. 포타슘. 나는 고등학교 때 칼륨이라고 외웠다. 알칼리 금속이라는 것 외에 특이한 사항은 없었다. 고등학교 때에는 주기율표 20번까지의 원소 중에서 19번 원소를 볼 일은 거의 없다고 생각했다. 본과 1학년 때, 소듐-포타슘 채널(Na-K channel)을 배우게 되고, 하는 일이 없지 않은 원소라고 느꼈다. 지금은 칼륨이 화학 검사에서 두 번째로 등장하는 중요한 원소라고 발표 준비 때마다 느끼고, 높을 때와 낮을 때 감별할 질환들에 대해서 외워 두고 있어야 한다. 생각해 보니, 고등학교 때 칼륨은 식물의 필수 영양소에 있었고, 사람에게 꼭 필요한 원소라고 배운 기억이 날 듯하다. 그다지 필요가 없어서 기억 저편으로 밀어 두었지만.


본과 2학년 학습과정에서 신장내과는 빠르게 끝내고 넘어가는 과목이었다. 이미 너무 지쳐 있었고, 특히 뇌가 신장내과의 많은 지식들을 이해하기에는 과부하였다. 그렇게 임기응변으로 과목을 마무리하고, K(이제, 포타슘이라고 하자.) 정상 수치를 기억도 못한 채 본과 3학년으로 넘어갔다.


다행히, 신장내과 실습 전까지 포타슘 수치가 나를 괴롭힌 적은 없었다. 인계되고 있는 발표 파일에 포타슘 수치를 적으면 되었다. 화학 검사 슬라이드의 첫 수치는 소듐(Na), 두 번째는 포타슘(K)이었고, 대부분은 정상 범위였다. 시간은 나를 기다려주지 않았고, 그렇게 신장내과 실습이 다가오고 있었다.


포타슘을 정말 기억하나요?


본과 2학년 때의 기억으로는 감별진단을 암기하는 데에만 수많은 시간을 쏟았는데, 본과 3학년 신장내과 실습을 돌면서 국가고시 대비 책을 보니 꽤 많은 페이지가 서론이었다. 신장내과는 다행히 학생들이 무지하다는 사실을 알고 자습시간을 많이  주어 충분히 볼 시간이 있었고, 그제야 소듐과 포타슘이 왜 그렇게 중요한지를 알았고, 포타슘이 낮거나 높다면 생명에 치명적이다고 느끼게 되었다.


포타슘은 신장으로 배설된다. 신장이 좋지 않은 사람들은 포타슘 배설이 되지 않고, 포타슘이 저류하게 되어 고칼륨혈증이 생기게 된다. 심한 증상은 근육마비, 호흡부전이다. 심장에 문제가 생긴다는 점은 환자의 생명과 직결되고, 이를 막기 위해 칼슘 그루코네이트를 처방하게 된다. 고칼륨혈증으로 인한 심장의 과다 흥분을 억제. 심정지을 예방. 만년 족보에 해당하는 내용이다.


일반인들에게 특이한 점 두 가지. 첫째, 우리 몸의 전해질과 무기질이 낮아서 생기는 질병은 많이 들어 보았는데, 높아서 문제가 된다고? 둘째, 칼륨이라고 들렸는데 처음 들어보는 말이고, 칼슘은 알겠으니까 아마 칼슘에 문제가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외래 때 자주 이런 질문이 나온다. "칼슘 보충제는 먹고 있는데, 왜 문제가 될까요?" 다시 처음부터 설명드려야 하는 것은 교수님의 몫이다. "칼슘이 아니라 칼륨이에요. 적어가세요. 칼. 륨." "낮아서 문제가 아니라 높아서 문제예요. 이제 나이도 있으시고, 신장 기능도 좋지 않으셔서 배설하는 데 문제가 있어요. 여기 칼륨이 많이 들어가 있는 음식 표를 드릴 테니, 주의해서 드세요."


나이가 들면 그래.


원래 이 글로 생각해두려던 제목이었다. 논란이 될까 봐 접어주었다. 나이가 들면 신장이 안 좋아지고, 신장내과의 환자들은 꽤 고령화되어 있었다. '나이가 들면 그래'의 이유가 하나 더 있었는데, 나이가 들면 기억력이 줄어든다.  교수님께서 하시는 5분간의 말씀을 잘 기억하지 못하게 된다. 처음은 그럭저럭 기억했지만, 마지막으로 갈수록 기억하지 못한다. 진료의 마지막은 보통 환자에게 자택에서의 행동을 당부하고, 기억하지 못하게 된 환자는 주위에서 건강음식이라고 칭하는 음식들을 먹게 된다.


외래 참관 중 꽤 안타까운 할아버지가 진료를 들어왔다. 그의 포타슘 수치는 정말 높았다. 교수님께서 지난번보다 안 좋아지셨어요,라고 운을 떼자, 옆에 계셨던 할머니께서는 지난번에 이 양반이 건강이 안 좋다고 해서 식물을 갈아서 먹여 주었는데 왜 그럴까,라고 하셨다. 아, 정말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셨구나. 초록 식물은 포타슘 수치를 올리게 하는 데 치명적이다. 교수님께서는 포타슘 수치가 높거나 높아질 가망이 있는 모든 환자에게 해 주시는 포타슘이 많이 들어간 음식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시고, 녹색 채소를 먹지 말 것을 권하였다. 이러다 진짜 응급실에 오세요. 제 말 꼭 들으셔야 합니다.라고 걱정하는 말과 함께.


조심히 들어가세요.


기억력이 희미해져 가는 할아버지께서는 걱정 가득 조언을 해주시는 교수님에게 인사를, 그리고 나에게도 인사를 해 주셨다. 실습 중 처음 받아보는 90도 인사였다. 교수님께서는 부부가 나간 후, 어떻게 저럴 수 있냐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안타까움과, 건강해졌으면 하는 바람이 섞여 있을 것이다. 비록 그 할아버지를 뵐 일이 없을 것이지만, 오래오래 건강하셨으면 좋겠다.


P.S 꽤 오래 동안 적으려고 생각한 경험이었고, 그동안 글의 구상을 못 해서 전전긍긍했다. 읽어보니 그래도 걱정했던 것보다는 말끔하다.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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