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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꼭그래 Jan 27. 2020

고흐, 영원의 문에서

고흐, 영원의 문에서


윌리엄 데포 주연의 영화 “영원의 문에서”는 고흐 만의 채색 기법이 완성되어 가던 아를 마을에서 시작해서 그의 마지막 생의 끝에서 머물렀던 오베르 쉬르 와즈 마을까지의 행적을 보여준다. 익히 알려진 고흐의 불행과 예술에 대한 열정과 정신 착란과 고갱과 마을 사람들과의 갈등을 보여준다. 이 영화에서 특별한 점이라면 고흐를 연기한 윌리엄 데포의 연기와 고흐가 생전에 눈과 마음에 담았던 프랑스 아를 마을의 모습을 보여주는 정도다. 너무나 잘 알려진 고흐의 일생이기 때문에 딱히 새로울 것도 없으며 영화적 허용에 기댄 몇 가지 사실에 관한 왜곡도 있다. 딱히 추천할 만한 영화는 아니다. 그럼에도 이 영화를 기회 삼아 고흐를 말해 보고자 한다. 

울고 있는 노인 : 영원의 문에서, 1890년

고흐가 죽기 두 달 전 생레미 요양원에서 완성했다고 추정되는 “울고 있는 노인: 영원의 문에서”라는 그림에서 영화의 제목을 가져왔다. 1882년 무렵 헤이그에서 모델이 되어 준 아드리아누스 야코부스 자더란드라는 참전용사이면서 전쟁 후유증으로 고통받던 노인의 스케치를 1890년 생레미 요양원에서 다시 그려 완성한 그림이다. 오래전 스케치와 그림이 다른 점이라면 노인의 무릎 옆 모닥불 뒤에 그려진 작은 문(영원의 문)이다. 울고 있는 노인의 처지와 심정과도 같았던 생레미 요양원 시절의 고흐 자신을 그려낸 것으로 생각된다. 아마도 동생 테오에게 자신의 심정을 알려 생레미 요양원에서 나가게 해 달라는 편지 같은 그림이다. 영화는 고흐의 이런 심정을 보여주려는 의도로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영화의 촬영 방식은 고흐의 모습을 탐색하면서 고흐가 세상을 보는 시선이다. 시선이 시작되는 곳은 파리다. 파리에서 만난 고갱이 추천한 아를에 도착해 자기 신발을 그리는 것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신발 그림에 등장하는 신을 고흐의 것이라 주장했던 샤피르와 농부의 것이라며 작품을 해석했던 하이데거의 논쟁에서 감독은 샤피르의 손을 들어주는 것으로 영화를 시작한다. 고흐의 시선을 따라 그가 보았을 모습을 담겠다는 의도였지만 아쉬운 점이 많이 보인다. 고흐가 아를에 도착한 이유도 영화와는 다르게 고갱의 제안도 아니었으며, 아를에 도착한 시기도 눈 내린 겨울이었다. 그 겨울이 선사한 하얀 눈에 대비된 짙푸른 하늘색에 반해서 아를에 머물게 된 것이다. 단 몇 분 만에 영화의 내용에 의구심을 갖게 되면서 볼 이유를 잃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인내력을 발휘해 끝까지 감상하게 하는 것은 영원의 문 너머로 고흐를 어떻게 인도하는지, 윌리엄 데포라는 이 시대 최고의 배우의 연기를 보는 즐거움과 아를의 풍경이 고흐에 의해 어떻게 창조되는 지를 보고 싶은 작은 열망 때문이다. 이 글은  영화와는 다르게 고흐의 전반기 생을 다룰 생각이다.  


아를 이전의 고흐


화랑을 운영하는 세 숙부와 화랑에서 6년간 사원으로 일했던 고흐에게 그림은 너무나도 친숙한 것이었다. 친숙하다고 해서 그림에 고흐만큼 집착했던 화가는 없었다. 왜 그랬을까? 아버지 테오도로스 반 고흐는 아들 빈센트가 자기처럼 목사가 되기를 바랐던 것 같다. 하지만 가난 때문에 학비를 낼 수 없던 고흐는 열 다섯 나이에 학교를 그만두게 된다. 그런 고흐에게 어머니는 예술과 함께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바랐다. 숙부의 소개로 화랑에서 6년간 일하면서 두 번의 청혼 실패로 인해서 좌절하게 된다. 고흐를 위로한 것은 그림이나 새로운 사랑이 아니라 성서였다. 성서를 탐독한 뒤에 그림에 대한 생각은 급진적으로 바뀌었다. 자본가들의 탐욕스러운 화폐 정도로 인식하게 되면서 고객과 동료 직원과 마찰을 빚게 되고 화랑에서 해고된다. 이것이 아버지와의 심한 갈등이 시작된 계기였다. 자기처럼 종교인으로 키워낼 재정적 지원을 하지 못한 자책감과 어머니가 바란 예술작품과 함께하는 삶 모두가 망가지게 된 것이 자신의 마음을 아프게 했고 고흐에게 고압적인 태도로 나타난 것이라 보인다. 그럼에도 고흐는 화랑으로 돌아가는 것보다 아버지처럼 종교인이 되고자 했다. 신학 학교에 입학하고 1년 만에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학교를 그만두고 광산으로 향한다.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 정도의 헌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는지 너무나도 사람들에게 헌신적이었다. 하지만 그 모습은 도움을 받는 광부들은 물론이고 종교인들과도 갈등을 빚게 된다. 광산에서도 쫓겨나게 된다. 집으로 돌아온 고흐는 자신의 좌절을 이번에는 그림으로 위로받는다. 아버지는 자신처럼 종교인의 삶을 살아가기를 응원하려 예배에 참석하게 하려 했지만 고흐는 거부한다. 이것으로 아버지와는 끝내 화해하지 못한다. 결과론적인 말이지만 이들 부자의 엇나간 사랑은 다른 것으로 결실을 맺기 위한 갈등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마음만으로 화가가 되겠다고 결정한 것은 아니었다. 그림을 그릴 비용과 재능이 부추겼을 수도 있다. 거울의 대중화와 안료의 가격 하락이라는 현실적인 이유도 한몫했다. 안료는 값비싼 것이었고 그림을 그리려면 후원을 받거나 잘 팔리는 그림을 그려야 했다. 그림에 재능이 있어서 화가가 되고 싶으면 일정한 수업료를 지불하고 안정적으로 안료를 사용하고 모델의 데생을 그릴 수 있는 아카데미에 입학하는 방법이 최선이었다. 그런데 고흐가 그림에 관심을 가지던 시기에 화학 안료가 개발되어 안료 가격이 하락하던 시기였고 안료는 튜브에 담겨 새로운 풍경화 시도가 가능했던 시기와 맞물린다. 풍경화는 야외에서 스케치를 하고 화실 안에서 기억을 통해서 채색해 완성해 내는 것이었지만 자연을 직접 보고 그릴 수 있게 되면서 화실은 작아질 수 있었다. 또한 거울을 통해서 자신을 모델로 자화상을 그릴 수 있게 되었다. 전신 거울처럼 커다란 거울은 보석과 마찬가지로 고가였지만 대량 생산된 작은 손거울은 상대적으로 낮은 가격이었으며 비싼 모델을 고용해서 데생 작업을 할 필요 없이 자기 모습을 그릴 수 있게 되면서 모델 데생 연습 비용을 절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안료 가격과 새로운 시도가 가능했다는 점은 고흐를 그림으로 인도한 결정적인 요인은 아닐 수 있다. 여전히 물감 가격은 비쌌으며(지금도 그렇지만) 후원자였던 동생 테오에게 죽기 직전까지의 편지에서도 미안함을 말해야 했을 정도로 여전히 그림은 가난으로 그려내기 힘든 것이었다.


그림에 대한 열망은 아버지와 어머니를 동시에 만족시켜주기 위한 종교적이며 예술적인 것으로 생각했을 수도 있으며 자기 내면의 탈출구로 선택했을 수도 있다. 또한 명성을 실현시키기 위한 욕망이었을 수도 있다. 화가로서의 성공은 화랑의 점원을 하면서 충분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예술을 거래를 통해서 재산을 쌓는 것에는 종교적인 이유로 거부감을 갖게 되면서 그림을 거래하는 사람이 되는 것보다는 생산하는 사람이 되고자 했을 수도 있다. 테오에게 보낸 편지의 한 구절을 보면, “화가들 중에는 좋지 않은 일은 결코 하지 않고, 나쁜 일은 결코 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 화가는 예술인이면서 종교인이라는 이상적인 사람으로 생각했을 수도 있다. 거기에 명성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은 화가라는 직업에 커다란 매력을 느끼게 해 줬을 것이다. 그림에 대한 순수한 열정만이 아니라 개인적 이유와 욕망도 그림에 빠지게 된 이유였을 것이다. 


아를 이전의 그림


어떤 이유로든 화가가 되겠다는 결심을 했더라도 그가 그림에 재능이 없었다면 시도하려 하지 않았을 것이며 동생 테오의 지원을 이끌어 내지 못했을 것이다. 테오가 여동생 윌에게 보낸 편지에는 고흐의 시각은 미술계의 새로움을 안겨줄 것을 확신을 하고 있었다. 고흐 또한 자신의 그리기 재능이 화가가 되기에 충분하다고 판단했으며 재능 이상의 무엇을 그림으로 표현해낼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런데 고흐를 다룬 영화들이 습관처럼 그의 불행한 삶에서 극적인 서사를 끄집어내어 그의 명성을 높이려 한다. 하지만 고흐는 살아있는 동안 그림 자체만으로 평가받기를 원했다. 그럴 만하고, 그래야 한다. 그는 누구나 알고 있듯이 화가이기 때문이다. 그림에 눈을 뜨기 시작하던 시기부터 진정한 화가의 길을 가려는 결심을 하게 되는 아를(Arles) 이전 파리(Paris)까지 고흐의 그림에 대한 탐구가 어떻게 변해 왔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영화에서 이 부분을 너무 소홀히 다루기에 고흐의 작품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못마땅한 부분일 것이다. 


고흐가 생전에 판매한 그림은 숙부에게 판 20여 점의 스케치와 아를에서 그린 “붉은 포토밭”이라는 유화 그림 한점뿐이었다. 화랑의 수습사원 때 스케치 이 십장을 숙부에게 판 것은 사원이라면 시도해 봄직한 것이었다. 고흐가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려 한 시기는 대략 광산에서 쫓겨난 뒤 우울함을 달래기 위해서 시작한 것으로 생각된다. 부모에게 돌아간 시기에는 그림에 완전히 빠져 데생을 하루 종일 하게 됐다고 테오에게 보낸 편지로 확인된다. 여러 차례의 사랑의 실패와 종교적 헌신에 대한 배신감으로 크게 낙담했으며 그 자리를 그림이 위로해 줬을 것이다. 

토탄을 줍는 사람들 ,1883년


1879년에 고흐는 아카데미 입학생처럼 데생과 스케치로 화가로서의 도전을 시작한다. 처음 채색을 한 시기는 1881년이었다. 데생에 많은 시간을 쓰기는 했지만 이따금 수채화로 색칠하는 작업도 시도했다. 1882년 8월 15일 유화물감과 붓을 구입해 유화를 처음으로 그려 낸다. 하지만 기본기를 중요하게 생각해서인지 정물화 위주로 연습했다. 고흐의 초기 스케치와 정물화, 수채화를 보면 자연과 인간을 따로 그렸다. 자연은 신성함으로 창조된 신적인 공간이며 인간을 그 공간에 신앙심으로 결합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 것 같다. 특히 1882년에는 접하게 된 상시에의 "밀레 전기"가 고흐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자연은 신앙적 명상의 대상으로 그린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와 매우 비슷하게 그려졌지만 그림 안의 사람은 밀레의 내용과 시선으로 그려졌다.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가 사람을 구도자나 여행자, 탐험가로 그렸다면 고흐는 그 안에 머무는 사람으로 그려냈다. 밀레의 그림처럼 신의 영원성에 순종하며 머물러 있는 영혼을 그려낸 것이다. 고흐의 초기 그림은 낭만주의 화가였던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종교적인 자연에 사실주의 화가인 밀레의 노동으로 신에게 헌신하는 사람들을 담으려 했던 것이다. 그런데 "감자 먹는 사람들"을 그려낸 뒤에 색채 표현이 중요하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그림에 만족하기는 했지만 색은 자연과 사람에게 더 높은 차원의 무언가를 제공해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고흐가 원하는 그 색을 찾아내기 위해 앤트워프로 향한다. 


고흐는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연의 한 구석과 그 자연에 더해진 인간을 가장 잘 이해하게 하는 극적인 효과를 나타내는 색을 찾아내고 싶다고 말한다. 과거 예술가들의 방식으로 색을 검토해 보기 위해서 앤트워프 미술아카데미에 입학하게 된다. 하지만 신경과민으로 그만두게 된다. 이 시기에 그를 가장 괴롭힌 것은 색채만이 아니었다. 팔리지 않는 그림으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이 더 큰 문제였다. 당시 테오의 지원을 받기는 했지만 사원의 수입으로 고흐의 생활비를 대기에는 벅찬 것이 사실이었다. 그래서 마음 맞는 화가들과 공동생활을 하면서 생활비와 작업비를 나눠 부담하면서 지속적으로 창작 활동을 지속하고자 화가들이 모여드는 프랑스 파리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인상주의라는 새로운 색채 주의자들을 만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파리에서 고흐는 희망과 낙담을 동시에 경험해야 했다. 인상주의 화가들의 색 사용법에 수긍하고 새로운 색 사용법임을 확신하고 그렇게 그려야겠다는 마음을 갖게 되지만, 그림을 구매할 사람들의 평가는 박했다. 그리다 만 그림이라는 대중과 비평가들의 평가에 낙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고흐는 인상주의에 미래의 시선이 있다고 확신했다. 인상파 화가들과 일본의 우키요에의 구도와 색채에 빠지게 된다. 색으로 생명을 표현해야 한다는 것에는 인상주의 화가들과 같은 생각이었지만 표현에서는 생각을 달리했다. 인상주의 화가들에 영향을 받으면서도 고흐 자신만의 색채를 완성하고픈 열정이 자리 잡게 된다. 인상주의에 우호적이지 않은 파리의 대중과 비평가와 화가들에 실망한 고흐는 파리를 떠날 결심을 한다. 또한 고흐가 생각한 화가 공동체를 만들기에는 파리는 지출이 많은 곳이었다. 지출이 적은 시골지역으로 인상주의 화가들을 불러 모아 화가 공동체를 만들 생각을 했다. 다행히 동생 테오가 사원에서 화랑 점장이 되면서 지원해줄 수 있는 돈에도 여유가 생기게 되고 지출만 줄인다면 화가 공동체를 실현시킬 수 있다고 확신했다. 1882년 2월 고흐는 아를에 도착한다. 아를의 땅은 아직 엷게 눈이 쌓여 있었고 하늘은 무척이나 푸르렀다. 고흐의 최고 걸작들이 탄생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를에서의 감각적 경험을 통해서 영원한 빛깔을 완성하는 순간을 영화 “영원의 문에서”에서 함께 하기를 바란다.

이 영화에 실망할 부분이 많기는 하지만 얻을게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고흐의 내면을 표면으로 끌어올린 윌리엄 데포의 연기와 프랑스 아를이라는 공간을 통해서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나 프랑수아 밀레가 아니라 고흐라고 불려지는 한 예술가가 탄생하는 순간을 상상하게 해준다. 어쩌면 영화를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상상으로 고흐를 각자 나름대로 그려보는 시간이 될지도 모르겠다. 고흐는 그렇게 생겼었고, 나는 어떻게 생겼을까. 윌리엄 데포가 우리에게 전해주려는 것은 그것일지도 모른다. 내면의 심정을 살갗으로 드러내 보고 우리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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