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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가람 Apr 24. 2018

역류

아카이빙

여자 친구가 가까운 곳으로 이사를 왔다. 대충 걸어서 10분 정도 거리로.


가끔 여자 친구가 너무 바쁘거나 피곤해하는 날은 집에 가서 간단한 집안일을 해주고 오는데


보통 빨래, 설거지 혹은 청소 같은 게 내 주 업무다.


최근에 니트 하나를 손바닥만 하게 만든 뒤로는 몇몇 세탁물들은 손빨래를 한다.


여자 친구는 자기 옷이 손바닥만 해져서 못 입게 되었는데도 


손바닥만 해진 옷이 귀엽고 뭔가 웃기다고 키득키득 웃었다.


여자 친구가 웃는 걸 볼 때마다 경구나 비경구 투여보다 더 효과 좋고 흡수 빠른 투여법이 있다는 생각을 한다.


몇몇 사람들의 미소는 나에게 보는 약이다. 내 불안한 정신세계를 위해 먹어대는 약들보다 더 효과가 좋다.




오늘은 세면대에서 손빨래를 하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이 생각을 나열하려고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여자친구 옷은 이렇게 정성스레 손빨래를 하는데.. 내가 부모님의 옷을 한 번이라도 손빨래해드린 적이 있을까?


생각해보면 여자 친구보다 훨씬 더 많이 부모님은 내 더러움을 씻어내주었다.


그게 옷에 묻어있던 식기에 묻어있던 방안에 묻어있던 나 자신에게 묻어있던 어디 묻어있던 간에.


반면에 나는 왜 부모님의 더러움을 피하고 외면했을까.


여름날 일터에서 돌아온 엄마의 땀내 나는 옷들


나는 그 옷 앞을 자주 숨 참으며 지나쳤다.


세탁기에 집어넣고 전원 버튼 한번 동작 버튼 한번 누르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닌데


피곤해하는 엄마에게 다정하게 구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닌데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닌 것들을 왜 이리 못하고 살았을까.


그렇게도 많은 사랑을 부모님께 내려받았으면서


나는 왜 그 사랑을 역류시키지 못했나.


늘 내가 그래도 나름 효자지. 내가 그래도 나름 괜찮은 아들이지.


스스로 생각하고 사는데, 지나고 보면 언제나 이런 쓰레기가 따로 없다.


사실 나는 엄마의 옷에서 나는 땀냄새가 뾰족하게 느껴졌다. 그 냄새는 내가 만든 뾰족함이다. 


그 냄새는 내 학비가 내 음식이 내 옷이 되었다. 


그 냄새는 어쩌면 사실 나에게서 풍겨 나오는 것이다.


나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내가 아무리 깨끗하게 씻어도 


그 냄새를 맡고 지나친 날이면 나는 하루 종일 마음이 땀내에 절어있는 것이다.


내가 외면했던 건 부모님의 더러움이 아니라 그냥 더러운 나였다.


사실 나는 내가 쓰레기라는 걸 받아들이기가 싫었다.


가난한 집안에서 취업도 빨리 안 하고 하고 싶은 거 다 해보면서 막 살아가며 


꿈을 좇는다는 핑계로 현실을 가꾸지 않던 것을 정당화했던 시간들


그 비겁하고 더러웠던 시간들도 부모님은 자신의 땀으로 나를 씻어주고 있었다.


그래서 난 그 땀냄새가 무서워서 늘 숨을 참았다. 


엄마옷을 지나칠 때마다 참았던 숨.


그때 참았던 숨들이 미안한 마음에 하나로 뭉쳐 길게 숨이 막힌다.




나는 늘 부모님이 내게 내려준 사랑만큼 다시 부모님께 역류하고 싶다.


그러나 이 역류는 간절하나 단어의 태생을 이겨내기가 늘 어렵다.


오늘도 아래로만 흘러 내려가 버린 내 사랑의 하류에서 


나를 키워내 준 상류를 바라보며 사랑과 존경을 가득 담아 쓴다.


며칠 뒤 부산에 내려가면 부모님의 옷을 빨아드려야겠다.


부모님의 미소를 보고 싶다. 몇몇 사람들의 미소는 나에게 보는 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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