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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겸 Mar 23. 2021

영화 <미나리>, 욕망과 불가항력 사이에서 계속되는

많은 이들이 이 영화를 이민 1세대의 신산한 삶에 관한 영화라고 말한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 한인 가족이 이민자로서 겪는 고충은 그다지 두드러지지 않는다. 그들은 미국에서 가장 보수적일 수 있는 공간인 '백인들이 가득한 교회'에서도 별다른 차별 없이 환대받는다. 중년의 백인 남성을 노동자로 고용하기도 한다. 사실 내게 <미나리>는 일종의 공포 영화였다.

<미나리>는 시종일관 불길한 사건을 예고한다. 공포 영화가 복선을 깔듯 촘촘하게 불안의 씨앗을 심는다. 아칸소로 가족이 이사 온 첫날, 그곳엔 토네이도 주의보가 발령된다. 아들 데이빗(앨런 김)의 심장은 그가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약하다. 순자(윤여정)와 데이빗이 자주 들르는 물가엔 뱀이 산다. 영화 내내 금방이라도 어떤 사건이 터져버릴 것 같은 긴장감이 유지된다. 그런데 이상하다. 결국 예상했던 일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 토네이도는 그날 이후 소식이 없다. 데이빗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멀쩡하다. 뱀은 그 모습을 드러내지만, 이내 사라진다. 이 모든 게 맥거핀인 것일까? 대체 왜? 해답의 열쇠는 뱀이 사라지자 순자가 한 말에 있다. “데이빗아, 보이는 건 무서운 게 아냐. 감춰져 있는 게 진짜로 위험한 거야”


그녀의 말처럼 진짜 위기는 예상치 못했던 순간에 갑자기 그 정체를 드러낸다. 데이빗이 아니라 순자가 갑자기 뇌졸중으로 쓰러진다. 키우기 어려울 거라 예상했던 농작물은 제이콥(스티븐 연)의 걱정과 달리 쑥쑥 자란다. 대신 어느 날 갑자기, 몽땅 전소된다. 나타라리라 예상했던 위험은 싱겁게 지나가고, 감춰져 있던 위기는 불쑥 고개를 내민다. 그래서 내게 이 영화는 공포 영화였다. 의지를 가지고, 머리를 쓰면 모든 걸 극복할 수 있다고 믿는 한 남자와 그에게 닥치는 불가항력적인 사건, 그리고 그 통제할 수 없는 것을 대면하며 느끼는 무기력에 관한 공포영화였다. 모든 공포는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것이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이라면 공포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좀비도 결국 그런 것 아니었나.


그래서 사람들은 그 공포를 극복하려 각자의 방식을 총동원해 세상을 이해하고, 통제하려 한다. 종교에 기대고, 과학을 연구한다. 때론 제이콥처럼 자신의 의지와 지성을 과신하기도 한다. 그런데 실제 이 세상은 어떤 드라마나 영화보다 개연성이 없다. 그래서 아무리 철저한 대비를 해도 어떤 순간엔 예상치 못한 시련과 고난을 마주하곤 한다. 그래서 종교든, 과학이든, 의지든, 지성이든 그것들에 대한 절대적 믿음은 자주 실패와 좌절로 끝나버린다. 그래서 나는 이해와 통제에 대한 환상을 품는 대신 차라리 삶은 언제나 모순 투성임을 인정해버리는 편이 낫다고 믿는다.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그 자체로 온전히 받아들이려 노력할 때, 내가 통제할 수 있는 나머지 부분은 오히려 눈에 더 잘 띄는 법이다.


지극한 정성으로 길렀지만 전소해버린 농작물과 대충 씨만 뿌렸지만 알아서 잘 자란 미나리의 대비는 언뜻 이 세상의 불가해함을 함축하는 모습처럼 보이기도 한다. 좌절해 나뒹굴 법도 하지만 제이콥은 의연하다. 남아있는 미나리를 수확하고, 미신 취급했던 수맥 탐지기를 한번 믿어보기로 한다. 그렇게 그는 세상의 모든 것을 이해할 수도, 그리고 통제할 수도 없다는 것을 알아 나가고 있다. 어느 순간, 또 다른 위기가 그에게 불쑥 닥칠지도 모른다. 다만 조금 유연해진 그는 전보단 더 부드럽게 위기를 넘길 수 있을 것이다. 서로를 오해하고, 또 이해하며 켜켜이 믿음을 쌓아가고 있는 다른 가족 구성원들과 함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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