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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겸 Jul 16. 2020

라라랜드, 사랑과 성공 중에 선택하라고?

어느 날 밤, 두 남녀는 같은 노래(City of stars)를 부르며 말한다. 너와 영원히 함께 하고 싶어. 그러나 안타깝게도 둘은 같은 언어로 다른 꿈을 꾼다. 그 후, 남자는 꿈 대신 돈벌이를 택한다. 그는 그녀와의 영원은 안정된 생활에서 피어난다고 믿는다. 그러나 여자는 돈벌이인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고 꿈꾸던 연극 준비에 몰두한다. 여자는 영화 속 그녀의 말처럼 다른 사람의 열정에 끌리는 사람이다. 그래서 자신도 연극에 몰두하는 것이 그와 영원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믿는다. 남자가 준비한 빵이 타버린 밤, 둘은 생각의 차이를 확인한다. 둘은 간극을 좁히지 못하고 결국 이별한다.

데이미안 셔젤의 세계에서 사랑과 생활은 언제나 양립 불가능하다. <라라 랜드>의 두 남녀는 세바스찬과 미아라는 개인이 되고 나서야 커리어를 쌓기 시작한다. 그의 다른 작품 <위플래쉬>나 <퍼스트 맨>도 마찬가지다. 성공에 몰두하며 주인공의 내면은 황폐해지고, 결국 사람들과 멀어진다. 장 느루아르는 감독은 평생 동안 단 한 편의 영화만 만들며 그걸 여러 번 변주할 뿐이라고 말했다. 셔젤은 반복해서 묻는다. 꿈과 사랑, 그걸 다 가지겠다는 것은 욕심이라고, 그러니까 너는 뭘 고를 거냐고. 셔젤은 (영화 속에서 주로 사랑으로 표상되는) 삶을 버리고 성공한 인물을 통해 그의 세계에서 두 가지가 양립 불가능함을 보여준다.


성취를 위해 나머지를 모두 버린 인물의 이야기는 매력적이다. 그러나 나는 그의 세계관에 동의하지 않는다. 현실은 그렇게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꿈을 이루기 위해서 필요한 건 100m 달리기의 폭발력이 아니라 마라톤의 꾸준함이다. 그 마라톤 안에서 소진되지 않고 계속 나아가야 한다. 그래서 모든 것을 유예한 채 오직 성공만을 위한 설계한, 빡빡한 계획은 상상했을 때만 행복하다. 사람은 기계가 아니다. 그 계획은 가끔 성공하고, 자주 실패한다. 결국 소진되고 만다. 좋은 계획은 오히려 자신을 저평가하는, 지속 가능한 계획이다. 경계가 흐릿한 꿈과 생활의 공간에 알맞은 경계선을 그어 그 영토를 분리해내야 한다. 그래야 지쳤을 때 사랑이나 우정의 영토에서 추진력을 얻어 다시 꿈의 영토로 발돋움할 수 있다. 좋은 계획이란 그 경계를 영리하게 베어내 자신(의 꿈과 생활)을 지키는 일이다. 그러니까 그 지난한 응전의 시간 속에서 중요한 것은 모든 것을 내팽개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자신을 지켜내는 일이다.


게다가 세상의 일은 자주 재능과 노력의 범주를 넘어 운의 영역에서 결정된다. <라라 랜드>의 오프닝에서 Another day of the sun을 외치며 패기 넘치게 LA에 입장한 이들 중 몇 명이나 원하던 자리에 있을까. 대다수는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고 말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언제나 너무 쉽게 자신을 과신하고, 삶을 낙관한다. 그건 긍정의 힘이라기보단 인지적 게으름에 가깝다. 자신은 무조건 성공한다는 믿음은 일견 멋있어 보일 순 있지만 실은 자기중심적인 유아성에 가깝다. 성공부터 최악의 실패까지 모든 시나리오를 써본 후에 무언가를 시작해야 한다. 그래야 큰 성취에도 그 영광에 취해 너무 우쭐거리지 않을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우쭐거림의 잘못된 발로로 망가지곤 한다. 그리고 실패해도 조금은 견딜 만해진다. 꼭 된다고 생각했던 일은 아니니까. 어차피 내 삶은 계속되니까. 차분히 다음 단계를 밟을 수 있다. 안타깝게도 삶은 원하는 답을 쓸 수 있는 주관식이라기보다 마음에 안 드는 선지 중에서 굳이 하나를 골라야 하는 객관식에 가깝다. 불가해하고 가변적인 인생에서 꿈꾸고 노력하면 이뤄진다고 믿는 것은 위험하다.


이런 수많은 제약에도 불구하고 많은 일들은 결과로만 말해진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혹은 생활)을 더욱 포기하면 안 된다. 그 세월을 함께 걸어갈 동료가 필요하다. 당신의 성취뿐 아니라 과정을 지켜봐 줄 목격자. "그 날 너 밤새서 공부하고, 우리 네가 태운 빵 먹었잖아"라고 말해줄 증인. <라라랜드>의 엔딩신에서 미아와 세바스찬은 끊임없이 가정법으로 과거를 돌아본다. 그 순간을 함께하며 했던 선택들, 결과를 알지 못했기에 아쉬울 수밖에 없는 그 선택들을 거슬러본다. 그 가정은 둘을 지켜본 관객의 입장에선 그것이 현실이라고 믿고 싶을 만큼 황홀하다. 둘에게도 낭만적인 상상이다. 그러나 그 회상은 낭만적인 가정법만은 아니다. 서로의 삶을 기억하고 있다는 증언이고, 또 음악과 공연에 살았던 자신의 찬란했던 순간에 대한 복기다. 그 황홀한 삼중주가 끝나고 미아와 세바스찬은 마침내 미소 짓는다. 둘은 서로의 올챙이 적을 기억해주는 사람이다. 둘은 이번에는 같은 꿈을 꿨다. 그 정도면, 그래도 나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각자의 현실로 돌아간다. 셔젤이 납작하게 나누었던 꿈과 사랑의 이분법 속에서 오히려 미아와 세바스찬은 그렇지 않아야 함을 역설했다. 감독을 거스르는 등장인물들, 이건 이 영화 속 인물들이 살아 숨 쉬는 좋은 캐릭터라는 뜻이다. 아, 혹시 어쩌면 여기까지가 셔젤의 계획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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