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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겸 Aug 12. 2020

<아워 바디>달리기로 얻을 수 있는 건 고작

31살 자영(최희서)은 8년간 준비해오던 행정고시를 포기한다. 좌절해있는 그녀 앞에 현주(안지혜)가 나타난다. 그녀는 트레이닝복을 잘 차려입고, 달리기를 하고 있다. 선망의 눈으로 현주를 바라보던 자영은 결국 현주와 친구가 되어 같이 뛰게 된다. 그렇게 자영은 달리기를 통해 조금씩 자신감을 회복한다. 그러나 영화는 달리기에서 얻은 자신감으로 그녀가 성장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자영은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갈 때까지 백수다. 심지어 대기업 정직원이 될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하는 만행까지 저지른다. 달리기를 통해 성장하는 주인공을 보며 꿈과 희망을 얻고 싶었던 관객들은 실망한다. 그러나 영화는 단호하게 말한다. 달리기는 달리기고, 사는 건 사는 거라고.


영화는 사회적 성취 대신 개인의 섹슈얼리티를 끌어들인다. 오프닝에서 떨떠름하고 의무적인 섹스를 하던 자영은 엔딩에 이르면 어쩌면 가장 주체적이고 자발적인 섹스인 자위를 한다. 신체의 고양으로 섹슈얼리티에 눈을 뜨게 되는 것. 어쩌면 이것은 달리기로 자신감을 얻어 사회적 성취를 이루는 것보다 자연스러운 수순이다. 영화 제목도 <아워 라이프>가 아니라 <아워 바디>이지 않은가.

영화는 그렇게 어떤 계기를 통해서 완전히 각성하는 신화들을 반대한다. '러닝'은 몸의 작은 성취일 뿐이다. 자영의 롤모델이었던 현주는 소설가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우울해하다가 (아마도) 자살한다. <아워바디>는 몸의 성취의 정점에 있는 현주의 죽음을 통해 그 신화들을 비웃는다. 그리고 몸의 변화를 막 느끼기 시작한 자영을 통해 다시 한번 말한다. 운동을 통해 나아지는 건 외모와 컨디션 정도라고 말이다.


그래도 몸의 변화는 나름의 의미가 있다. 이성의 산물처럼 보이는 인간은 사실 호르몬의 영향 아래 있는 한낱 미물일 뿐이다. 그래서 적어도 무언가를 할 때 방해받지 않을 수 있는 몸을 만드는 건 언제나 중요하다. 영화는 그것을 절대적 계기로 포장하고, 만병통치약으로 호도하는 것에 문제를 제기할 뿐이다.


그래도 자영이는 아주 조금씩 나아간다. 교과서를 정리함으로써 그녀의 자발적 욕망이 아니었던 행정고시에 미련을 버린다. 하지 않기로 선택한 것이다. 나아가 현주의 섹스 판타지를 자발적으로 대리한다. 결국 그녀는 대리가 아니라 스스로의 섹스 판타지를 실현해보기로 결심하고, 값비싼 호텔에서 (섹스 대신) 자위를 한다. 그때 햇살은 자영을 비추고 있다. 그녀는 그렇게 부작위에서 작위로 나아간다.


이제 그녀는 현주가 멈춘 자리에 서있다. 앞으로 그녀는 어떤 것을 해야 할까. 어떻게 하면 현주처럼 죽지 않고도, 못 미더운 자신과 함께 살아갈 수 있을까. 달리기는 이번에도 아무런 답을 주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이런 질문은 품고 있는 것만으로 힘이 된다. 간신히 마련한 대답은 살아가며 쉽게 무너질 수도 있고, 완전히 다른 것으로 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 질문을 끝까지 놓지 않는 것이 아닐까. 끝내 나만의 대답을 내놓아 보고자 발버둥 치는 그 과정에서 무언가 단단한 것이 잉태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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