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규어의 수석 디자이너는 마치 지혜로운 어머니 같은 느낌이었다.
“디자인은 혼돈 속에서 질서를 창조합니다. 하지만 혼돈이 먼저 존재해야 창의력이 나올 수 있습니다. 저는 의도의 명확성을 굳게 믿습니다. 무언가를 사용하려면 의도가 분명하고 모호함이 없어야 합니다. 형태와 기능은 서로 관련 있고 순서도 있어야 하죠. 재규어라는 브랜드는 스타일이 굉장히 중요한데요. 재규어의 기능은 아름다움을 표출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물은 매혹적이고 극적인 시각 구성을 이루어야 해요. 요리 도구부터 자동차, 건물까지 일단 시각적으로 매력적이어야 합니다.
‘상상력은 지식보다 더 중요하다’는 알버트 아인슈타인의 말이 있습니다. 배우면 다 잘할 수 있습니다. 위키피디아가 있잖아요. (웃음) 사람들이 모르는 것은 바로 여러분의 상상력입니다. 지식을 상상력으로 바꾸면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상상력은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입니다.”
영국 스코틀랜드 태생인 자동차 디자이너, 이안 칼럼(Ian Calum)은 어릴 때부터 동경하던 자동차 브랜드 재규어(Jaguar)에 1999년 수석 디자이너로 들어와 지금까지 16년 동안 재규어의 고급스러운 DNA를 유지하면서도 이 오래된 브랜드를 세계에서 가장 섹시한 자동차 브랜드 중 하나로 바꾸는 변화의 앞단에 선 신화적 인물이다.
세계 3대 자동차 디자이너 중 한 명으로 꼽히는 그가 지난 1월 25일, 26일 한국을 방문했다. 재규어 코리아(대표 백정현)에서 준비한 재규어 레어 디자인 스튜디오 행사 때문이다. 새로 출시한 재규어의 플래그십 세단인 뉴 XJ의 출시를 기념하며 재규어의 지난 역사를 정리한 재규어 브랜드 디자인 스튜디오의 오픈 기자간담회에서 직접 뉴 XJ 디자인 철학에 대해 설명하고, 26일에는 촉망받는 국내 자동차 디자인 전공 학생을 상대로 마스터 클래스를 여는 열정을 보인 그를 이틀 동안 바라보면서 떠오른 생각은 지혜로운 어머니 같다는 느낌이었다. 조용하면서 위트 있는 성품, 열린 사고, 그리고 무엇보다 따듯하고 여유로운 태도는 사람들이 그를 왜 자동차 디자인의 구루로 높이 사는지 이해할 것만 같았다.
이런 그의 모습을 좀 더 생생히 공유하고 싶은 마음에 25일 기자간담회와 26일 마스터 클래스에서 나온 QnA를 글로 풀어내 본다. 통역과 윤문을 거친 터라 원래의 의도와 다소 다를 수 있다는 점을 미리 밝혀둔다.
Q. 디자인할 때 바뀌지 않는 이안 칼럼 본인만의 철학이 있다면 알려주세요.
A. 굉장히 무의식적인 행동이 많아서 정확히 말씀드리기는 힘든데요. 절대적으로 고수하는 몇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일단 하나의 전체적인 측면을 봅니다. 차가 포괄적으로 하나로 움직이는지 말이죠. 요소요소가 결합해 전체가 되는 게 아니라 하나의 덩어리가 되는지 여부가 중요합니다. 가장 순수한 선, 선의 최소화하는 작업을 많이 하기도 하죠.
저희 디자인 팀에는 젊은 디자이너가 많이 있어요. 이제 어떤 부분에서 저도 변해야 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수용해야 하는 순간이 오겠지만 아직까지는 단순한 선과 순수한 면을 지키려고 합니다. 특히 절대 타협하지 않는 것을 꼽자면 비율입니다. 최적의 비율을 위해 엔지니어와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와 협업합니다. 비율을 정확히 맞추지 않는 디자이너가 존재할 수도 있지만 저 같은 경우는 최선의 노력을 다해 최적의 비율을 고수하려고 합니다.
Q. 자동차를 디자인할 때 영감은 어디서 받나요? 이번 출시한 XJ의 영감의 원천도 궁금합니다.
A. 저는 모든 곳에서 영감을 받습니다. 예술, 음악, 건축, 사진 등 다양한 분야에서 영감이 오는데요. 특정 작품이나 제품을 보고 왜 좋을까 그 이유를 생각하면서 명확하게 저만의 생각과 방식을 끄집어내려고 노력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작업의 드라마틱한 요소나 흥미로운 요소의 느낌을 포착해 영감으로 활용하고 싶다면 그걸 그대로 카피해 갖다 쓰는 건 쓸모가 없습니다. 그 고유의 느낌을 적절히 활용하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참고로 이번에 출시한 XJ는 1968년 XJ 모델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당시 정말 색다르고 특별했던 모습의 가치를 살렸죠.
Q. 자동차 디자이너로서 요즘 느끼는 당신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또한 미래에는 교통수단이 어떻게 바뀔 거라고 생각하시는지요?
A. 10년, 20년, 30년 전으로 돌아가 보면 삶의 궤적을 볼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공부하는 학생으로서 어떤 히어로를 닮고 싶다고 노력하다가 어느 시점에는 그 사람만큼 실력이 좋아지죠. 그리고 더 노력하면 뛰어넘는 시점이 오면서 이루고자 하는 바를 얻을 때가 있습니다. 저는 감사하게도 제가 원한 것을 재규어에서 이룬 것 같아요. 그래서인지 이젠 예전으로 돌아가 학생 때의 자세로 다시 세상을 바라보고 싶습니다. 문제를 해결하고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창의력이 많이 필요했던 순간으로 말이죠. 아는 것을 다시 확인하면서 창의력을 발휘하고 싶네요.
미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10년, 20년 뒤에는 지금 학생인 분들이 주도권을 잡고 문제점을 해결해가야 합니다. 빠르게 바뀌는 시대의 난관에 창의력을 발휘할 때죠. 사실 개인적으로 미래를 맞추기는 불가능합니다. 엄청 흥미진진하긴 할 것 같아요. 전기자동차, 자율 자동차 등이 등장하면서 업계는 엄청난 변화를 겪을 것입니다. 단순히 차의 모양뿐만 아니라 교통수단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바뀌겠죠. 도시화가 빠르고 심도 있게 진전되면서 자동차는 개인의 성격을 대변하는 물건, 혹은 그냥 다른 약속에 가기 위한 물리적인 수단이 될 것인가 이 두 가지 질문으로 갈릴 것 같습니다. 정답은 저도 모릅니다 (웃음)
Q. 재규어는 헤리티지를 중시하는 브랜드인데요. 만일 지금의 고급스러운 이미지와 반대되는 이코노믹 카에 대한 니즈가 있다면 어떻게 대응하실 건가요?
A. (단호하게) 비밀입니다. 하하. 저희는 세단 말고 다른 차량 분야에 대해서도 당연히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선보인 SUV 차량은 고객 입장에서 볼 때는 당연하게 취급할 수 있어도 저희 입장에서는 굉장히 혁신적이고 새로운 경험이자 엄청난 결정이었어요. 전 세계적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디자이너로서 관심을 갖고 고민을 많이 해봐야 합니다. 팀원들에게 창조적 파괴를 강조하는데요. 디자이너의 역할은 언제나 파괴를 통해 새로운 걸 만들어내는 것이죠. 새롭고 혁신적인 활동에 대해서는 언제나 열려있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콤팩트 카는 아마 피할 수 없는 분야라고 생각하는데요. 하지만 재규어는 고객이나 시장이 없는 곳에는 들어가지 않는 것이 원칙입니다. 작은 차는 싸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있잖아요. 그럼 저희도 싸게 만들어야 하는데 그게 과연 가능할지, 어떤 방법을 취해야 할지 고민을 항상 해봐야 합니다. 새로운 교통수단, 아이디어에 대해서는 개방적입니다. 재규어에서 보통 새로운 프로젝트를 진행하는데 3~4년이 걸리는데요. 몇 년 뒤에는 여러분들이 깜짝 놀랄 만한 프로젝트를 발표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기대해주길 바랍니다.
Q. 재규어의 헤리티지가 디자이너에게 제약으로 작용할 때는 없나요?
A. 전통은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전통 자체에 초점을 맞추는 건 상대적으로 더 쉬운 방법입니다. 중요한 건 전통의 가치에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단순히 전통적이라는 이유로 카피를 하는 게 아니라 가치를 전달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흥미롭고 아름다운 외곽선과 소재를 부각하는 인테리어를 추구하는 요즘 재규어의 모습은 재규어 고유의 가치를 살려 다시 재해석한 결과물이라고 생각합니다.
Q. 차량 디자인은 엔지니어링, 경제성 등 외부적인 속성에 영향을 받을 텐데요. 혹시 그 예를 들어볼 수 있을까요?
A. 차량 디자인은 외부 요소와 속성에 당연히 영향을 받습니다. 특히 차의 전면, 후면이 그러한데요. 디자이너로서 잘 타협하고 활용해야 할 부분입니다. 디자이너가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잘 판단해서 할 수 있는 부분에 집중해야 합니다. 얼마나 상세하게 정제하고, 절제해서 원하는 디자인을 끌어낼 수 있는지 말이죠. 디자이너는 외부 속성에 양보를 하는 것이 아니라 판단을 하는 것입니다. XJ만 하더라도 각 국마다 법규가 다르기 때문에 그런 영향을 생각해야만 하죠. 이렇게 전체적인 물량을 생각하며 디자인하는 건 재규어가 잘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Q. 디자인 과정에서 다른 분야의 전문가와 협상을 많이 했을 텐데 디자이너로서 고수해야 할 요소가 궁금합니다.
A. 어떤 걸 디자인하냐에 따라 좀 다를 텐데요. 일단 디자이너는 자신이 디자인하는 것에 대한 비전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그 핵심을 파악해 고수해야만 합니다. 핵심을 유지하기 위해 비전을 지지하는 핵심 가치만은 잃지 말아야 한다는 거죠. 디자인하는 제품에 따라 최우선 순위는 달라질지언정 이것만은 지켜야 한다는 디자이너로서 자신만의 철학을 바탕으로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애플의 예를 들어보면, 애플의 CDO인 조나단 아이브는 제 친한 친구인데요. 그는 아이폰을 잡았을 때 이것이 주는 순수함과 심플함을 무엇보다도 최우선적으로 지키려고 한다고 말하더군요. 아까 말했듯이 저는 차의 비율만은 무조건적으로 지키려고 합니다. 물론 제품도 생각하고 비용과 제조에서 나타나는 여러 요소들도 생각해야 하지만 최종 제품에 개성을 부여하는 핵심 비전이 무엇인지, 자신만의 가치가 무엇인지 깨닫고 그것을 고수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Q. BMW의 디자인웍스USA, 푸조 디자인 랩, 아우디 산업디자인 팀이나 포르셰 디자인팀의 예를 보면 자동차를 넘어 물건부터 건축까지 경계를 크로스 오버하는 경우가 흔해지고 있습니다. 재규어는 이런 상황에 어떻게 대응하고 있나요?
A. 우선 재규어는 계속 성장하고 있고, 키워나가는 분야가 있습니다. 액세서리와 의류 분야인데요. 앞으로 2~3년 간은 강화할 예정입니다. 우리도 포르셰 디자인 팀처럼 하고 싶은 생각은 있지만 그러려면 시간과 자원과 사람이 많이 필요합니다. 현재 가용할 수 있는 여유가 없는 게 안타깝죠. 저는 개인적으로 요트 프로젝트를 한 적이 있고 재규어 팀에서는 호텔 스위트 룸을 꾸민 적도 있습니다. 전 세계적인 니즈가 있다면 앞으로 더 하고 싶은 생각이 있습니다.
다른 디자인 분야는 늘 눈여겨보고 있습니다. 가구도 언젠가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도 하는데요 그 이유는 우리 디자인 팀이 가구에 대해서는 충분한 디자인 역량을 갖췄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업성이 없다면 뛰어들기가 쉽지 않죠. 모든 상품이 다 돈이 되진 않잖아요. 가끔 브랜드를 강화시키기 위해 할 때도 있는데 BMW나 아우디처럼 우리는 그렇게 돈이 많고 큰 규모의 자동차 브랜드가 아닙니다. 물론 지금 꾸준히 성장하고 효율적으로 크고 있기 때문에 미래에는 생각해볼 여지가 충분히 있겠죠. 바로 며칠 전에 자동차와 관련되지 않은, 다소 놀랄 수도 있는 프로젝트를 완료했습니다. 말은 할 수 없고요.(웃음) 앞으로 기대해줬으면 좋겠습니다.
Q. 어릴 때 재규어 본사에 편지를 보내서 자동차 디자이너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조언을 듣고 이쪽 길을 결심했다는 일화를 들었습니다. 지금 젊은 친구들이 편지를 보낸다면 어떤 말을 해주실 건가요?
A. 제가 직업을 선택할 때만 해도 자동차 디자이너는 널리 알려진 업종이 아니었습니다. 자동차가 굴러가면 공장에서 누군가 찍어낸다고 생각을 하곤 했죠. 특히 이탈리아나 미국에서 다 만든다는 생각도 있었어요. 저는 산업디자인을 전공하고 업계에 들어왔는데 요즘은 상황이 많이 다른 것 같아요. 일단 학생들이 업계에 대해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책, 기사 등을 읽어보면 자동차 디자인에 무엇이 필요한지 다 알 수 있을 정도니까요. 디자인의 중요성도 강화됐고요. 자동차 디자인이 한 기업을 살릴 수도, 망하게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이제 누구나 압니다. 자동차 디자이너를 희망하는 학생에게 하고 싶은 말이라면, 학교에서 수학, 엔지니어링 등 기계적이고 수치적인 측면과 예술적이고 창의적인 측면, 이 두 가지를 균형 있게 키우라는 겁니다. 둘 다 동일한 가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학교를 다닐 때 만큼은 고르게 공부하는 게 중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