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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유월 Dec 23. 2023

#0. 어쩌면 위로가 필요했을지도 몰라

나의 화와 슬픔에 대하여

으득, 으득.

오른손은 괴상한 소리를 낸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기억을 더듬어보면 얼핏 고등학생 신분일 때도 소리가 났고, 중학교 때는 조금 긴가민가하다. 내 오른손은 주먹을 천천히 세게 쥐면 으득하고 소리를 낸다. 확실한 증거나 기억은 없지만 아마 주먹 쥐는 법을 잘 모르고 주먹을 휘둘렀던 중학생이었으니까, 아마 그때 문제가 생긴 게 아닐까 싶다. 그런 추측을 한 듯, 간혹 안타까운 표정으로 물어오는 지인들이 있었다.

-어쩌다.....?

중학생 때 주먹이 주저앉아서 이렇게 되었다고 설명하고 다녔다. 솔직히 기억이 안 난다. 나는 답변을 정해놓고 사는 것이 몇 가지 있었다. 어릴 적에는 좋아하는 여자 연예인을 자꾸 물어보는 통에 당시 유행했던 뮤직비디오의 여자주인공 이름을 외우고 다녔었다. 그러면 누구든 쉽게 수긍하곤 했다. 사실 그 여자 연예인이 예쁘기도 했다.

여하튼, 중2병을 앓던 그 시절에는 화가 많았다. 화를 다스릴 줄 몰랐고, 건강하게 분출하는 방법은 더더욱 몰랐다. 그 화는 어린 주먹에 담겨 벽에 닿았다. 살짝 톡- 하고 닿았을 리 없었다. 주먹이 까져있는 일이 많았고, 어떤 날에는 주먹에 흐르는 피와 통증으로 덜덜덜 떨면서 수돗가에서 주먹을 씻어내기도 했다. 나이를 조금 더 먹은 뒤에도 샤워 부스에 서서 주먹에서 떨어져 버린 살점을 뜯어내기도 했었다.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 보면 초등학생 때에는 그렇게 연필을 부러뜨렸다. 밖으로 표출하는 불만이자 화였다. 중2병이 아니었던 때에도 화가 많았었다. 옆자리에 앉은 짝꿍이 생일 선물로 샤프를 선물해 줬었다. 당시 다른 친구들이 보통 가지고 다니는 샤프는 천 원짜리 검은색 제도 샤프였다. 일본의 펜탈 제품을 카피한 제품이라는 썰도 있었지만, 내 인생에서도 가장 많이 거쳐간 샤프가 바로 제도1000 이었다. 그런 시대에 짝꿍이 집에서 아빠가 쓰던걸 가져왔는지 어쨌는지 모르지만 금색의 금속으로 된 샤프를 선물로 주었다. 쪽찌에는 연필하고 샤프가 내 손에서 부서져나가는 게 너무 안타까웠다는 내용이 쓰여있었다. 그 마음이 고마웠을까? 나는 습관적으로 연필과 샤프를 부러뜨리는 일을 그만두었다.


이제 조금 나이가 들었다. 손가락으로 머릿속에 떠오른 얼굴의 이름을 세어보다가 끙끙 앓기를 수차례 할 만큼 친했던 친구들의 기억이 까마득해져 간다. 그 순간은 인생의 가장 큰 기로에 서서 자신의 죽음과 견주어 볼 만한 고민들이었지만, 지금은 그 고민이 무엇이었는지 알아낼 방도도 없다. 순간 번뜩하고 떠오르지 않았던 친구의 이름에 미안한 마음을 가지면서 그 순간들을 천천히 되짚어본다.


그 새벽녘 술집에서 나와 텅 빈 거리를 걷는 무리 속에서도 나는 화가 나있었다. 내가 나름의 것으로 규정지어버린 순리라는 틀로 풀어지지 않는 삶은 나를 화나게 하였다.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듯 자신의 한심함을 털어내고 돌아온 자취방에는 한심함이 가득 차 있었다. 어느 래퍼의 노래처럼 자취방 냉장고 같았던 이십 대의 나는 자신의 한심함에 화가 가득했었다. 늘 나는 화를 표출해냄으로서 사람을 잃었다. 그렇다고 화를 표출해서 나 자신을 지킨 것도 아니었다. 나는 화를 통해 나와 사람을 잃어갔다.


지금은 화를 삼켜낼 줄도 알고, 잘 가다듬어서 표현할 줄도 아는 나이가 되었다. 아니 어쩌면 한 십 년 후의 내가 보기에 치기 어린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하나 확실하다고 느끼는 것이 있다.


아홉 살짜리 아이가 친구들의 관심을 받고자 부러뜨리던 연필을 보며, 나를 안타까워해준 아홉 살짜리 꼬마 짝꿍이나,

열한 살 슬픔에 가득 차서 길가에서 우는 눈물을 주먹으로 닦던 나를 어색하게 안아서 토닥였던 녀석이나,

스물두 살에 알게 된 생애의 비밀과 충격에 울던 나에게 괜찮다고 다독여주던 후배.

그리고 지금 이렇다 하고 기억하지 못하지만, 많은 나의 슬픔과 화남에 순간에 도와준 사람들. 동물들. 순간들.


맞아. 어쩌면 위로가 필요했었던 걸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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