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인컬처 2019년 1월호 'Artist'
조각가 나점수는 나무 돌 흙 숯 등 자연에서 채취한 재료와 인공적 재료를 깎고, 붙여 추상적 형상을 만든다. 재료를 최소한으로 가공하고, 본연의 색에 흑과 백만 더한 제한적 팔레트로 수직 수평의 세계를 펼쳐왔다. 19년 차 작가는 지난해 2인 전 <미언대의>에서 한 시대를 마무리하고 개인전 <무명>을 통해 새 작업세계가 열렸음을 공표했다. 오랫동안 고수했던 제목 ‘식물적 사유’를 버리고 ‘이름 없음’으로 작업을 새로이 명명한 것. 그가 무명의 세계로 들어선 계기는 무엇이며, 이곳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아야 할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 한지희 기자
Art 2001년 갤러리보다에서 첫 개인전을 열고 데뷔한 지 19년 차입니다. 작년 이건용 작가와 함께한 2인 전 <미언대의>(2018. 9. 12~10. 14 더페이지갤러리)는 2009년부터 지속한 <식물적 사유> 연작을 위주로 구성했죠. 곧 이은 개인전 <무명(無名)>(2018. 11. 9~12. 21 아트스페이스3)에는 전시 제목과 동명인 새로운 연작을 공개했습니다.
NA 새 연작의 제목이자 주제의식인 ‘무명’은 이름 없음의 한자어입니다. 사물과 물질이 관념적 체계 안에서 받아들여진다면 정신이 발현될 수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지능으로 판단된 감각의 정보를 지식이라 한다면, 이 지식으로 이해한 영역 내에는 전혀 새로운 것이 없어요. 지식은 다만, 내가 여태껏 감각하고 인지하지 못했던 다음 단계의 영역에 도달했을 때 이 사태를 ‘모른다’라고 깨닫게 하는 단초일 뿐입니다. 그래서 내가 무언가를 새롭게 인식하기 시작한다면 이는 ‘이름 없는 것’이라 볼 수밖에 없습니다.
Art 다소 추상적인 개념입니다. 사실 생김새만 봐서는 새 연작이 이전의 작업과 특별히 다르게 보이진 않아요. 이러한 개념이 작업에 어떻게 반영됐는지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NA 나는 무지(無知)하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데서 시작했어요. 아무리 다시 생각해봐도 무지하다는 사실은 확실해요. 제가 드러내고 싶은 바는 무명의 상태, 혹은 이에 도달하려는 태도예요. 이것이 특정 조형언어로 구현돼 어떤 의미로 관념화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수직성, 거친 표면, 면과 면 사이의 그늘 등 제 언어는 인간에게 본능적으로 내재한 시적 정서에 호소합니다. 그래서 이를 어떤 의미에 부합시키는 것은 불가능하죠. 제 작업을 이렇게 감상하는 건 실패나 다름없어요. 대신 제가 제시하는 방식은 그 자체의 ‘상태로 보라’입니다. 작품의 물리적 상태, 즉 빛과 색, 공간과 위치, 사이와 간격, 이것이 만드는 조용함과 같은 상태를 직관적으로 보라는 말이에요. 무명이라는 말 자체가 어떤 의미 체계로 분류되길 유보하는 것이잖아요.
Art 그러니까 그런 태도, 혹은 감상 방식을 제시할 뿐 구체적으로 전달하려는 메시지가 있는 것은 아니군요.
NA 우리가 작품을 보며 끊임없이 이게 무엇인지 묻는 태도에는 ‘나와 타자’라는 전제가 확실해요. ‘무엇’은 특정 대상을 반드시 전제하는 지시대명사로, 이 대상, 즉 타자는 늘 위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조각가로서 대상인 나무를 직접 만지다 보니, 가시에 찔리고 무게에 압박도 받으면서 결국 이를 조각적 수단이 아니라 동반자처럼 여기게 됐어요. 그러면서 자연스레 나무의 상태와 동화(同和)됐다고 느낍니다. 저는 현대미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에서 상태로’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바로 동화가 이 전환을 가장 잘 이끌어내는 과정이라고 봅니다.
Art 직접 물질을 다루지 않는 관객의 입장에서는 타자화된 무엇에서 동화된 상태로 이행하는 일이 쉽지는 않을듯합니다.
NA 물질과 동화하기 위해서는 이것이 자기 생을 흔들어댈 만큼 나와 총체적으로 연관된 사건 혹은 사태가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선조는 딸을 낳으면 오동나무를 심었다가 시집보낼 때 이를 가구로 만들어줬어요. 부모에게 오동나무는 단순한 나무가 아니라 사랑이죠. 그리고 그 가구는 딸에게는 부모로, 부모에게는 딸로 여겨질 테고요. 이런 사적 경험이 사회 전반으로 확장되면 사회가 공유하는 의식상태가 되고, 그 자체로 문화적 힘이 된다고 생각해요. 물론 파편화된 현대사회에서 공동의 기억을 만들기는 더 어렵죠. 그래서 시인이나 작가 같은 예술가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이들이 대리자가 돼 이러한 영적 경험을 일상과 세계로부터 발굴해낼 수 있기 때문이죠.
Art 그것이 나점수가 작가로서 지향하는 바라고 봐도 무방할까요?
NA 그렇습니다. 저는 늘 ‘나는 내세울 것이 없는 사람이며, 내세우는 것 자체가 의미 없는 행위’란 점을 되새깁니다. 스스로 나는 어떤 작가라고 내세우는 전략은 작가의 삶을 유치하고 허망하게 만들죠. 저는 이치를 깨닫고 마음 이동하면 이를 잘 추슬러 작품으로 드러낼 뿐. 누군가이 상태를 보고 동화되어 위로받을 수 있다면 다행이겠죠.
식물의 시간대에 올라타기
Art 문득 작가로서의 초심이 어땠는지 궁금해집니다. 1998년 학부 졸업 직후 실크로드를 횡단하고 2005년부터는 4년간 매해 아프리카, 몽골, 중앙아시아 등 보통 오지라 불리는 곳에 다녀왔어요. 이 여행이 초기 작업세계를 구축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으리라 예상합니다.
NA 그렇습니다. 1997년 졸업 즈음 저는 제가 이치를 알아차린 정도나 이를 표현하는 방식에 아주 불만족했습니다. 실존 자체가 비참해서 여행만이 돌파구라고 생각했어요. 이왕이면 배낭여행으로. 불안하니까 자꾸 나를 전략적으로 꾸미려고 했는데, 오지로 배낭여행을 가면 나를 방치했음 했지 꾸밀 이유가 없잖아요. 다녀오고 나니 안정감도 생기고, 특히 스스로에게 가진 불만족 중 실행하지 못하고 피하기만 하는 비겁함이 있었는데 이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이 내 안에 아직 살아있었다는 점을 발견하고 위로를 받았습니다.
Art 작업 주제나 소재, 재료 등 조형적 면에서도 변화가 있었는지요?
NA 제 작업의 중심인 수직, 수평이라는 언어를 얻었죠. 그저 개념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정말로 광활히 펼쳐진 세렝게티 초원과 해 질 녘 우뚝 솟은 K2 봉우리가 준 충격의 언어예요. 그 장관이 주는 에너지가 육신의 감정을 흔들어대는 느낌이 제 정서의 일부로 동화된 거죠. 그 감동을 어떻게 조형적으로 옮길지 계속 실험했지만 그 거대함을 시각적 요소로 끄집어내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이마저도 어려운데 지구 생태를 넘어서는 것, 그리고 알 수 없는 제 선험까지 포함한다면 추상으로 갈 수밖에요. 그래서 2009년 무렵부터 작업이 좀 더 추상적으로 변했습니다.
Art 그리고 이때부터 ‘식물적 사유’라는 개념이 작업의 중심 주제이자 제목으로 대두됐어요.
NA 저에게 식물은 시간을 의미합니다. 식물은 인간이 살 수 있는 시간대를 넘어, 또는 그보다 극단적으로 짧은 시간대를 사는 존재예요. 탄생부터 소멸까지를 사계절 안에 다 보여주죠. 그래서 인간의 시간대라는 좁은 영역 바깥을 볼 수 있도록 합니다. 2천 년 된 나무와 나라는 실존의 시간대를 비교해보면, 인간의 삶을 기준으로 모든 것을 대상화하려고 했던 마음을 내려놓게 돼요. 대신, 실존이 아닌 영혼이 사는 시간대에 올라타게 되죠. 식물적 사유란, 식물을 통해 그 장구한 시간대와 내가 만나 나의 시간대, 나를 세웠던 모든 관념이 허물어지는 지점을 드러내고자 수용한 주제의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Art 추상화됐긴 하지만 여전히 식물의 씨방이나 잎사귀를 닮은 작업도 많아요. 식물에 특별한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NA 저를 포함해 인간은 너무 동물같이 사는데 그 방식에 거부감을 느끼기 때문이었어요. 이건 전략적이에요. 이러한 방식을 통해서는 인간과 생명을 제대로 볼 수 없죠. 적당히 방치하거나, 거리를 두어야 상대의 본성을 알아차릴 수 있어요. 내가 전략이나 위선을 세우지 않을 때 상대가 나를 알아차릴 수 있는 것처럼. 식물은 앞서 말했듯, 제 편협한 시야를 넓혀 전략적 판단을 유보하게 합니다. 덕택에 사사로움 없이 온전한 상태와 동화하고, 이렇게 알아차린 이치나 본성을 저는 조각으로 드러내는 것이죠. 그 과정에 위로가 있고요.
목적 없이 본연을 보여주기
Art 작가노트를 보면 종종 시를 쓰기도 하던데, 주로 시각 매체에 집중하는 이유가 있나요?
NA 6가지 지각 기관 중 눈을 통해 85%의 정보가 들어옵니다. 시각이 제일 쉬워요. 저 자체도 시각이 제일 발달한 인간이고요. 16살 때부터 이 일을 했으니 이제 34년째입니다. 모든 감각을 다 열어놓고는 있지만 작업을 상상하면 눈을 감아도 제일 먼저 이미지로 떠올라요. 제3의 눈이 있다 할까요. 시각을 다루는 것에서 쾌를 가장 크게 느끼고, 그 상태에 중독이 됐어요. 제 상태를 압축해서 드러내는 것이 조형이고 시예요. 시는 마지막 감각인 영감(靈感)이죠. 그래서 식물적 사유로부터 시작된 작업을 조형 시라고 합니다.
Art 조형언어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죠. 수평이나 수직성 외에도 수년간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어휘들이 있어요.
NA 저는 인간의 육체적 감각을 동원한 형태와 상태의 근원을 사유합니다. 표면을 거칠게 또는 날카롭게 두는 것, 원목을 깎아 들어가는 것들이 육신과 정신이 만나는 지점이겠죠. 그래서 행위를 통해 드러나는 선과 공간, 수직과 수평의 정신이 도달한 위치에 관심이 많습니다. 아울러 드러남과 사라짐의 시간과 무지의 상태에 집중합니다. 이것은 판단으로부터 시선을 거두고 유보와 현상, 과정과 이치에 관심을 두기 때문입니다.
Art 사용하는 재료를 보면 나무, 돌, 흙덩이, 석탄 등 자연에서 구한 것이 많고 또 전반적인 색조도 무척 제한적이란 점도 눈에 띕니다.
NA 작업 재료와 색조 모두 제가 관심 두는 바와 연관돼 있어요. 모든 재료의 전제는 자연입니다. 자연을 한글로 곧이곧대로 풀어쓰면 그러한 상태죠. 물질을 수단으로 이용하겠다는 태도만 안고 있으면 이와 동화할 수 없어요. 재료를 크게 가공하지 않고, 흑과 백, 재료 본연의 색과 그다지 차이가 없는 톤으로 칠하는 것 역시 그대로의 상태를 받아들이려는 태도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하지만 작가에겐 표현의 가능성이 늘 열려있어야죠.
Art 전통적인 조소 작업 외에도 키네틱 조각이나 영상 등 다양한 매체를 작업에 접목하는데, 이는 새로운 조형언어를 찾기 위한 실험인가요?
NA 실험이 아니라 정서적 안정을 위한 노력이죠. 저는 뚜렷한 목적을 갖고 전략적으로 작업하는 것에 불만족해요. 그래서 이런 생각이 일지 않게 보이는 대로 영상이나 사진, 드로잉, 기계장치 등 이런저런 작업을 다 해봅니다. 이 불만족이 작업의 동인인 셈이죠. 신작 중, 서있는 나무가 무너지는 모습을 반복 재생하는 영상은 연속되는 시간이라는 추상적 생각을 시각화한 것입니다. 세움과 무너짐 사이의 시공간을 지연시켜 보여줘요. 이 사이에서 저는 ‘무목적적 넘어짐’을 목격합니다. 나무가 넘어짐은 어떤 의지의 개입 없이 중력에 충실한 현상일 뿐이죠. 목적이나 전략 등 그동안 나를 세웠던 관념을 허물고, 모르는 상태로 만물의 이치를 살피는 것, 그래서 선험적 본성을 알아차리는 것. 그것이 제가 예술가로서 가야 할 길(藝道)입니다.
* 나점수 / 1969년 전남 나주 출생. 중앙대 조소과 학사, 동대학원 석사 졸업. 더페이지갤러리(2018), 누크갤러리(2017), 김종영미술관(2016), 아트스페이스3(2014), 갤러리현대 16번지(2010) 등에서 개인전 및 2인 전 다수 개최. 블루메미술관(2017), 장욱진미술관(2016), 문화역서울284(2015, 2014) 및 국내 유수의 국공립미술관 단체전 참여. 중앙미술대전 특선(1998), 송은문화재단 지원상(2003) 수상, 김종영미술관 올해의작가(2016) 선정
원고 작성: 한지희
교정 교열: 김재석
디자인: 진민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