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욱에 빠지다
요즘 클래식 음악에 빠져있다. 나를 클래식의 세계로 이끈 건 피아니스트 김선욱. 팬데믹에 맞춘듯한 일정에 작년에 세 차례나 리사이틀이 취소된 그는 12월 말 유튜브 무관중 생중계로 독주회를 열었다. 조명을 낮춘 방에서 아이패드로 독주회를 감상했다. 와인 한잔을 곁에 두고.
텅 빈 공연장. 소리를 흡수할 관객이 없으니 무대로 입퇴장하는 김선욱의 발자국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그 발자국 소리를 듣고 피아노의 세계로, 김선욱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포인트였다. 박수쳐 줄 관객이 없는 텅 빈 공연장에서 연주하는 마음은 어떤 걸까 생각하니 당황스럽게도 눈물이 핑 돌았다. 아무도 없는데 연주는 또 왜 이렇게 열심히 하는지.
수년 전 김선욱의 리사이틀과 협연 공연도 찾아가곤 했었는데 최근 몇 년 소홀했다. 왜 이 좋은걸 잠시 잊고 있었나 정신이 번쩍 들면서 이후 김선욱의 연주를 매일 찾아들었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작년에 취소되었던 김선욱의 공연들이 1월에 연달아 열렸고 모두 직접 관람했다. 리사이틀과 지휘자 데뷔 무대,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 님과의 듀오 무대까지.
그중 리사이틀이 가장 먼저 열렸는데 비록 두 좌석 띄어 앉기였지만 객석에 앉은 관중을 보는 김선욱은 행복해 보였다. 운 좋게도 앞에서 두 번째 줄에 앉은 덕에 김선욱의 손, 얼굴, 떨어지는 땀방울, 숨소리까지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 날은 연주자도 관객도 오래 기다려 온 공연이라는 것이 공기 중에 팽팽하게 느껴졌다. 베토벤 후기 소나타 세 곡을 중간에 쉼 없이 연달아 연주하는 긴 호흡에 관객들도 오롯이 동참했다.
여러 피아니스트의 연주를 들어봐도 나에게는 김선욱의 연주가 최고인데, 말갛게 연주를 시작한 그는 시간이 흐를수록 땀에 절어가고, 격정적인 부분에선 볼살이 좌우로 부르르 떨리기도 한다. 어쩜 저렇게 극도의 피아니시모가 가능할까 싶을 부분에선 같이 숨을 죽인다. 음악에 몰입한 연주자는 연주하는 내내 다양한 몸의 움직임을 보여주는데 나는 김선욱의 두 가지 움직임이 특히 좋다. 땀에 젖은 풍성한 머리카락이 격한 고갯짓과 함께 흔들릴 때와 건반을 터치하기 직전 몸을 약간 웅크렸을 때. 특히 약간 웅크린 자세에서 건반을 조심스럽게 터치하려는 모습을 보면 ‘장인’ 같다는 느낌이 든다.
김선욱은 ‘피아노를 친다‘ 대신 ’음악을 만든다 ‘라는 생각을 어릴 때부터 가졌다고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다. 만약 음악을 하지 않았다면 어떤 일을 했을 것인가라는 질문에는 손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일을 했을 것 같다고 대답한 인터뷰도 보았다. 연주 생활을 위해 거주지를 런던으로 옮긴 뒤(지금은 독일 뮌헨으로 옮겼다고 한다.) 영국이 craftmanship이 강한 나라여서 즐거웠다고 했다. 구두, 옷, 가죽제품 등 장인정신이 살아있는 나라에서 그런 것들이 주는 즐거움이 컸다고. 김선욱이라는 사람 자체가 어릴 때부터 덕후 기질이 농후했다는 건 쉽게 파악할 수 있다.(역시 덕후들이 세상을 풍요롭게 한다.)
초등학생 시절 지휘자 정명훈을 너무 좋아한 나머지 경매에 나온 정명훈의 지휘봉을 엄마카드로 몰래 구입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당시 지휘봉의 가격은 50만 원!! (애지중지하던 지휘봉은 지휘하는 흉내를 내다가 천장에 부딪혀 두 동강이 나서 엄청 울었다고.) 초등학생 때부터 혼자서 지하철 타고 예술의 전당, 세종문화회관 등을 다니며 매주 공연을 보고 악보를 모으던 클래식 덕후 소년이 리즈 콩쿠르에서 최연소, 아시아인 최초 우승을 거머쥔 이야기는 완벽한 서사다. 후회 없이 살아왔고 게으른 연주자는 아니었다는 것만큼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으며 앞으로도 끊임없이 발전하겠다는 그의 이야기에 신뢰와 설렘을 갖게 된다. 매일 최소 3시간은 연습하고 그래서 긴 여행은 생각하기 어려워 신혼여행도 1박 2일로 다녀왔다는 이야기는 놀랍다. 연주자는 운동선수와 비슷하기 때문에 매일의 연습을 게을리할 수 없다고.
수백 년 동안 많은 연주자에 의해 무수히 되풀이되고 신곡 발표조차 없는 클래식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여전히 마음의 울림과 위로를 주는 건, 김선욱 같은 장인이 매일의 단련으로 켜켜이 쌓고 벼려온 깊이가 음악이 연주되는 순간 즉각적으로 전달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일까. 어떤 클래식 연주는 백그라운드 음악으로 사용하는 게 어렵다. 다른 일을 하면서 배경음악으로 듣기엔 그 세계가 너무 깊다. 아니, 꼭 깊어서만은 아니고 조금은 긴장된 그 세계에 충실히 내 감각을 맡기고 동참하고 싶어 진다. 결국 하던 일을 멈추고 청각만을 곧추 세우게 되는 일이 잦다.
김선욱을 비롯한 훌륭한 한국의 연주자들과 동시대를 살아갈 수 있어 행복하다. 워낙 어린 나이에 콩쿠르 우승을 해서 벌써 십여 년 연주생활을 했지만, 김선욱이 아직도 겨우 삼십대 초반인 것이 팬의 입장에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올해는 상황이 좀 나아져서 세계 곳곳에서 연주활동을 이어갈 수 있기를. 아, 그리고 풍성한 머리숱은 피아니스트의 멋짐을 약간은 상승시켜주는 게 분명하다. 앞으로도 머리카락은 너무 짧게 자르지 말았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