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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복숭아 Aug 17. 2021

『최애, 타오르다』를 읽고서

당신은 지금 무엇에 기대어 살아가고 있습니까?

2002년 봄, 서울 코믹월드에서 만났던 한 노래를 잊을 수 없다.      


당시 중학생이던 나는 코스프레 동호회에 가입하여 여의도 ‘굼벵이관’을 달마다 드나들고 있었다. 때문에 내가 모르던 애니 노래는 없다시피 했는데, 이 노래는 처음 들어보는 것이었다. 그런데 굉장한 인기를 끌고 있었는지 연달아 세 번이나 흘러나왔다. 듣다 보니 과연 그럴 만하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곡의 구성이 지금까지 듣던 한국 가요와는 전혀 달랐다. 무엇보다 신이 났다. 나는 처음 듣는 노래에 맞춰 몸을 흔들어대며, 필사적으로 귀에 들어오는 가사를 기억하기 위해 노력했다. 아직 핸드폰이 대중적으로 보급되기 전이었다. 어떤 노래를 찾으려면 가사를 필사적으로 기억한 뒤 집에 가서 컴퓨터로 검색을 해봐야 했던 시절이었다.     


기억에 남은 가사는 끊임없이 반복되던 ‘A beautiful street’뿐이었는데, 알고 보니 그 가사는 ‘A beautiful star’였다. 그렇게 나는 모닝구 무스메モーニング娘。의 노래 <そうだ!We're ALIVE>를 만났다.  



우사미 린의 아쿠타가와 수상작 『최애, 타오르다』를 읽은 뒤 가장 먼저 떠오른 건 20년도 더 지난 과거의 내가 모닝구 무스메에 처음 ‘입덕’하게 된 순간이었다. 그리고 새삼 깨달았다. 나, 이렇게나 덕질을 오래 했음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그때를 다시금 돌이켜본 적이 없었구나.     


우사미 린의 『최애, 타오르다』는 경향신문에서 연재되고 있는 [김민정의 도쿄 책갈피]를 통해 처음 접하게 되었다.

‘아이돌 팬의 심리로 본 현대사회’라는 문구가 나를 사로잡았고 이건 내가 꼭 읽어야 하는 책이라고 생각했다. 일본 아이돌을 20년 넘게 덕질하고 있는 바로 이 내가, 읽어야 하는 책이라고. 


그리하여 숨도 안 쉬고 독파한 바, 과연 ‘아이돌 덕후의 심정을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구나’란 느낌을 가장 먼저 받았다. 예를 들면 주인공 ‘아카리’가 최애 ‘우에노 마사키’를 보고 반해버린 순간을 묘사한 이런 부분이라든가. 


p.15 제일 먼저 느낀 것은 통증이었다. 순간적으로 깊이 파고드는 예리한 통증. 그다음엔 밀쳐졌을 때 오는 충격과도 비슷한 통증. 창틀에 손을 올린 소년이 방 안으로 몰래 들어와 짧은 부츠를 신은 발끝을 달랑달랑 흔들었을 때, 그의 작고 뾰족한 부츠 끝이 내 심장을 파고들더니 무심하게 걷어찼다. (…) 하나의 통점으로부터 쫙 퍼지듯이 육체가 감각을 되찾았고, 조악한 영상에서 뿜어져 나오는 색과 빛으로 세상이 선명해졌다. 


어떤 느낌인지 너무나도 잘 알 수 있었다. 나 역시 수없이 겪었던 '통증'이기 때문이다. 어떤 작품에서 갑작스럽게 최애나 최애캐가 생겨났을 때 겪는 심장의 찌릿함을, 덕후들은 흔히 '덕통사고'라고 표현한다. 적절치 않은 단어라는 지적도 있지만 전혀 예상치 못한 그 찌릿, 한 아픔을 대체 무어라고 묘사해야 한단 말인가? 적어도 나는 아직 대체어를 찾지 못하였다.  


지금 좋아하는 멤버들에게 반해버린 순간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모닝구 무스메의 11기 멤버인 오다 사쿠라가 혼자 해파리 나물을 먹으면서 신이 나 고개를 까딱이던 그 순간과,



68번째 싱글 <LOVEペディア> 뮤직비디오에서 2절 첫 구절을 부르는 야마자키 메이의 너무나도 청량한 목소리를 들었던 그 순간을.  



'우에노 마사키'에게 입덕한 순간부터 '아카리'의 모든 순간은 오로지 '마사키'만을 중심으로 공전한다. 


p.34 중을 좋아하면 중이 입은 승복의 터진 실밥까지 사랑스럽다. 그런 거다.

p.38 나는 창문에 비친 어둡고 따뜻해 보이는 나의 입 속 건조한 혀를 보며 소리 없이 가사를 흥얼거렸다. 이러면 귀에서 흐르는 최애의 목소리가 내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기분이 든다. 내 목소리에 최애의 목소리가 겹치고, 내 눈에 최애의 눈이 겹친다.

p.43 최애가 파란색이니까 나는 내 주변을 완벽하게 파란색으로 물들였다. 파란 공간에 잠기면 안심할 수 있다.

p.82 학교에 다닐 때, 나는 최애의 음악을 들으며 등교했다. 여유 있는 날에는 느린 발라드, 서두르는 날은 업템포 신곡을 들으며 역을 향해 걸었다. 곡의 속도에 따라 역에 도착하는 시간은 크게 달라진다. 보폭부터 발을 옮기는 리듬이 듣는 곡에 지배된다.


나도 '아카리'처럼 굴었다. 아니 모든 덕후들이 그래왔고, 지금도 그러고 있을 것이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최애가 부르는 노래에 코러스를 넣으며 완벽한 화음에 스스로 감동해본 적, 최애가 사입은 옷을 똑같이 사입은 적, 최애가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를 들은 적, 최애가 아끼는 물건이나 멤버 컬러로 주변을 온통 물들인 적, 기분이 좋아도 최애의 노래를 듣고 기분이 나빠도 최애의 노래를 들은 적 없는 덕후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 감히 단언해본다.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것으로 인생을 지탱하며 살아간다. 나도 그랬다. 우울증이 극도로 심해지면서 대인기피증과 공황발작이 함께 찾아온 적이 있었다. 병증 때문에 그토록 들어가고 싶어 했던 회사를 퇴사해야만 했다. 까닭 모를 두려움에 이불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할 때도 많았다. 매일매일 울었다. 끔찍한 시간들이었다. 그런데 그런 와중에 모닝구 무스메가 내한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 순간 나는 구원을 받은 듯했다. 퇴사한 뒤에 모닝구가 내한을 하다니. 이건 운명이었다. 백수라는 사실이 갑자기 축복으로 느껴졌다. 부랴부랴 비행 스케줄을 확인하고 멤버의 응원봉을 구입했다. 새벽같이 일어나 인천 공항으로 가서 최애들을 직접 보았다. 아아, 나는 살아 있구나. 살아 있어서 정말로 다행이다, 라고 진심으로 생각했다.  아마 앞으로의 인생을 통틀어 보더라도 그만큼 살아 있다는 것에 감사한 순간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아카리'의 최애는 폭행이라는 어마어마한 사건을 일으키며 또다시 '아카리'의 세계를 뒤흔들어놓고, 이윽고 연예계 은퇴 선언을 해버린다.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늘 그렇다. 우리의 수많은 최애는 언제나 불현듯 나타났다가 갑자기 사라져버린다. 모든 에너지를 불태웠다며 후련하게 이야기하는 그들 뒤에 남은 것은, 전부 불태우지 못한 '덕후'들 뿐이다. '아카리' 역시 그러하다. '아카리'의 마음 둘 곳은 언제나 '마사키' 하나뿐이었는데 급작스럽게 중심축이 사라진 것이다. 안 그래도 학교와 가정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사회 단위에서도 어려움을 겪던 '아카리'의 생활은 순식간에 무너진다. 


p.130 자업자득. 자기가 한 행위가 자기에게 돌아오는 것. 살을 깎아 뼈가 되는 것. 최애를 파는 일은 내 생업이 분명했다. 일평생을 바쳐 그를 응원하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죽은 후의 나는 내 뼈를 스스로 주울 수 없다. (…) 왜 나는 평범하게 생활하지 못할까. 인간으로서 최저한의 생활이 왜 마음대로 안 될까. 처음부터 망가뜨리려고, 어지럽히려고 한 게 아니다. 살아 있었더니 노폐물처럼 고였다. 살아 있었더니 내 집이 무너졌다.

p.131 항상 최애의 그림자가 겹쳐져 있는 나는 이인문의 체온과 호흡과 충동을 느껴왔다. 개에게 그림자를 물려 울던 열두 살 소년이 생각났다. 줄곧, 태어나서 지금까지 내 살이 무겁고 성가셨다. 이제는 살이 전율하는 대로 내가 나를 부수려고 했다. 엉망진창이 됐다고 생각하기 싫으니까 내가 엉망진창을 만들고 싶었다.


비참할 정도로 한없이 밑바닥으로 떨어지는 심리를, 우사미 린은 마치 핀셋으로 머리카락을 집어올리듯이 날카롭게 집어낸다. 덕질을 하지 않고서야 이럴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진짜로 덕질을 해보지 않았을까? 작중 '아카리'의 최애로 등장하는 '우에노 마사키'의 폭력 사건은, 일본에 실제 존재하는 혼성그룹 AAA의 남자 멤버 '우라타 나오야'가 2019년에 폭행 사건을 일으킨 뒤 탈퇴한 사건을 모티브로 삼고 있는 듯하다. 그 또한  어쩌면? 혹시… 어쩌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최애, 타오르다』가 조금 아쉬웠다. 전체적으로 자꾸만 와타야 리사의 『발로 차주고 싶은 등짝』이 떠올랐다. 어쩔 수 없다. 이 두 작품은 비슷한 냄새를 풀풀 풍기니까. 


와타야 리사는 『발로 차주고 싶은 등짝』으로 2004년 역대 최연소로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했고, 그 작품에는 영원히 닿을 수 없는 아이돌 '올리쨩'을 덕질하는 '니나가와'와 그런 '니나가와'를 바라보는 '하츠'가 등장한다. 작품은 '하츠'의 시점으로 전개되는데, '니나가와'가 '올리쨩'에 대해 품고 있는 마음만큼 '하츠' 또한 '니나가와'에게 어둡고 끈적거리는 감정을 품고 있다. 그 감정은 '발로 차주고 싶은 등짝'이라는 표현으로 수렴된다. 게다가 와타야 리사는 『발로 차주고 싶은 등짝』 이후 4년의 공백기를 갖다가, '일본 문단의 아이돌'로서 떠받들어지던 그동안의 소회를 담아낸 것처럼 보이는 장편소설『꿈을 주다』를 발표한다. 어딘지 모르게 비슷하지 않은가? 


『발로 차주고 싶은 등짝』을 포함하여 '아이돌 덕후'의 심리를 다루는 굉장히 다양한 콘텐츠를 보고 들었다. 당연하다. 내 자신이 '아이돌 덕후'니까. 그래서 『최애, 타오르다』는 조금 더 깊이 가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기대보다는 그러지 않아서 조금 아쉬웠다. 오히려 내가 너무 아는 것이 많았기에 깊은 이야기를 기대했고, 그 때문에 아쉽게 느꼈을 수도 있다. 어디까지나 나만의 감상일 뿐.

 

개인적으로는 만화책 『최애가 부도칸에 가 준다면 죽어도 좋아』나 『츠즈이 씨 시리즈』에서 드러난 '광기'가 덕후의 마음을 좀 더 적확하게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참고해보고 싶으신 분들은 이쪽을 봐도 좋겠다. 다만 『최애, 타오르다』를 포함한 해당 콘텐츠들은 일본 아이돌 덕질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지 못하면 이해하기 힘들 수도 있으니 이 점을 참고하셔야 할 듯하다. 지하돌이라는 개념과 함께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체키회, 그리고 팬 사인회와는 전혀 다른 악수회 등.


『최애, 타오르다』도 재밌었지만 우사미 린의 등단작 『엄마』가 더 궁금하다.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엄마를 둔 주인공의 이야기를 다루었다고 하는데 대체 어떤 내용이 들어 있을지. 출간 예정작이라고 하니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려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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