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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복숭아 Apr 12. 2023

요즘 아이들은 '자축인묘 진사오미…'를 어떻게 외우나요

"아마 죽을 때까지 기억할 우리 세대만의 돌림노래일 것이다."


“똘기 떵이 호치 새초미 자축인묘

드라고 요롱이 마초 미미 진사오미

몽치 키키 강다리 찡찡이 신유술해

우리끼리 꾸러기 꾸러기 우리들은 열두 동물

열두 간지 꾸러기 수비대”


1996년 당시 7번 채널을 담당하고 있던 KBS 2TV가 〈꾸러기 수비대〉를 방영하지 않았다면 우리들은 대체 십이간지를 어떻게 외웠을까 싶다. 이 글을 쓰려다가 문득, 요즘 아이들은 대체 십이간지를 어떤 방식으로 외우는지, 이 노래가 전해지고 있기는 한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주변의 청소년 자녀를 둔 분들에게 직접 물어보았다. 겸사겸사 그들의 부모인 여러분은 어떠시냐고도 물었다. 그 결과는 아래의 표와 같다.



아예 십이간지 자체를 못 외우는 B를 제외하면 대부분 ‘똘기 떵이 호치 새초미’로 시작하는 〈꾸러기 수비대〉의 주제가는커녕 그런 만화가 있었다는 것조차도 몰랐다. 이 결과를 전해준 조사원(?) 역시 주변을 보면 1982년생까지만 해도 이 노래를 아는데, 1980년생 위로 올라가면 대부분 모르는 것 같다고 했다. 하긴 같이 살고 있는 1983년생도 이미 열세 살이 되어서야 이 만화를 접했기에 십이간지를 외우는 데 큰 도움이 되진 않았다고 했다.


이쯤 되니 이 주제가로 십이간지를 암기했던 연령대가 대강 어느 정도 되는지 추려보고 싶어졌다. 위로는 1985년생까지 올라가는 걸까? 주변의 1985년생 두 명에게 물어봤더니 한 명은 “실제로 〈꾸러기 수비대〉를 보고 외웠다”고 답했고, 다른 한 명은 “친구들은 〈꾸러기 수비대〉를 보고 외웠는데 나는 그 만화를 보지 않아서 소외감을 느꼈다.”라고 답했다.  그렇다면 이 주제가의 도움을 받았던 연령대는 1985~1992년생으로 좁혀진다. 이 만화를 같이 보았던 내 동생이 1992년생인데, 당시 만 나이로 4살이었다. 그 아래로 내려가면 너무 어려서 기억을 못하는 것 같다. 1996년생인 사촌 동생 역시 이 주제가를 잘 모르며, 2004년쯤 재방영된 버전만을 보았다고 한다.


그런데 이렇게 여러 방면으로 조사(?)를 하다 보니 흥미로워졌다. 어쩌다 보니 공부에 도움이 되었을 뿐, 나를 포함한 많은 아이가 이 노래를 ‘그냥’ 외웠기 때문이다. 그냥, 그냥 외웠다. 외우는 데 이유가 어딨어! 그냥 외우는 거지! 맨날 즐겨 보던 만화의 주제가였으니 자연스레 외워졌다. 4-4-4로 라임(?)이 딱딱 끊어져서 외우기도 쉬웠다. 1990년대는 암기에 미쳐 있던 시절이었다. 배움은 곧 암기였다. 읽기 시간에는 동시를 한 편 외워 가야 했다. 즐거운 생활 시간에도 동요를 한 곡 외운 다음 시험을 쳤다. 한자 시간에도 ‘하늘 천’을 50번씩 쓰면서 외웠다. 잘못을 하면 ‘깜지’를 썼고 구구단을 못 외운 아이들은 방과 후에 교실에 남아서 웅얼웅얼 외웠다. 이이는 사, 이삼은 육. 이사팔. 이오십. 원리 같은 건 몰라. 그냥 외울 뿐. 우리(1985~1992)는 그렇게 자축인묘 진사오미 신유술해를 외웠다. 이게 십이간지라는 건 아주 나아중에나 알았다. 그런데! 이렇게 유용한 노래가 지금은 전해 내려오지 않는다니! 구전가요처럼 이어지거나 적어도 그 나이대(1985~1992) 선생님들이 교육 자료로라도 쓰고 있지 않을까 했다. 운동회 때 으레 〈피구왕 통키〉나 〈지구용사 선가드〉의 주제가를 부르는 것처럼. 너무 충격을 받은 나머지 나는 ‘어떻게 자축인묘 진사오미 신유술해를 그냥 외우게 할 수 있어? 그건 너무 비인간적이지 않나…?’라는 생각까지 해버렸다(물론 전혀 비인간적인 일이 아닙니다).


〈꾸러기 수비대〉의 원제는 〈십이전지 폭렬 에트렌쟈十二戦支 爆烈 エトレンジャー〉. 제목에 ‘폭렬’이라는 강렬한 한자가 들어가 있는 것부터 귀염뽀짝(?)한 우리나라 제목과는 전혀 다른 이미지다. 유튜브에 검색하면 금방 나오는 주제가 역시 완전 다르다! 어딘지 〈드래곤 볼〉 주제가를 연상시키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도대체 어쩌다 이렇게 멋진 노래가 탄생하게 된 건지 그 후일담이 궁금할 지경이다. 실제로 〈꾸러기 수비대〉는 우리나라에선  잊을 만하면 인상적인 주제가로 계속 회자되고 있지만, 정작 원래 만들어진 일본에서는 아는 이가 거의 없는 작품이라 한다. 


그렇지만 이 작품을 만든 제작사 중 한 곳은 2000년대에 이르러 〈바케모노가타리〉나 〈마법소녀 마도카☆마기카〉 같은 여러 유명작을 만들어낸 샤프트*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 등으로 유명한 호소다 마모루 역시 연출 스태프로 이름을 올렸다. 다만 제작사 간 저작권 분쟁이 일어나면서 재방영은 물론 상품 제작 및 판매가 아예 멈춰버리는 바람에 잊히게 된 것인데, 여러모로 비운의 명작 취급을 받고 있는 듯하다. 


〈꾸러기 수비대〉는 주제가의 가사처럼 푸른 바다 위 요정의 낙원인 원더랜드에서 살고 있던 열두 마리(혹은 열두 명)의 십이지 전사들이 통치자인 ‘오로라 공주’의 명을 받아 엉망이 된 동화나라를 재건하고, 그 과정에서 마녀 ‘해라’를 저지하고 물리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대장인 쥐 ‘똘기’지만, 이 만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본 아이들은 알았을 것이다. 사실 이야기의 중심에는 호랑이 ‘호치’가 있다는 걸 말이다. 

사실 마녀 해라의 정체는 호치의 여자친구 고양이 ‘쿠키’였다. 오로라 공주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십이지 설화에서처럼 달리기를 통해 꾸러기 수비대 전사들을 뽑기로 결정한다. 쿠키 역시 꼭 전사가 되겠다는 마음을 품고 잠자리에 들었지만, 악의 세력인 ‘대마왕 마라’의 꾐에 넘어가 탈락하게 된다. 이에 오로라 공주와 그녀가 통치하는 원더랜드에 앙심을 품고 마녀 해라가 된다. 


해라가 쿠키일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호치는 동화나라에 일어난 문제를 해결하는 와중에도 계속해서 쿠키의 행방을 쫓는다. 그러다 해라의 부하인 ‘사천왕’ 중 ‘2호’와 만나 일종의 썸(?)을 타기도 한다. 쿠키와 닮은 2호의 외모에 어쩌면 그가 쿠키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때 원래 쿠키네 집에 있었던 호치와 쿠키를 닮은 모빌을 이용해 둘의 마음을 표현하는 장면이 나온다. 뭣도 모르는 어린아이였던 나조차 절로 감탄할 정도로 훌륭한 연출이었다. 아, 호치의 짐작은 완전히 틀린 것이 아니었다. 2호는 사실 해라의 분신이었기에 거의 막판에 이르러서 해라에게 흡수된다.) 모든 사건이 해결된 마지막 화에서도 호치는 원래 모습을 되찾은 쿠키가 죄책감에 마을을 떠날 때 그를 붙잡는다. 그리고 언제가 되든 기다릴 것을 약속하며 엔딩을 장식한다. 그리하여 ‘똘기’는 페이크 주인공이었고, 진주인공은 ‘호치’였다는 결말이… 어떤 의미로는 십이지 설화에서 탈락한 고양이에게 굉장히 포커스를 맞춘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내용을 담은 아주 유명한 작품이 하나 더 있다. 바로 타카야 나츠키의 순정만화 〈후르츠 바스켓〉이다.


〈후르츠 바스켓〉에는 이성과 접촉하면 동물로 변신하는 저주에 걸린  열세 명(고양이까지!)의 십이지 인물들이 나온다. 주인공인 ‘혼다 토오루’는 그중에서도 쥐인 ‘소마 유키’와 고양이인 ‘소마 쿄우’ 사이에서 연애 감정을 느끼게 된다. 개인적으로는 유키 캐릭터를 좋아해서 토오루와 이어지길 꾸준히 밀었는데, 쿄우랑 이어졌다는 소식을 듣고는 기분이 묘해지기도 했다(스포일러 죄송합니다. 여담이지만 여기서 뱀으로 등장하는 ‘소마 아야메’는 유키의 형인 데다가 잘생기고 특이한 미남이라 좋아했어요). 지금 돌이켜보면 왜 그렇게 쿄우를 별로라고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내가 어릴 적 살던 곳에는 고양이가 거의 없었다. 〈꾸러기 수비대〉와 〈달의 요정 세일러문〉을 통해 고양이란 생물을 처음 접하다시피 했는데, 하필 후반부에 이르러 마녀 해라가 꾸러기 수비대 대원들을 무참히 죽이는 장면을 보고 매우 큰 충격을 받았다. 지금이야 고양이들을 매우매우 사랑하지만, 20대가 되기 전에는 무서워했다. 거기에 〈꾸러기 수비대〉가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꾸러기 수비대〉 때문에 〈후르츠 바스켓〉의 쿄우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이 말이다! 혹자는 터무니없다고 여기겠지만 나는 나름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해할 수 없다면 그건 당신이 〈꾸러기 수비대〉를 보지 않았기 때문이야! 해라가 주는 압도적인 공포감을 느껴본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비명을 지르며 죽어가던 ‘마초’와 ‘미미’와 ‘요롱이’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고, 나는!


한때는 이 작품에 등장하는 띠별 동물을 두고 내가 더 멋있네, 네가 더 ‘간지’ 나네, 하고 경쟁하기도 했다. ‘드라고’는 용이라 힘이 세고 멋있다며 자랑스러워하는 친구들 사이에서 빠른년생인 나는 뱀인 ‘요롱이’가 너무 멋없게 생겼다는 생각에 조금 주눅 들었던 기억이 난다. 별일 아닌 것 같지만 어린 나이에는 꽤 상처였다. 엄마한테 왜 나를 학교에 일찍 보냈느냐고 투정을 부린 적도 있다. 그때마다 엄마는 “왜, 설희 너처럼 요롱이도 책을 좋아하고 똑똑하잖아.”라는 말로 위로 아닌 위로를 해주었다. 겉모습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기 십상이었던 어린 시절에 크게 위안이 되는 말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요롱이와 내가 닮았다는 사실에 나름 동질감을 느꼈던 기억이 난다.


그처럼 띠에 집착하던 시절도 있었건만 이제는 아-무 생각이 없다. 나 또한 어느덧 신문이나 잡지 등에서 볼 수 있는 띠별 운세 코너에 출생 년도가 적히는 나이가 되었고, 1989년생 뱀띠에게 금전운이 있다고 쓰여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내 띠가 무엇인지 곱씹을 일도 별로 없다. 지금은 바야흐로 MBTI의 시대니까. 


그래도 여전히 십이간지를 쓸 일이 있으면 중얼중얼 똘기떵이호치새초미를 왼다. 아마 죽을 때까지 기억할 우리 세대만의 돌림노래일 것이다. 이제 이 노래를 아는 세대는 우리뿐이고, 우리 세대가 잊어버리면 사라지고 말 노래라고 생각하면 어쩐지 서글퍼진다. 이런 식으로 사라진 것들이 무수히 많겠지만, 〈꾸러기 수비대〉주제가는 사라지도록 두기에는 너무나도 아까운 노래다. 그때나 지금이나 십이간지 외우기를 어려워하는 아이들은 많을 텐데. 이 노래를 부르면 십이간지를 편하게 외울 수 있다고 어딘가에라도 크게 외치고 싶은 기분이다. 이런 ‘꿀팁’ 우리만 알 수 없다고, 카드뉴스라도 만들어서 SNS에 광고를 돌리고 싶은 심정이다. 그리하여 와, 그 노래를 너희도 배우는구나, 하며 세대를 넘어 공감하는 경험을 해보고 싶은 마음이다.



* 당시에는 하청 전문 업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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