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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복숭아 May 24. 2023

다들 롤러블레이드 신고 등교해본 적 있죠?

<카드캡터 체리> - 내가 이 동네의 '유체리'가 되겠다는 마음 하나로


1999년 여름방학을 앞둔 어느 아침, 나는 결심했다. 롤러블레이드를 신고서 등교하기로. 〈카드캡터 체리〉를 본 지 한 달째 되는 날이었다.


그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새로운 결심을 했다. 다시는 롤러블레이드를 신고 등교하지 않겠다고. 실내화를 신은 채 털레털레 걸어오는 길, 가방 안에 억지로 욱여 넣은 롤러블레이드가 무거웠다. 초등학교 4학년 1학기가 저물고 있었다.


〈카드캡터 체리〉*는 1999년 6월부터 2000년 9월까지 서울방송(지금의 SBS)에서 방영했던 만화영화다. 내가 〈웨딩피치〉에 열광하며 마법소녀물을 본격적으로 보기 시작했던 1996년.  기념비적인 작품 〈달의 요정 세일러 문〉을 알게 되었던 1997년. 마법소녀물은 아니지만 각각 ‘천사소녀’와 ‘마법소녀’란 이름을 걸고 나온 〈천사소녀 네티〉와 〈마법소녀 리나〉 역시 1996년부터 1997년에 걸쳐 방영된 뒤, 국내 방송계에는 잠시 마법소녀물의 휴지기가 찾아왔다. 그리고 그로부터 2년 후인 1999년에 〈카드캡터 체리〉가 등장한 것이었다! 내로라하는 작품들이 마무리된 뒤에 방영되었던지라 열심히 챙겨 봤던 기억이 난다. 거기다 주인공인 ‘체리’를 비롯하여 등장인물 여럿이 전부 나와 같은 초등학생이었기에 더 쉽게 이입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당시 서울방송에서 꽤 야심차게 들여온 작품이 아닌가 싶다. 정식 방영하기 1~2주 전부터 방영 예고편을 틀어줬으니. 그걸 보자마자 이미 〈카드캡터 체리〉에 푹 빠져버린 난 정식 방영을 손꼽아 기다렸다. “안녕! 내 이름은 체리야. 유체리. 카드캡터지. 카드캡터란 마법의 카드를 사로잡는 마법사란 뜻이야.” 뭐 대충 이런 대사가 나왔던 것이 어렴풋하게 떠오른다. 그때엔 나름 잘나갈 것 같은 작품이면 정식 방영을 하기 전에 이런 예고편을 틀어주곤 했다. 내 기억으론 〈에스카플로네〉와 〈명탐정 코난〉도 방영 예고편이 있었다.**


〈카드캡터 체리〉에 지나치게 과몰입한 나머지 롤러블레이드 등교까지 시도했던 나는 2000년에 만화책 대여점이 있는 동네로 이사를 간다. 그리고 만화에 관심 있는 아이들이 무척 많았던 그곳에서, 나는 〈카드캡터 체리〉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이번엔 종이 만화로. 중학생이 되어 ‘용돈’이란 걸 받기 시작한 나는 말할 수 없이 폭주하기 시작했다. 〈카드캡터 체리〉가 연재되던 만화잡지 《밍크》를 매달 구입했고(그때쯤 장래희망은 만화가가 되었다.) 내가 살 수 있는 굿즈란 굿즈는 전부 사 모으기 시작했다. 6공 다이어리 표지에는 왕자 의상을 입은 체리의 일러스트 엽서를 끼우고 다녔다. 체리 브로마이드를 방문에 걸어두었고 침대에 누우면 마주 보이는 벽에는 특대 포스터를 붙였다. 책상 앞에도 수입 문구점에서 사 온 체리 엽서들을 붙여서 ‘벽꾸’를 했다. 맹세컨대 내가 처음으로 가장 많은 굿즈를 샀던 만화영화일 것이다.


하지만 모두가 알고 있듯이, 종이만화로 만난 〈카드캡터 체리〉는 분위기가 전혀 달랐다. 만화영화는 어린이의 시선에 맞게 많은 부분을 수정한 것이었고… 그런 과정을 전혀 거치지 않은 종이만화는 어디까지나 작가집단 클램프(CLAMP)의 입맛에 맞는 내용이 그득그득했다. 이전까지 심의와 검열을 거친 건전한 내용만을 접했던 어린이 백설희는 그렇게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게 되었다. 바야흐로 청소년 백설희가 된 것이었다! 나는 클램프의 작품 중 가장 포근하고 따뜻한 작품인 〈카드캡터 체리〉를 통해 클램프의 만화 세계에 본격 입문했다. 2001년의 일이었다….


세기말을 다룬 대표 작품 〈X〉를 시작으로 그들의 초기작인 〈클램프학원탐정단〉, 그림체가 전혀 달라서 좀 놀랐던 〈좋으니까 좋아〉(나중에야 클램프가 네 명의 여성으로 이루어진 그룹이며, 〈좋으니까 좋아〉는 메인 작화가인 ‘모코나もこな’가 아닌 서브 작화가 ‘네코이猫井’가 그렸다는 것을 알았다.)〈카드캡터 체리〉 다음으로 푹 빠졌던 〈쵸비츠〉, 〈XXX 홀릭〉, 일본 애니메이션 전문 잡지 《뉴타입Newtype》에 연재되었던 〈코바토〉까지 클램프의 다양한 작품들을 소화하며 착실히 ‘덕후’의 길을 밟아나갔다. 하지만 여기서 양심고백. 사실 저는 〈성전〉과 〈클로버〉와 〈엔젤릭 레이어〉를 보지 않았습니다. 〈동경바빌론〉은 30대가 되어서야 봤습니다. 오타쿠 실격이다!


아, 그리고 〈레이어스〉가 있군. 이 작품 또한 〈카드캡터 체리〉처럼 원작 만화책보다 만화영화를 먼저 접한 케이스인데 국내 방영 역시 2년 앞서 이루어졌다. 6번 채널, 그러니까 SBS에서 보곤 했는데, 그러고 보니 클램프의 애니메이션을 SBS에서 전부 다 가져왔네. 하지만 그림체는 물론이고 장르도 마법소녀물과 판타지 로봇물로 전혀 달랐기에 어린 나는 같은 작가의 작품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그리고 여러모로 충격적이었던 내용 때문에 〈카드캡터 체리〉만큼 정을 붙이지도 못했는데… 이 얘기는 다음 기회에….


여하튼 지금도 나는 착실한 〈카드캡터 체리〉 덕후의 길을 걷고 있는 것 같다. ‘같다’라는 불확실한 형용사를 쓰는 이유는 윗윗 문단에 ‘오타쿠 실격이다!’라는 문장을 써서… 어쨌거나 얼마 전에도 〈카드캡터 체리〉 피규어를 중고로 구입해 왔고 일러스트집도 샀으니. 덕심은 아직 살아 숨쉬고 있는 듯하다.


사실 이 글을 쓰려고 직장 동료 C 씨(〈천사소녀 네티〉 편에도 잠시 등장했던)에게 〈카드캡터 체리〉 구판 단행본을 전권 구입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카드캡터 사쿠라〉로 출간된 완전판과 애장판에는 다소 정이 가지 않았는데, 마침 직장 동료 C 씨가 구판 단행본을 처분하고 있어서 우연히(?) 구입한 것뿐이다. 이름이 ‘사쿠라’가 아니라 ‘체리’이기 때문에. 일본 문화 개방이 되기 전에 모든 일본산 대중문화는 로컬라이징을 거쳐야 했는데, 개인적으로 ‘키노모토 사쿠라木之本桜’가 ‘유체리(아마도 성씨는 버들 유柳)’가 된 것은 〈슬램덩크〉 버금가는 훌륭한 로컬라이징이라 본다.


아무래도 그렇지. ‘세라’나 ‘피치’ ‘샐리’ ‘리나’보다는 ‘신지수’라는 친구와 ‘유도진’이라는 오빠가 있는 ‘유체리’에게 이입하기가 더 쉽겠지. 그것 때문에 나는 1999년 여름, 현관에 앉아서 결연한 마음으로 롤러블레이드에 발을 집어 넣었던 게 아닐까. 만류하는 엄마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흘리며, 내가 이 동네의 ‘유체리’가 되겠다는 마음 하나로.




* 원제는 〈카드캡터 사쿠라カードキャプターさくら〉이다.


** 돌이켜보니 내가 방영 예고편을 봤던 세 작품이 각각 다른 장르의 만화영화인 게 좀 재밌다. 마법소녀물, 메카물(로봇물), 추리물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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