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벨린다 루스콤 저, <결혼학개론>에 대한 서평
벨린다 루스콤은 결혼, 육아, 대인관계 등을 주제로 <타임>지에 20년간 칼럼을 써온 저널리스트이자 평론가이다. 이 사람이 쓴 <결혼학개론>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타임지 저널리스트라는 이력답게 내공이 만만치 않다고 생각했던 부분은 ‘목차’에 있다.
이 책은 1. 익숙함의 문제, 2. 잘 싸우는 것이 중요하다, 3. 영원한 숙제 돈, 4. 가족이라는 이름, 5. 뜨거운 밤을 위하여, 6. 현명하게 도움받기, 이렇게 여섯 챕터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중 첫 번째 목차와 두 번째 목차를 ‘익숙함의 문제’, ‘잘싸우는 법’에 할애한 것이 인상깊었다.
나는 결혼이라는 주제와 관련해서 저자의 이런 목차구성을 보고 내공을 판단할 만큼 전문가는 아니다. 오히려 거의 지식이 없다고 보아도 무방한 수준이다. 내가 위 목차를 보고 이 책의 내용에 신뢰를 부여해도 되겠다고 생각한 것은, 아마 전적으로 나의 개인적인 경험과 관련 있을 것이다. 나는 20대와 30대 초반을 지나오면서 몇 번의 연애를 통해 익숙함의 문제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 잘 싸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등을 고민했었는데, 이러한 고민은 미래에 벌어질 사건(?)인 결혼을 생각할 때도 동일하게 이루어졌다. 연애와 결혼을 크게 분리해서 생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일까. 몇 번의 만남과 이별을 겪으면서, 익숙함의 문제를 잘 극복하는 법, 현명하게 싸우는 법이 연애든 결혼이든, 특별한 두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정말 중요한 핵심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익숙함의 문제, 이것을 생각하면 머릿속에서 자동적으로 재생되는 장면이 있다. 이 문제를 가지고 아빠와 차 안에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장면이다. 당시 나는 한 사람과 3년 가까이 만남을 이어가고 있었는데, 아빠와 북한산으로 등산을 가며 차 안에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고민상담 식으로 당시 만남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었다.
요지는 이렇다. 너무 좋은 사람인 것은 알겠는데, 내 마음이 뜨겁지 않다는 것이었다. 설렘보다는 익숙함이 더 컸고, 나는 이 익숙함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내 감정에 어딘가 문제가 있는 것처럼 느껴졌고, 설레는 만남을 하는 것이 연애에서의 정답인 양 생각했다. 당시 아빠는 정말 좋은 사람이라면 그냥 계속 만나보라는 조언을 해주셨다. 연인이나 아내에게 뜨거운 감정, 설렘을 평생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거라고. 평생 설렐 수 있는 소울메이트를 찾기보다, 그 사람을 사랑하겠다는 의지와 노력이 중요하다고.
당시에는 와닿지 않았다. 나는 의지와 노력 이전에 자연스럽게 생기고 유지되는 감정으로서의 사랑에 더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던 것 같다. 의지와 노력을 소환할 시점이 되었다는 것은 이미 내 마음과 감정이 예전과 같지 않다는 것을 뜻하는 게 아닐까? 더 직설적으로 표현하면 내가 마음이 식은 것이 아닐까? ‘내가 이 사람을 사랑해야지’하는 의지를 가지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생기는 마음과 감정이 사랑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리고 설렘보다는 익숙함에 완전히 정착된 부모님의 사랑의 방식은 뭔가 나와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었다. 오랜 부부가 ‘정으로 산다’는 말에 대해서 부정적이었고, 나는 그렇게 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흐르고 나니 당시 아빠가 했던 말이 다르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뇌를 가진 인간으로 살아가는 이상, ‘익숙함’의 문제는 필연이다. 비단 연인관계, 부부관계뿐만 아니라 재물, 산해진미, 쉽게 경험하지 못할 색다른 체험, 그 무엇도 평생 같은 자극과 감정을 줄 수 없다. 이전에는 ‘익숙함’을 예외적인 현상, 부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생각했었고, 마음이 식었다는 신호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반대로 익숙함을 디폴트로 생각하게 됐다. 이제 남은 과제는 이 익숙함의 문제를 어떻게 잘 받아들이고, 해결해나갈지에 대한 것이다.
익숙함이라는 감정은 잘 다뤄지지 않으면, 두 사람의 관계에 문제를 일으킬 수 있고, 단순히 지루함과 불만족을 넘어 훨씬 어둡고 파괴적인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 결혼학개론, 28면.
저자는 질문을 던진다. “두 사람 사이에 아무런 신비감도 남아 있지 않을 때, 새로운 공통점을 발견하고 기뻐하는 작은 즐거움도 느끼지 못할 때, 고치지 못하는 상대의 수십 가지 단점 떄문에 미칠 것 같은 기분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 우리는 어떻게 이런 부정적인 생각을 떨쳐내고 상대를 무시하고 경멸하지 않을 수 있을까?”
저자가 제안하는 여러 방법들(가령, 배우자에게 감사함을 표현하는 것, 배우자에게 무언가를 부탁하는 것)이 있지만, 그 외에 ‘사고방식’의 전환을 한가지 언급하고 싶다. 여러 심리치료사오 연구자가 부부 사이의 익숙함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좋은 방법으로, ‘익숙함을 무기가 아닌 도구로 사용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
흔히 부부관계를 공동기업에 종사하는 파트너처럼 한 팀으로 생각하는 커플은 이 방법을 쉽게 해내는데, 어떤 사람과 함께 시간을 보낼 때, 결혼생활이든, 가족을 이루는 일이든, 장기적 파트너십이 필요한 그 어떤 일이든, 그 일을 해내고 있다는 목적의식을 갖는 것이다. (중략) 중요한 것은 팀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만들어가는 파트너십이 필요하다. 파트너십은 그 자체만으로 가치가 있다. 우리는 남편이나 아내를 위해, 혹은 나 자신을 위해 그 자리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무언가를 위해 그 자리를 지키는 것이다.
- 결혼학개론, 44면.
이른바 이런 ‘관계 중심적 사고’는 행복한 부부관계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핵심적인 열쇠라고 한다. 나와 당신, 그리고 우리 두 사람만 생각하면 익숙함의 문제를 극복하기 어려울 수 있지만, 두 사람 이상의 무언가를 위해 자리를 지킨다는 의지를 가지고 노력한다면 익숙함의 문제를 지혜롭게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아빠와 나누었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아빠는 연인관계를 그저 자연스러운 감정에 맡길 생각만 하지 말고, 정말 좋은 사람이라면 그 관계를 유지하고자 하는 의지를 가지고 노력해야한다는 조언을 해주셨다. 지금에서야 느끼는 건 아마 아빠가 먼저 부부관계, 그리고 가정이라는 공동체를 잘 유지하고자 의도적인 결심을 하고 노력해오셨던 게 아닌가 싶다. 나는 더 이상 이런 노력을 부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누군가를 향한 설레는 느낌이나 그 사람에 대한 열정적인 애정 표현보다는, 물론 그런 것도 좋기는 하지만, 진정한 사랑은 한 사람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내던지는 마음, 그 사람의 삶을 조금 더 좋게, 조금 더 신나게, 조금 덜 힘들게 할 수 이싸면, 무엇이든 하겠다는 의도적인 결심이다.
- 결혼학개론, 64면.
‘상대’를 지칭하는 말로 시작하는 건 좋지 않다. 더 안 좋은 건 “당신은 항상-” 혹은 “당신은 늘-”로 시작하는 경우다. 이런 말은 상대를 비난하기만 할 뿐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부부싸움의 기본 원칙 중 하나는 문제가 있을 때 상대가 아닌 ‘나’의 관점에서 표현하는 것이다.
- 결혼학개론, 86면.
부부 사이의 싸움은 승패를 가르는 싸움이 아니다. 상대방에게 상처를 입히고 상대방을 굴복시키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방을 비난하기보다 나의 생각과 감정을 알리는 것을 최우선목표로 두고, 상대방을 모욕하거나 상대방에게 상처주지 않도록 신중해야한다.
예전에 보았던 세바시 강연 중 매우 인상깊은 강연이 하나 있다. 이 강연을 본 이후로 잘 싸우는 것이 연인 사이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문제일 수도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3CN9DdATYk0
그러면 어떻게 해야 우리는 성숙한 방어기제를 갖출 수 있을까요? '세련되게 표현해야겠다.' 라고 중심을 잡아야 돼요. 그러면 '세련되게 표현하는 건' 뭔가. 그냥 무조건 이 감정이나 기분을 억압하는 것도 아니고, 뭐 아무렇게나 막 남 다치든 말든 안전을 해치면서 표현하는 것도 아니고, 세련된 표현은 무엇인가. 이 세련된 표현의 키워드는 여섯 글자입니다. '내가 원하는 건'입니다. 스트레스가 올라온 상황이기 때문에 주어가 '너'가 되면 안돼요. "너 왜 그래?", "너가 이렇게 했었어야지!" 이거는 그냥 비난이 되고 싸움이 될 뿐이에요. 어떤 변화도 이끌어 낼 수가 없습니다. "내가 원하는 건 '뭐뭐뭐'다."라고 이야길 해줘야 돼요. "나는, 내 방어기제는, 어, 좀 혼자 있는 거야.", "나는 스트레스를 받으면 5분이건 10분이건 좀 혼자 있어야돼. 내가 원하는 건 한 10분만 건드리지 말고 기다려주는거야." 라고 얘기할 수 있어야 돼요. "또 나는 무슨 일만 있으면 좀 말을 해야 돼, 말을. 어? 한 2천 단어 뱉어야 돼. 그러니까 내가 힘들어서 얘기할 때 내가 원하는 건 그냥 끄덕끄덕만 해줘." 이렇게 얘기를 좀 해줘야 됩니다. 제발 해결책 좀 제시하지 말고. "그건 네 잘못인 거 같애." 이딴 말 좀 하지 말고. 내가 원하는 건 뭐라고 반복해서 설명을 해줘야됩니다.
위 동영상 14:42~16:18 구간
위 강연만큼이나 유용한 방법론을 <결혼학개론>에서도 한가지 소개하고 있다. 바로 보스턴에서 심리치료사로 일하며 결혼 관련 베스트셀러 작가로 이름을 알린 테렌스 리얼의 ‘피드백의 바퀴’라는 3단계 전략이다. 이 방법은 다음과 같다.
1단계 : 배우자가 내 말을 들어줄 수 있는 상태인지 물어본<다. 당연한 말로 들리겠지만, 그만큼 꼭 필요한 절차이다.
2단계 : 배우자에 대한 사랑을 표현한다.
3단계 : 다음 네 가지를 말한다.
1. 내가 본 것이나 들은 것 중 문제라고 생각되는 것을 말한다. “당신이 이러이러했어”라고 말하지 말고, “내가 이러이러한 것을 봤어”라고 말한다.
2. 본 것(혹은 들은 것)에 대한 결과라고 내가 생각한 것을 말한다. “그래서 이러이러한 결과가 나타났어”라는 식으로 표현한다. 즉, 추측이 아닌 내가 받은 인상만 말한다
3. 그래서 어떤 기분인지 말한다.
4. 다음번에는 어떻게 하면 좋을지를 말한다.
아마 여기까지만 하면 무언가 찝찝한 기분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저렇게 말을 했는데 상대방이 아무런 반응이 없다면? 상대방이 잘못을 해서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됐는데 사과를 한다거나 다음부터는 조심하겠다는 그런 다짐도 받지 못했다면? 무언가 끝나지 않은 기분이 들지 않을까.
그러나 저자는 여기까지만 하고 끝내는 것이 좋다고 조언한다. 결론에 연연하지 말고 어쨌든 상대방에게 내 말을 잘 들어주어서 고맙다고 말하고, 문제를 더 확대하지 말라고 조언한다. 당장 그 순간 문제를 확실히 종결짓는 느낌은 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이 확실히 상대방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다. 상대방은 내가 자신을 존중한다고 느낄 것이고, 자신의 문제에 대해 스스로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질 것이다.
무엇보다도 가장 피해야 하는 태도는 냉소적인 태도이다. 저자는 냉소적인 태도를 부부간의 싸움에서 가장 집요하게 사용되는 반칙이라고 표현한다. 냉소적인 태도는 상대를 무시하는 태도를 동반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에는 여러 가지 형태가 있다. 짜증 섞인 목소리로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 상대의 고민거리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 너무 과장된 말로 엉뚱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이에 속한다. 꼭 말로 표현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한심스럽다는 표정으로 눈을 내리깔거나, 고개를 돌리고, 팔짱을 기고, 휴대전화를 내려놓지 않는 모습으로도 냉소적인 태도가 표현된다. 이 모든 것이 상대를 무시하는 행동이다.
앞서 피드백의 바퀴라는 3단계 전략을 소개한 테렌스 리얼은 그의 책 <결혼의 새로운 법칙>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부부싸움이 해결되지 않고 반복되는 이유는 두 사람 중 누구도 상대를 진정으로 이해하려 하지 않고, 최악의 모습으로만 상상하려 하기 때문이다.”
글을 마치며 재밌는 기사 하나를 소개하고 싶다.
https://m.news.nate.com/view/20210206n09966
김지혜의 취향은 라면에 계란을 풀어서 먹는 것인데, 남편 박준형은 김지혜와 16년을 같이 살았음에도 그 취향을 모르고 계란을 풀지 않았다. 김지혜는 이에 대해 "여보 고마워 잘먹을껭. 스케줄 나가는 부인을 위해 라면 끓여주는 남편. 결혼 16년차 아직은 서로를 알아가는 단계. 여보 나 계란 노른자 푸는 거 좋아해^^ 참고햐~~" 라며 유머러스하게 표현하고 있다.
사실 박준형씨의 이러한 행동은 충분히 부부싸움으로 번질 수 있는 행동이다. 굉장히 사소한 부분이지만 아내의 입장에서는 나에게 관심이 없고 나를 존중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여지가 있다. 반면 남편의 입장에서는 그래도 아내를 생각해서 라면을 끓여줬는데 취향을 모른다고 한 소리 들으면 갑자기 발끈하는 마음이 생길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부부는 다툼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박준형씨의 행동이 답답할 수는 있는데, 그 행동에 악의가 없다는 것을 알고 너그럽게 봐주는 김지혜씨의 모습, 그걸 유머러스하게 표현하는 김지혜씨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아직 미혼이지만, 결혼이 먼 미래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고 있던 중에 <결혼학개론>을 읽으면서 많은 좋은 생각과 고민을 할 수 있었다. 결혼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준비할 때가 온다면 다시금 이 책을 일독해볼 것 같다.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78068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