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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윤수 Apr 25. 2021

소음을 거르는 기술이 필요한 시대.

- 칼 벅스트롬, 제빈 웨스트 저, <똑똑하게 생존하기>에 대한 서평




1. 나도 모르게 호구가 되어버릴 수 있는 무서운 현실


이 책의 내용은 저자들이 워싱턴대학교에서 강의했던 ‘헛소리 까발리기’(Calling Bullshit)라는 수업을 토대로 한다. 저자들은 왜 이런 강의를 기획하고 학생들에게 가르치게 되었을까? 저자들의 강의 및 저술의 동기는 ‘정치적 관점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이 헛소리에 대항하도록 돕는 것’에 있다고 한다. “왜 모든 사람이 헛소리에 대항해야하는가?”라는 당위에 대해서, 저자들은 “유권자들이 사방에서 들리는 헛소리를 꿰뚫어볼 수 있을 때 비로소 민주주의가 가장 건강해진다”는 철학을 갖고 있는 듯하다.

          

그런데 저자들이 말하는 이런 ‘대의’까지 아니더라도, 헛소리를 꿰뚫어보는 것은(조금 피곤하긴 하지만) 우리의 평범한 일상생활에서 상당히 유용한 스킬이 될 수 있다. <신호와 소음>이라는 책도 있듯이, 수많은 정보가 ‘소음’처럼 범람하고 있는 현 세대에서, 헛소리를 꿰뚫어보는 스킬(원서의 부제에 따르면 이런 스킬을 ‘회의론적 기술’이라고도 칭할 수 있을 것 같다)은 소음을 걸러내고 신뢰할만한 자료를 판별하는 등 우리가 올바른 의사결정을 하는 데에 매우 큰 도움이 된다. 보다 더 쉽고 직관적으로 표현하자면, ‘헛소리에 속지 않는 법’ 아니, ‘호구되지 않는 법’이라고 칭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나를 포함한 수많은 대중들은 매일같이 수많은 헛소리들에 시달리고 있다. 해당 헛소리의 출처는 기사일 수도, 어느 회사의 데이터일 수도, 정부기관의 보도자료일 수도, 아니면 권위있는 학술지일 수도 있다.      

     


2. 누가누가 더 판사를 잘 속이나. 헛소리 전략의 진검승부 현장인 법정!


그런데 나는 좀 특수한 상황에 있다. 헛소리를 꿰뚫어보고, 이를 까발리는 것을 단순한 취미가 아니라 업으로서 하고 있다. 법정에서는 모두가 진실을 말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10가지 사실 중 나에게 불리한 두 2가지 사실은 은닉하고 나머지 8개만 말한다거나, a를 a`라고 은근슬쩍 표현한다거나, 상관관계를 인과관계 있는 것으로 포장한다거나... 이런 사소한 트릭을 가해도 결과에 큰 차이가 발생할 수 있다. 이런 트릭은 변호사들에 의해 꽤 의도적으로 이루어지기도 하는데, 이는 판사가 해당 사건에 온전히 시간을 쏟을 수 없다는 우리나라 사법 제도의 문제와도 얽혀있다.      


https://news.joins.com/article/22257376


판사는 내 사건에 몇 시간 못 쓴다. 어떤 당사자들에겐 복잡한 맥락이 얽혀 있는 몇 년간의 분쟁일 수 있다. 그리고 변호사는 이 분쟁의 개요, 쟁점 등을 수십 시간에 걸쳐서 정제된 언어로 서면에 담을 것이다. 그러나 판사는 이걸 단 몇 시간 만에 파악하고 대강의 결론을 내려야 한다. 안 그러면 배당된 사건들을 제대로 처리할 수 없다. 훌륭한 판사라면 충실한 심리를 통해 첫인상에 따른 결론을 융통적으로 바꾸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보통 첫인상이 끝까지 가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변호사들은 모호한 언어와 개념, 함의, 또는 물타기를 이용해 판사를 호도하기도 한다. 어떻게 보면 재판은 ‘판사 속이기 게임’ 이라고 볼 수도 있다. 누가 더 판사를 잘 속이냐의 싸움인 것이다. 그런데 판사뿐만이 아니라 해당 사건을 잘 알고 있는 상대방도 이러한 트릭에 속아넘어가거나 말리기도 한다. 


원고와 피고의 모든 서면과 증거가 공개되는 재판은 차라리 양반일 수도 있다. 고소인 vs 피고소인의 치열한 암투가 벌어지는 수사절차는 어떤가. 수사절차에서는 재판과 달리 상대방이 제출한 서면이 공개되지 않는다. 수사기관만 쌍방이 제출한 서면과 증거를 볼 수 있다. 상대방은 어느 일방이 무슨 주장을 했는지, 무슨 증거를 제출했는지 구체적으로 파악하기 어렵기 때문에, 보다 과감하고 적극적인 헛소리가 난무하기도 한다. 


이 책에서도 언급하고 있지만, ‘문자적 의미’와 ‘함의’의 차이는 어마어마하다. 특히 맥락싸움에서는 더욱 그렇다. 내가 의도한 표현, 상대방이 의도한 표현 모두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 하나하나 뜯어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노련한 변호사는 이런 함의나 말속임수를 요령있게 사용한다. 노련한 변호사의 페이스에 말려든 상대방은 질질 끌려다니기 쉽다. 이러면 물타기가 난무하는 개싸움이 되어버리는데, 이렇게 될 경우 정작 중요한 ‘핵심’(아마 요증사실)에 대해 판사의 판단이 흐려질 가능성이 있고, 결과적으로 계속 질질 끌려다닌 쪽이 패소할 가능성이 더 높다.       


3. 나를 괴롭게 하는 헛소리


“헛소리를 반박하는 데 필요한 에너지의 양은 그런 헛소리를 생산하는 데 필요한 에너지보다 몇십 배나 많다.”     

- 이탈리아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알베르토 브란돌리니 (2014)

     

상대방의 무수히 많은 헛소리가 인상깊은, 현재 진행중인 한 사건이 있다. 상대방은 사실무근의 주장, 거짓 주장, 교묘히 재판부를 기만하는 주장을 적재적소에(?) 하였다. 그런데 해당 재판 변론종결까지 상대방 측이 제출한 증거는 약 30개였고, 우리 측이 제출한 증거는 약 300개였다. 상대방의 헛소리를 반박하느라 진땀을 흘렸고,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딱 10배의 증거가 필요하게 되었다.      


왜 이렇게 되는가? 여러 헛소리 중 한 가지 헛소리를 예시로 들어보고자 한다. 위 소송의 여러 쟁점 중 하나는 상대방이 공공기관에 재직하면서 업무시간에 부당한 행위를 하였다는 점이었다. 핵심 쟁점은 아니고 자잘한 쟁점 중 하나 정도. 그런데 상대방은 해당년도에 자신이 재량근로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식으로 나왔다. 자신의 SNS에서도 이런 주장으로 언론플레이를 했고 재판 중에도 똑같이 이런 주장을 유지하였다.      


헛소리는 한 문장이면 충분하지만, 이를 반박하기 위해서 우리는 해당 기관의 유연근무제 현황 공시자료, 해당 기관의 재량근로제 관련 심사지침, 상대방의 과거 발언 중 재량근로제 주장과 배치되는 발언(회사 화장실에서 똥싸면서 활동을 했다 등등), 해당 기관의 인재개발팀장 겸 공시담당자와의 통화 녹취록 등의 증거를 확보했다.      


여기까지만 보아도 문제가 뭔지 알 수 있다. 핵심 쟁점은 재량근로제냐 아니냐가 아니다. 그 사람이 업무시간에 무슨 불법적인 행동을 했느냐이다. 심지어 업무시간에 이런 행동을 한 것은 소송의 여러 쟁점 중 후순위의 쟁점이었다. 그런데 이런식으로 공방이 이루어지면 포인트는 이 사람이 재량근로를 했느냐 안했느냐에 맞춰지기 쉽고, 논점이 흐려질 수 있다. 물론 하나하나 꼼꼼히 살펴보는 성실한 판사를 만나면 상대방이 헛소리를 늘어놓고 우리가 헛소리를 많이 반박할수록 상대방의 점수가 깎이겠지만, 이런 조그마한 사건에서 그렇게 성심성의껏 봐줄 수 있는 판사를 만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고 상대방이 눈에 뻔히 보이는 헛소리를 하는데 그냥 넘어간다? 뭔가 상대방의 말을 그대로 수긍한 것 같고 찝찝하지 않은가. 실제로 이런 부분이 바로 나뿐만 아니라 많은 변호사들이 고민을 하는 지점일 수도 있다. 


4. 이 책이 실제로 도움을 준 부분


<똑똑하게 생존하기>는 나의 딜레마와 관련해서 매우 유용한 코칭을 제공했다. 근거 없는 믿음, 확증편향 등을 뿌리뽑는 다섯 가지 팁인데, 이 중 두 가지가 눈에 들어왔다. 

1. 간단하게 말한다. 거짓이 진실보다 유리한 점이 하나 있다면, 진실은 복잡한 경우가 많지만, 거짓은 단순하게 꾸밀 수 있다는 것이다. 얘기를 왜곡하지 않고 최대한 단순하게 만들 방법을 찾아보자. 핵심에만 초점을 맞추고 나머지는 그냥 내버려두자. 별로 관계도 없는 전문적 부분에 연연했다가는 아무도 납득시키지 못하고 도리어 화만 돋울 뿐이다.

5. 지식 격차를 다른 설명으로 채운다. 단순히 믿음을 폭로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를 다른 얘기로 대체해야 한다. 사람들은 설명이 부족한 불완전한 얘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잘못된 믿음에 관한 당신의 주장이 지금은 설득력 있어 보일지도 모르지만, 그 믿음을 새로운 얘기로 대체하지 않으면 그들은 미래에 똑같은 허위 정보에 다시 빠질지도 모른다. 훌륭한 변호사는 이 사실을 알고 있다. 그래서 배심원들에게 왜 피고가 무죄인지만 설명하지 않고 자신의 의뢰인이 범인이 아닐 경우 그 공백을 메울 수 있는 다른 피의자나 상황을 지적한다. 

- 똑똑하게 생존하기 pp.439~441.


한 가지 더. 판사 속이기 게임에서 승리하기 위해 때로는 헛소리를 전략적으로 구사할 수 있어야 할 것 같다. 이 책이 헛소리의 본질과 여러 유형에 대해 많은 통찰을 제공해주었기 때문에 실제로 헛소리 반박뿐만이 아니라 역으로 헛소리 전략을 구사할 때도 매우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물론 1. 거짓을 말하지 않기. 2. 금새 반박당할 수 있는 헛소리는 하지 않기. 라는 두 가지 대전제는 잊지 말아야 할 것 같다.


비단 소송을 하는 변호사가 아니더라도, 이 책은 많은 사람들에게 소음을 무시하고 보다 현명한 시민으로 살아가는 데에 있어 유용한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정보에 대해서 회의론적 태도를 견지할 필요는 없겠지만, 미심쩍은 기사는 한 번 더 읽어보고 미심쩍은 수치에 대해서는 한 번 더 검색해보는 사소한 태도만으로도 굉장히 유의미한 변화가 아닐까?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883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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