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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Quirky Nov 02. 2017

Intro 런던 행 비행기

13시간 동안에

런던 히드로 공항 in-out 왕복 항공권을 구입해버렸다. 런던-암스테르담 왕복 항공권도 구입했다.

그냥 저질러 버렸다.

굳이 이유를 들자면,

한정 기간 내 특별 할인가다.

핑크 플로이드 전시는 꼭 봐야 한다. 봐야 할 전시, 보고 싶은 전시가 너무 많다.

그동안 일에 치이면서 무뎌진 감각들을 살리고 싶다. 낯선 곳에서의 설렘과 자극이 필요하다.

런던이 좋다.

암스테르담이 좋았다.

사표를 품고 있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나는 몇 달 동안 여행을 계획하면서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른다)


본격적인 추석 연휴가 시작되기 1주일 전임에도 불구하고, 전례 없던 장기 연휴라 그런지 공항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전날 잠을 거의 못 잔 탓인지 컨디션이 좋지 않았지만, 공항 가는 길은 여느 때처럼 설렜다. 버스 안에서 빡빡하게 짜 놓은 일정표를 보고 또 보았다. 첫날 일정을 확인하면서, 런던에 도착하자마자 브릭스턴(Brixton)의 펍에 가야 한다는 부담감이 엄습한다. 공연 티켓을 이미 결제해 놓은 상태였다. 오후 5시 25분 히드로 공항에 도착하면 재빨리 뛰어가서 그 긴 입국심사를 통과하고 내 짐을 찾아 심 카드를 사고 오이스터 카드를 충전한 후에 스톡웰 역(Stockwell station) 근처에 있는 에어비앤비 숙소에 체크인을 해서 짐을 두고 나온 뒤, 재빨리 브릭스턴으로 이동해서 9시 공연을 봐야 한다.


기내 3-4-3 구조의 좌석인 비행기에서 나는 창가 자리에 앉았다. 복도 쪽에는 이미 내 또래 돼 보이는(또는 나보다 아주 조금 어린) 여성이 앉아 있었다. 비행시간이 다 돼가는데 우리 쪽은 가운데 자리가 계속 비어있다. '와우! 혹시, 정말 자리가 비는 거야? 이히히' 하는 찰나에 대학생으로 보이는 청년이 숨을 헐떡이면서 상단 좌석번호를 훑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 사이에 앉았다. 반갑다는 인사는 못 해줄망정 원망의 눈길을 그 청년에게 건넸다. 본인 자리에 앉은 것뿐인데 내가 왜 그랬나 모르겠다. 내 옆자리, 가운데 앉은 이 청년은 누나들 또는 이모들(나만 일수도 있지만 그녀도 일 것이다) 사이에 껴서 어깨를 제대로 펴보지도 못하고 다리까지 모으고 공손한 자세를 유지한다. 성인 남자가 가운데 앉기에는 불편해 보였는데도 최대한 불편을 주지 않으려고 힘든 내색 없이 내릴 때까지 거의 그 자세를 유지했던 것 같다.


20분 정도 출발이 지연된다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공연 시간에 늦어지는 것은 아닌지 조금 불안했다.

비행이 시작되자 얼마 되지 않아 특별식으로 신청해놓은 글루텐프리(Glueten Free) 식이 나왔다.

이때가 한창 다이어트할 때여서 미리 특별식을 신청해놓았었다(도착해서 다음날 아침을 시작으로 해서 여행기간 동안 다량의 탄수화물을 섭취한 덕에 다시 본모습을 찾아가고 있다).

첫 번째 식사는 빵, 야채샐러드와 매쉬포테이토, 그리고 스테이크였다. 아침을 안 먹고 서둘러 나와서 매우 배가 고팠던 상태였다. 빵을 제외하고는 정말 맛있게 먹었다. 맛있었다(정말 맛있게 먹었지만 그 이후로는 아무런 식욕이 없어 기내식을 먹지 않았다).


비행 4시간쯤 지나자 머리가 너무 아프고 체기가 심했다. 두통약도 먹고 소화제도 먹었지만 별 효과가 없었다. 비행기 멀미였다. 그런 거 없었는데 나이가 들면서 체력도 약해진 듯하다.

약을 가져다준다 해놓고 10분이 지나도 스튜어디스는 오질 않았다. 두통이 심해지니 더 예민해졌다. 계속 인상만 쓰며 참다 참다 혀를 찼다. 그리고 다른 스튜어디스에게 다시 약을 부탁하면서 대답만 하고 오지 않는 스튜어디스에 대해 이야기했다. 눈을 계속 깜박이는 남학생이 보였다. 괜스레 옆 남학생에게 미안해졌다.


전에는 이 정도 시간의 비행도 참을만했는데, 이제 해가 지나면 지날수록 장시간 비행은 힘들다.

다리를 쭉 뻗고 싶다.

앉지 않고 눕고 싶다.

장 속 묵은 가스를 시원하게 배출하고 싶다.


두통은 좀 나아졌는데 계속 속이 미슥거렸다. 잠도 안 와서 영화를 보려 했는데 보고 싶은 영화가 딱히 없었다.

기분을 좋게 만들 재미있고 가벼운 영화를 보았으면 좋겠는데, 딱히 눈에 들어오는 영화가 없다.

전에 친구가 재미있게 봤다던 영화 '보스 베이비'를 틀어보았다. 애기엄마인 친구 말을 믿는 게 아니었다. 어디서 웃어야 될지 모르겠다. 중고등학교 때 정말 재미있게 봤던 만화책, '어덜트 베이비' 수준으로 웃긴 내용일 거라고 내가 착각했었던 것 같다. 도저히 더는 볼 수가 없어 끄고 난 뒤 이것저것 돌려보다 보니 내가 좋아하는 핑크 플로이드 관련한 다큐가 있었다. '아 이거다!'하고 틀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드디어 난 잠에 들 수 있었다.

역시, 다큐보다는 공연으로 봐야 한다.


이제 히드로 공항까지 약 1시간 정도 남았다. 몸이 아무리 안 좋아도, 클럽 가서 공연은 봐야 하기에 화장을 고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화장실에 간다고 옆자리 남학생에게 양해를 구했다.

"저기, 죄송한데, 잠시만.. 나갈게요." 이런, 목소리 톤을 너무 올렸다. 나이보다 20살쯤 어린아이의 흉내를 낸 듯했다. 단지 나는 '원래 그렇게 인상 쓰고 까칠한 사람 아니야, 그냥, 좀 아팠어. 학생도 가운데 자리에서 고생 많았네'라는 생각을 모두 담아 전달하고 싶었던 것뿐이다. 복도 쪽 앉은 여성이 다리를 들어 비켜주면서 나를 바라보았다. 밥맛없다는 표정이다. 나는 감사하다는 인사를 건넸다.


이제 곧 착륙할 예정이라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요즘 런던의 테러 사건 때문에 입국심사 시간이 더 길어졌다고들 했다. 난 9시까지 클럽에 가야 했기에 총알처럼 빠르게 나갈 준비를 했다. 내 자리 줄에 앉은 참한 청년과, 아가씨(혹은 내 동년배 여성)에게 계속 눈맞춤을 시도하며 내 짐을 들었다 놨다 하면서 자꾸 만지작거렸다. 무언의 압박이었다. '나 빨리 나갈 거예요. 우리 땡! 하면 나가요, 응?'

그들의 협조 덕에 난 예정대로 빨리 나왔다. 경쟁자들을 하나, 둘 물리치며 입국심사장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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