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무슨 일을 하냐고 물으신다면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의 한 장면. 집주인 할머니가 백수로 추정되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세입자 찬실이를 붙들고 이런저런 질문을 합니다.
할머니 : 그전엔 뭐했어?
찬실 : PD요.
할머니 : 뭐?
찬실 : 영화 만드는 PD요.
할머니 : 그게 뭐 하는 건데?
찬실 : 돈도 벌게 하고, 사람들도 모으고 뭐, 이것저것 다 하는 그런 사람인데요.
할머니 : 그니까 그게 뭐하는 사람이냐고.
찬실 : 헤. 흐흐흐흐흐. 저도 이제 잘 모르겠어요.
할머니 : 얼마나 이상한 일을 했으면 한 사람도 몰라. 됐어, 내가 다 알아들은 걸로 칠게.
찬실 : 헤, 흐흐흐, 헤헤(인사 꾸벅)
출판 편집자로 책을 만든 지 16년이 되었습니다. 지금의 회사가 일곱 번째 출판사이자, 여덟 번째 직장입니다.(탈출판을 꿈꾸고 딱 한 번 다른 일을 해보기도 했습니다.) 16년이라는 나름 긴 시간 동안 한 가지 일을 해왔음에도 여전히 책 만드는 일은 매번 새롭고, 어렵습니다. 그래도, 어떤 일이든 이 정도 오래 하면 경험과 기술이 자연스레 쌓이기 마련이잖아요. 이제는 나름의 노하우나 일하는 방식 같은 것에 대해 썰 정도 풀 수 있는 사람이 되었는데요. 딱 하나, 16년 동안 제대로 된 나만의 답을 정리 못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저의 일. 출판 편집자가 무슨 일을 하는지 설명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무슨 일 하세요?
-출판사에서 책 만들어요.
우와. 그럼 글을 쓰시는 거예요?
-아뇨. 글은 작가가 쓰고, 저는 책을 만들어요.
아... 그럼 디자인을 하시는 건가.
-디자인은 디자이너가 하구요. 저는 그러니까...
이쯤 되면 묻는 사람도 답하는 사람도 머쓱해지고 맙니다. 대체 무슨 일을 하기에 이것도 저것도 아니란 말인지. 대화는 늘 저 어디쯤에서 흐릿해지며 끝이 납니다. (이제 가벼운 대화에서는 "회사원이에요" 하고 슬쩍 넘어가기 기법을 쓰고 있습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니지만, 이것도 저것도 다 하는 것이 편집자이기에 어떤 일을 하는지 설명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사실 책 만드는 과정 자체가 설명하기 어려운 구석이 있습니다. 책 한 권이 만들어지려면 동시다발적으로 수많은 일이 진행되어야 하거든요. 게다가 이 '진행'이라는 것이 직선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구불구불, 때로는 나선형으로 굴러갑니다. 과정마다 일을 실행하는 등장인물도 많고요. 그렇다 보니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막막해집니다.
종종 편집자가 어떤 일을 하는지 출판 밖에서 말할 기회들이 있었습니다. 독립서점의 소규모 모임, 지역 도서관 강의, 직업탐방을 위한 인터뷰 등으로 남녀노소 각양각색의 사람들을 만났는데요. 이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모두 책을 좋아하는 분들이었다는 거예요.
감사했습니다. 책을 좋아해주시는 것도, 그 책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궁금해하시는 것도, 굳이 시간을 내어 이름도 모르는 편집자의 이야기를 들으러 와주시는 것도요. 그래서 정말 쉽게! 쏙쏙! 재밌게! 편집자는 어떤 일을 하고 책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말씀드리고 싶어 열심히 준비했지만, 역시 쉽지 않았습니다. 너무 깊이 들어가면 듣는 분들의 눈빛이 흐릿해졌고, 얕게 다루면 싱거워졌습니다. 두세 시간 동안 끝내야 하는 제약도 한몫했지요. 그때마다 언젠가 글로 전해야겠다고 생각만 했어요.
그러다가...! 최근 삶과 관계에 대한 가치관, 직업관, 라이프스타일까지 교체기 혹은 재정립기를 맞으며 미뤄만 두었던 그 일을 시도해보기로 했습니다. (네... 요즘 자아탐구 기간이랍니다.) 이 작업을 시작한 건 책 좋아하는 분들과 이야기 나누고 싶어서이자, 저 자신을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앞으로 이런 이야기를 나눠보려고 해요.
출판 편집자는 어떤 일을 하는지
+
책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
부록 : 저라는 편집자의 책 만드는 일상은 어떤지(글로 쓰는 편집자 브이로그랄까요)
이런 이야기를 옛날옛적 드라마 <아들과 딸>을 도구로 활용해 풀어가보려합니다.
읭? 아들과 딸?
제게 출판 편집자라는 직업을 처음 알려준 드라마가 <아들과 딸>이었어요. 주인공 후남이(김희애)가 일하던 출판사는 이후 '출판사' 하면 떠오르는 대표 이미지가 되었습니다. 덕분에(?) 출판사 취업을 앞두고 고민하기도 했습니다만. (그 이유는 나중에....)
몇달 전 오랜만에 독자분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어요. 자료를 준비하다가 내가 처음 편집자라는 직업을 알게 되었던 때까지 거슬러 올라가봤습니다. 거기에 이 드라마가 있었어요. 시험 삼아 <아들과 딸> 영상클립을 넣은 자료로 책 만드는 일에 대해 이야기 나누었는데, 저도 듣는 분들도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 기억을 씨앗으로 글을 써나가려고 합니다. <아들과 딸> 이외에도 출판 편집자가 등장하는 드라마와 영화들도 등장할 예정이에요!
매거진 이름은 <출판 편집자의 기쁨과 슬픔>입니다. 줄여서 '출기슬'이라고 부를게요. (저도 붙여봤습니다. 기쁨과 슬픔ㅎㅎ) '출기슬'로 이런 분들과 이야기 나누고 싶습니다.
-책을 좋아하는 분
-그 책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궁금한 분
-출판 편집자, 혹은 출판사 입사를 준비하는 분
-언젠가 내 책을 출간하고 싶은 분
-다른 사람은 어떻게 일하는지 궁금한 분
자... 이렇게 시작을 하고 맙니다. 긴장해서 키보드 두드리는 손가락이 자꾸만 뻣뻣해지는데요. 후하후하. 이 또한 오늘의 기록이 되겠지요. 낯선 시작을 함께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