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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 만드는 희희 Sep 02. 2020

지금 여기 불시착한 걸까요, 착륙한 걸까요.

1화. 출판 편집자의 탄생(번외편)


<아들과 딸>의 이후남 편집자의 전공, 확인하셨나요? (이전 이야기는 여기서 ) 나름의 반전에 저는 "으엥?!" 소리 낼 정도로 조금 놀랐거든요.ㅎㅎ


그렇다면 이 글을 쓰고 있는 편집자 희의 전공은 무엇일까요? 긴장감도 반전도 없이 국어국문학과입니다. 하지만 후남이처럼 글 쓰고 책 읽는 게 좋아서 선택한 건 아니에요. 대입을 앞두고 밝히기 부끄러운 황당한 이유로 딱 한 곳에만 국문과를 지원했는데요. 다른 학교의 원하던 학과에 합격했는데도 집과 가장 가까운 학교에 가야겠다는 판단을 하고 맙니다. 그래 봤자 15분쯤 가까운 곳...(저는 왜 그랬을까요)


입학하자마자 알았어요. 학과가 적성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요. '국어국문학'에는 '국어학'도 포함되어 있다는 걸 그제야 알았거든요(와!) 우랄알타이어와 고려 향가, 훈민정음해례본...(와와!) 저는 점점 전공과 멀어져 딴짓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후의 이야기는 올봄에 썼던 아래 글로 대신할게요. '예비 출판인―출판인은 어떻게 탄생하는가'라는 주제로 꾸려진 《편않》 4호에 게재했던 글입니다.


《편않》 4호(2020년 3월)




사랑의 불시착


‘딱 1년만 일하고 뜨는 거다. 천만 원만 모으면 한국을 뜨는 거야.’

있는 힘껏 미소를 쥐어짜며 면접관들을 바라보았다. 붙어야만 한다, 그래야 돈을 모을 수 있어.


졸업반이 되었고, 무언가 되어야만 했다. 흔한 토익점수도 없었고(시험을 본 적 없으므로), 스펙 쌓기는 고사하고 전공 공부도 제대로 한 적 없었다. 그럼 4년간 무얼 했느냐 하면, 영화를 봤다. 영화 촬영장에 있었다, 영화를 공부했다, 크고 작은 영화제에 다녔다. 영화, 영화, 영화, 매일이 영화였다. 영화를 사랑하는 내 마음에 내가 취해 보냈다. 때문에 무언가 되어야 한다면 달리 생각할 게 없었다. 영화 밖에는.


뭘 해야 할지 막막했다. 기껏 생각해낸 방법은 학위를 따는 것. (영어도 못하면서) 호주에 있는 필름스쿨의 촬영전공 1년 과정을 목표로 결심하고는 계획을 세웠다. 이어진 생각의 흐름은 단순했다. 떠나려면 돈이 필요하다 → 알바로는 큰돈 못 모으니, 취직하자 → 국문과이니 출판사가 유리하겠지 → 출판사에 취직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그러던 중 신문에서 우연히 광고를 발견했다. “출판 편집자 입문과정 개강”



인생을 바꿔놓은지도 모를 그 광고를 얼마전 발굴했습니다



3개월의 교육과정을 이수한 후, 한 출판사의 영어단행본팀에 지원했다. 면접 날, ‘편집자’가 ‘영화편집기사’와 다르다는 걸 안 지 겨우 3개월밖에 안 되었으면서도 태연하게 이 회사의 미래를 이끌 편집자가 되겠다며 포부를 밝혔다. 영어를 못하기 때문에 독자 입장에서 책을 만들 수 있고(음?), 토익 공부도 안 해봤기 때문에 토익책도 잘 만들 수 있을 거라는(뭐라고?) 논리를 펼치며 속으로 은밀하게 웃고 있었다. 후후 죄송합니다만, 저는 떠날 겁니다. 꿈을 찾아 훨훨 날아갈 거예요. 그러니 도와주세요. 저를 뽑아주세요.


운 좋게 처음 지원한 회사에 바로 입사했다. 1년 넘게 무사히 보냈고 악착같이 천만 원도 모았다. 그래서 훨훨 떠났느냐고? 예상했겠지만 그대로 눌러앉아 오래오래 출판사에서 책 만들며 살았다는, 어쩌면 시작부터 이미 정해진 것 같은 결말로 이야기는 끝난다.


책 만든 지 몇 개월쯤 지났을 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꼭 영화가 아니어도 되겠다.’ 영화판에 있고 싶어 영화를 맴돌았던 건 순전히 촬영장에서 밤새는 게 좋아서였다.(세상에!) 며칠씩 집에 가지 않고 몸에서 쉰내가 나도록 집중해서 ‘함께’ 한 편의 영화를 만든다는 게, 떠올리기만 해도 두근거릴 만큼 좋았다.


그런데 출판사에서 일해보니 ‘함께’ 한 권의 책을 만드는 것도 좋았다. 춥고 더운 촬영장이 아닌 따뜻하고 시원한 사무실에서 할 수 있으니, 더 좋았다. 많지는 않아도 꼬박꼬박 월급이 들어오는 것도. 무엇보다 언제든 여길 떠날 수 있다는 내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상대에게 매달리는 연애만 하다가, 내가 먼저 대차게 차버릴 수 있는 연애를 하는 듯했다.


사랑의 권력을 쥐었다는 착각으로 편집자 생활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저는 이렇게 불시착하듯 편집자가 되었습니다. 위의 글에 등장하는 첫 출판사에서 시리즈를 바탕으로 한 영어 단행본을 만들기 시작해 에세이, 예술, 실용, 비즈니스, 자기계발까지 궁금한 분야는 다 만들어봤습니다. 편집자 친구들이 종합출판사라고 놀릴 정도로요. 현재는 다행히도(!) 지금까지의 모든 경험을 담아 '자기만의 방​'이라는 시리즈를 만들고 있습니다. 이 일에 제법 적응하며 15년 넘게 지내온 걸 보면, 어쩌면 불시착이 아니라 제대로 착륙한 것일 수도 있겠다 싶어요.


2화의 주제는 많이 고민해보았는데요. 역시, 이것부터 이야기해야겠다 싶더라고요. 힌트는 아래 사진에 있습니다. 후후 ;)



출처 : 옛드 : 옛날 드라마 [드라맛집]- <아들과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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