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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 만드는 희희 Jan 31. 2021

눈을 떠보니 손목이 마비되어 있었다.

왼손이 쓰는 손목일기 D+2


계단에서 크게 넘어져 깁스를 하던 5년 전 그날. 불행과 불편쯤은 가뿐히 떠안을 수 있을 만큼 '속이 후련했다'라고 남몰래 일기를 썼다. 이쯤에서 브레이크가 걸려 다행이라고도. 브랜드 런칭을 준비하며 내 속도에 맞지 않게 과속난폭 운행 중이었다. 속도를 줄이면, 브레이크를 밟으면 안 될 것 같아서 위험한 주행을 이어가며 주변을 둘러보기는커녕 나조차 돌보지 않았다. 조급했다. 실체 없는 무언가에 쫓겨 나답지 않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던 때 발목이 와직. 모든 게 일시정지되었다.


움직임이 제약되니 우선순위를 정해야 했고, 욕심을 낼 수 없으니 일도 일상도 단순해졌다. 움직이지 못하던 처음 한 달쯤은 책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한 번쯤 꿈꿨을 '책 쌓아놓고 온종일 읽기'로 보냈다. 시간이 많으니 평소 읽지 않던 책에도 손이 닿았다. 다음 책을 기다리는 작가 리스트가 늘었고, 우리 시리즈 라인업도 다양해졌다. 결론만 보자면, 그러니까, 조급해할 필요가 없던 거였다. 평소 내 속도보다도 느리게 움직였지만 시리즈 런칭은 무사히, 오히려 기대보다 잘 진행되었다. 게다가 3개월쯤 금주하다 보니 살도 빠지고 건강도 좋아졌다. (힘든 상황이었지만 좌절하지 않고 긍정의 자세로 이겨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현실이 정말 그랬다.) 깁스 생활은 예상보다 더 고되고 불편했지만 이렇게라도 속도를 줄이고 멈출 수 있어 다행이다 싶었다. 액땜. 발목으로 막은 게 어딘가. 그대로 과속했다면, 더 부서졌을지도 모른다.


어제 아침, 잠에서 깨보니 오른쪽 팔목부터 손가락을 움직이기 어려웠다. 감각은 있는데 팔목이 들어 올려지지 않는다. 한 자세로 밤새도록 꼼짝 않고 자는 버릇 때문에 쥐가 나는 경우가 종종 있었기에 대수롭지 않게 주물러줬다. 그런데 10분, 20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는다. 팔목이 팔에 붙어 덜렁거리는 듯한 느낌. 무서운 생각이 훅 덮쳤다. 짝을 흔들어 깨웠다.

"나 몸이 좀 이상해. 마비된 거 같아."

신경외과 의사 말로는 어깨에서 팔꿈치로 이어지는 신경 어딘가가 눌렸거나 손상되어 이런 일이 생겼다고 한다. 다행히 척추나 뇌에서 이어지는 신경이 아니라 말초신경류의 문제라고. 대부분 저절로 회복되는데, 혹여 너무 더딜 경우 수술해야 할 수도 있다는 최악의 상황도 일러주었다. 하지만 미리 걱정하지 말고, 굉장히 더디게 회복될 테니 조급해하지 말라고도 했다. "얼마나 걸릴까요...?" 묻자 쓴웃음과 돌아온 답. "몇 달쯤? 그보다 더 걸릴 수도 있고요."

힘없이 덜렁거리는 손목을 잡아줄 깁스를 했다. 제어가 안 되어 평소의 손목 가동범위보다 무리하게 움직일 수 있어 염증이 생기는 걸 예방해야 한다고. 병원을 나서며 몰려온 첫 번째 감정은 황당함. 그저 잠을 잘못 잔 것뿐인데 한동안 오른손을 못 쓴다고?! 이어지는 걱정. 키보드는 어떻게 누르지? 교정은? 젓가락질도 못하네?! 다시 황당함. 다시 이어지는 걱정. 허탈하게 웃으며 조금 걸었다. 그때 번쩍 스치는 생각. 아, 혹시, 설마, 이번에도 브레이크인가.

2020년은 파고가 큰 한 해였다. 새해가 왔지만 작년이 몰고 온 밀린 일들, 강의 준비, 써야 할 원고, 개인 프로젝트까지. 멍 때리고 쉬는 게 불안할 정도였다. 며칠 전 일기장에 나의 안부를 묻고 쓴 적이 있다. "요즘 잘 지내시나요?"라는 질문에 스스로 이렇게 답했다. "아뇨. 조급해요. 할 일이 많아 쫓기는데, 그래서 손에 잡히지 않고, 손에 안 잡히니 잘 진행이 안 되고, 그래서 또 조급해지는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어요!"

5년 전 스스로 멈추지 못하던 나를 몸이 일시정지시킨 것처럼, 또 한 번의 브레이크. 오른손잡이가 왼손만 쓸 수 있으니 모든 게 느려졌다. 내가 무얼 할 수 있고 없는지 관찰하기 시작했다. 포기해야 할 것들이 떠올랐다. 쫓기던 마음이 차분해졌다.


좋아하는 이케아 조립을 포기해야 했다.


오늘로 2일 차. 손목이 돌아올 때까지 조급해하는 대신 '손목일기'를 쓰기로 했다. <기록하기로 했습니다>(김신지 저) 편집자로서 자연스러운 결심이랄까(후후)

메모장에 처음 쓴 일기는 이러했다.

"혼자 척척 해내던 오른손이 당황한 게 느껴졌다. 이 많은 일을 하고 있었구나, 너."



나는 실천하는 편집자. 그래서 기록하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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