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미팅의 악몽 #2
그날 이후 첫 미팅 울렁증을 앓았다. 약속이 잡히면 시험공부하듯 그 사람에 대해 공부했다. 기고한 글, 인터뷰, 블로그나 홈페이지(sns가 없던 시대였다), 대학논문까지 찾아낼 수 있는 거라면 뭐든 수집했다. 제안할 기획 아이템도 적어도 세 가지 정도 준비했다. 불안했다. 무능한 나를 다시 만나고 싶지 않아서.
이런 식이다 보니 작가 미팅은 멘탈 사냥꾼, 팀장님보다 매출보다 더한 최강 스트레스의 주범이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꾸역꾸역 준비하고, 꾸역꾸역 만났다. 미팅 후 앞차기 옆차기 날아차기로 이불킥하는 날도, 기쁨에 벅차 발을 동동 구르는 날도, 오랜 시간 여러 번 마음을 쏟아 함께하자는 대답을 들은 날도, 파이팅 넘치게 다가갔다가 대차게 거절당하는 날도 차곡차곡 쌓여갔다. 그런데, 그러다 보니 괜찮아졌다. 특별한 사건이나 계기가 있던 것도 아니었는데 어느 날 문득 '그러고 보니 괜찮아졌네?'가 된 거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날 내가 무능했던 건 당연한 일이었다. 답정식으로 기획안을 만든 것도, 다른 곳과 진행하고 있다 했을 때 적절히 대처 못 했던 것도 경험이 없어서였다. 하지만 경험을 떠나 놓친 부분이 있다. 너무나 당연하고도 교과서적인 것, 그 사람에 대한 '관심'. 나는 내 앞에 앉은 그 사람을 오로지 설득해야 할 대상으로만 보았다. 대화하고 질문하고 경청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못했다. 관심이 없었으니까. 그런 마음은 상대에게 쉽게 들키고 전해지고 만다. 그날의 나는 무능했다기보다 무심했다.
얼마 전 <우리 각자의 미술관>을 쓴 최혜진 작가님을 만났다. '대화'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작가님은 모르는 사람을 만나 대화 나누는 것이 너무 좋다 하셔서 크게 놀랐다. (내향형 <I>이신데?!) 테이블에 놓여 있던 컵받침을 매만지던 작가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 뇌가 이만큼(한가운데 컵 바닥이 놓이는 움푹 파인 곳) 정도인 줄 알았는데, 누군가와 대화하다 보면 어둠 속에 있던 미지의 부분(앞서 가리킨 한가운데 원과 컵받침 테두리 사이 어디쯤을 검지로 가리키며)까지 꺼내게 된다 했다. 나한테 이런 부분이 있었지, 발견하게 해준다고. 나 자신을 확장시켜주는 대화는 마치 나를 개간하는 것과 같다고. 이것은 혼자서는 절대 할 수 없는 일로 오로지 다른 이와의 대화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했다. 그래서 새로운 사람과 대화하는 것이 즐겁다고.
그 순간, 나도 내 머릿속 미지의 부분을 발견했다. 점점 더 필자 미팅이 재밌어졌던 이유를 찾은 거다.
오래전, 김 주간님께 '편집자'라는 직업이 좋은 이유에 대해 여쭤본 적이 있다. 좋은 점보다는 힘든 점이 월등히 많아서 대체 이 직업을 왜 택한 걸까 나 자신을 원망던 때였다. 억지로라도 어떻게든 좋은 점을 찾아야 했다. 언제나처럼 허허 웃으시며 몇 가지 이야길 해주셨는데 그중 하나가 '명함 한 장만 있으면 누구든 만날 수 있는 특별한 직업'이라는 것이었다. 그때는 그 '누구든'들 때문에 너무 힘들다구욧!!!! 하고 또 버럭하고 말았지만, 이제는 동의한다. 편집자가 아니었으면 만날 수 없었을 다양한 사람들과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눈다. 대화에서 새로운 세계를 만난다. 그 세계를 만난 덕에 내 머릿속 미지의 영역에 파팟 불이 켜진다. 그리고 그만큼 내가 넓어진다.
그런 대화를 나누고 돌아오는 길에는 늘 설렜다. 불이 켜진 그곳에서 계속 신호를 보내왔다. 새로운 생각이 흘러나왔다.
무능함에 괴로워했던 그날의 나에게 지금의 내가 어떤 이야기를 해줄 수 있을지 생각해봤다.
모르는 사람을 처음 만나는 자리는 누구나 긴장해. 상대도 마찬가지로 긴장하고 있을 거야.
예상 기획안과 저자를 퍼즐 맞추듯 끼우지 마. 그럼 자꾸만 그 기획안으로 몰아가게 되고, 가능성의 폭이 좁아지더라고. 그 사람은 네 생각보다 더 많은 걸 가지고 있어.
무조건 많이 질문해. 기획의 씨앗은 늘 저자의 말속에 있었어.
미팅의 목적은 설득이 아니라, 대화야. 대화가 잘되면, 설득은 자연스럽게 따라오더라고.
혹여 이번에 그 기획으로 함께 못하게 되더라도 괜찮아. 그 첫 미팅은 '첫' 만남이니까. '다음'을 만들 수 있을 거야.
선배와 함께 미팅하러 가면 이럴 때 선배가 어떻게 말하고 대처하는지 대화를 수집해봐. 선배의 반면교사 대화 수집도 엄청 유용해.
책 만드는 나'보다 '자연인 나'가 더 소중해. 아무리 유명한 저자여도 첫 미팅부터 무례하고 비상식적이라면 도망쳐. 반드시 그 사람이 아니어도 돼.
그리고, 미팅보다 중요한 거. 다리 꼬고 앉지 마. 10여 년 후에 너를 가장 괴롭히는 건 무능함이 아니라, 허리 통증일 수도 있어.
어떤 이야기에도 끝은 없어요.
분명히 다른 곳으로 이어지는 길이 있죠.
_우다영, <앨리스앨리스 하고 부르면>
** 이 글을 쓰기 시작한 것도 최혜진 작가님이 제 머릿속에 불을 켜주신 덕분이에요.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