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책 만드는 희희 Mar 01. 2023

책 만드는 사람의 번아웃

문장메모 리추얼의 시작(1)


첫 번째 번아웃은 난독증 증상과 함께 왔다.


10년도 훨씬 더 이전의 일이다. 당시 이름만 대도 “오” 하고 감탄할 만큼 잘 나가던 유명인의 책을 담당하게 되었다. 당연히 스케줄이 빡빡한 그분을 만날 수 있는 때, 소통할 수 있는 때가 귀했기에 퇴근 후나 주말에도 미팅이나 연락을 주고받는 일이 잦았다.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팀장 역할도 하고 있었다. 나도 잘 모르겠는데, 대답하고 피드백해야 하는 입장이 되었다. 스트레스는 컸지만, 다들 힘들게 일하니까. 힘든 시기를 지나 보내면 성장할 거라고 믿었다. 숨이 쉬어지지 않는 증상이 나타나곤 했지만, 긴장해서 그런 거라며 무심히 넘겼다.

그 무렵 할머니의 간병을 혼자 도맡아 하던 엄마도 도움을 청해왔다. 회사 일만으로도 벅찼지만 일주일에 2-3일은 시간을 내서 할머니 곁을 지켰다. 보호자 침대에 앉아 교정지를 보곤 하면서. 그렇게 몇 개월을 보냈다.


몸은 늘 피곤했고, 점점 더 자주 숨 쉬는 게 어려워졌고, 무기력해졌다. 쉬고만 싶었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고, 멈출 방법을 그때는 몰랐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팀원이 내민 기획안을 들여다보는데 읽히지 않았다. 낱글자 하나하나는 읽는데, 의미가 전혀 입력되지 않는 상태. 책 만드는 사람이 글을 읽을 수 없다니. 그날 오후 바로 사표를 냈다. 멈출 방법은 그것밖에 몰라서. 그때 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이었다. 


사표를 낸 후, 모든 걸 멈추고 짝과 도보여행을 떠났다. 3개월간 커다란 배낭을 메고 곳곳을 누볐다. 매년 섬 여행을 떠나게 된 것도 이때가 계기였다.


5년여 전, 두 번째 번아웃이 왔을 땐 상황이 나은 편이었다. 몸과 마음에 나타나는 증상을 알아챌 수 있을 만큼 나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었고, 어떻게 돌봐야 할지도 어느 정도 알았다. 함께 일하는 동료들에게 양해를 구할 수밖에 없었는데, 심지어 그들의 배려와 보살핌을 받으며 그 시기를 보냈다. 덕분에 담당하는 책의 종수와 할 일을 대폭 줄여 틈을 만들었다. 하지만 딱 하나, 걱정되는 것이 있었다. 첫 번아웃에서 겪었던 난독증 증상. 그러면 또 모든 걸 멈춰야 했다.  

어서 이전의 나로 돌아가기를 간절히 바랐다. 에너지 넘치고 일하기를 좋아하고 시도하기를 즐거워하는 나로. 그때의 나로 돌아가지 못할까 불안했다. 휴식, 몸에 좋은 음식, 산책, 명상 등등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시도해봤지만 나아지는 신호는 없었다. 번아웃이 언제 끝날지 누구도 알 수 없었다.


기약 없이 하루하루를 보내던 때, 출근 후 평소처럼 메일함을 열어 뉴스레터들을 읽어 내려가다 한 구절에 턱, 하고 걸려 넘어졌다.


“나의 세계를 넓혀가는 경험”


이유는 모르겠지만, 눈을 뗄 수 없었다. 특별한 구절도 아닌데. 궁금했다. 허나 보통의 번아웃 증상처럼 집중력이 떨어져 있던 때였고, 곧 이어질 회의에 가야 했던 터라 깊이 생각할 상황이 아니었다. 별생각 없이 손에 잡히는 떡메모지를 한 장 뜯어 손글씨로 적었다. 나의, 세계를, 넓혀가는, 경험. 짧은 순간이었지만 단어 하나하나를 내게 심는 듯했다. 메모지를 들여다보다가 둘 곳도 마땅치 않아서 또 별생각 없이 셔츠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리곤 종일 까맣게 잊고 있었다.



퇴근하던 길, 집 앞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가 바뀌길 기다리며 가방을 고쳐 메는데 주머니에서 부스럭거리는 게 느껴졌다. 아, 메모지. 조금 구깃해진 메모지를 펼쳐보았다. 아침의 내가 보낸 편지 같았다. 메모지를 손에 쥐고 집과 다른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나의 세계를 넓혀가는 경험”이라는 말을 여러 차례 되새기면서.


한참을 걷고 나니 왜 저 구절이 와닿았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무너진 내게 필요한 건 ‘이전의 나’를 기준으로 두고 되돌아가려는 노력이 아니라 ‘새로운 나’를 구축하려는 시도였다. 번아웃 이전의 나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인정해야 했다. 새로운 나,로 변화하기 위해서는 내 세계를 조금씩 넓혀가는 경험이 필요했다.


꽉 막혔던 마음에 신선한 바람이 들어오는 걸 희미하게 느꼈다. 어지러웠던 마음이 그때만큼은 나 자신과 문장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그 짧은 산책이 ‘문장메모 리추얼’의 시작이었다.



초창기 문장메모들. 손때 묻어서 꼬깃하다.


그 후 출근 전 아침마다, 정확히는 새벽 4-5시경 짧게라도 책을 읽고 그날의 문장을 메모지에 적었다. 평범한 문장도 메모지에 적히는 순간, 특별한 ‘오늘이 문장’이 되었다. 메모를 주머니에 넣고 집을 나서서는 일과를 보내며 틈날 때마다 꺼내보았다. 어지러운 생각이, 어두운 마음이 몰려오면 응급치료를 하듯 메모를 꺼내 읽었다. 입으로 작게 소리 내 읽기도 하면서. 그 작은 메모지가 나의 하루를 지켜주는 부적 같기도, 마법의 주문 같기도 했다. 기댈 곳이 생긴 듯했다. 마음의 근력이 자라는 게 느껴지니, 새벽에 일어나는 것도 힘들지 않았다.


그로부터 2년 후. 문장메모 덕분에 번아웃을 무사히 통과했을 뿐 아니라, 무너졌던 이전의 나와는 다른 새로운 나를 구축할 수 있겠다는 용기도 얻었다. 그러자 ‘나의 세계를 넓히는 경험’을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둥실 떠올랐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책을 읽고 문장메모를 하면, 어떨까?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 곧 2편으로 이어집니다


추신.

문장메모 리추얼을 함께하는 프로그램을 밑미에서 진행하고 있어요. 소개를 덧붙입니다.

>> 밑미 <하루한줄 문장메모> 링크


매거진의 이전글 출판 편집자의 슬픔과 슬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