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동료들에게 보내는 편지
얼마전 회사를 그만둔 동료를 만났습니다. 책 만드는 일에 열정적이고, 늘 에너지 넘쳤던 사람이었는데 왜 갑자기 퇴사를 했는지 궁금했어요. 힘든 일이 있었냐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긴 대화. 편집자로 살아가는 기쁨과 슬픔에서 기쁨은 슬쩍 옆으로 미뤄두고 슬픔, 혹은 고충 또는 스트레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데, 밤을 샐 수도 있을 것 같았어요. 여러분도 이런 경험, 있으시죠? 소속 회사, 담당 분야, 연차, 직급이 다른데도 불구하고 어쩌면 그렇게 내 이야기와 비슷할까요.
그럴 때면 다들 힘들게 만들고 있구나, 싶어 한숨이 나오면서도 동시에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는 사실에 안심하기도 해요. 반면 연차 많은 선배가 비슷한 이야기를 하면 그나마 기대를 걸었던 ‘시간’마저 별 소용 없구나 하고 좌절도 합니다. 여러분은 책을 만들며 언제 가장 힘이 드나요? 마감, 야근, 격무, 박봉, 매출, 순위, 관계, 경쟁, 팀장부장사장 등 각종 장 님 등등 이것들만 늘어놓아도 또 밤을 샐 거예요. 이 오만, 십만 가지 슬픔 고충 스트레스 중에서도 저는 이런 것들이 힘들었어요.
첫 번째는, 제가 잘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거였어요. 어떻게든 만들고는 있는데 제대로 하고 있는 건지. 잘하고 있는 건지. 서점에 가보면 훌륭한 책들이 가득 있는데, 굳이 나까지 책을 만들어야 하는 건지. 나는 왜 이렇게 일이 어렵고 늘지 않는 건지. 선택하고 결정해야 하는 순간마다 나를 믿어야 하고, 또 믿지 못하겠는 두 갈래 마음 때문에 괴로웠어요. 잘하고 싶은데, 잘 만들고 싶은데. 내 기준은 너무 높고, 나는 거기에 늘 닿지 못하니 뒤처진다는 조바심과 압박감에 괴로웠답니다. 그러다가 번아웃을 겪기도 했고요.
돌이켜 생각해보면, 저는 꽤 잘해왔어요. 초대박 베스트셀러도, 놀랄 만한 책을 만들지도 않았지만 내 역량과 주어진 환경 내에서 잘해왔어요. 열심히 최선, 최최선을 다해서요. 오히려 최최선을 다한 게 문제였을 만큼요. 그러면 19년 차쯤 되면 모든 걸 극복할 수 있는가, 하면 아니요. 요즘도 종종 괴로워하는 걸요. 하지만 이제는 알아요. 그 괴롭히는 마음이 내 허상이라는 걸요.
그날도 전력질주하듯 일을 하고 퇴근하던 길이었어요. 문득 이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일을 잘한다’는 게 뭘까? 책을 ‘잘 만든다’는 건 뭐지? 글쎄… 멋있는 기획을 해서 유명 작가를 섭외하고, 힙한 디자인을 입혀 세상에 내놨더니 종합 베스트셀러가 되고 매출도 엄청 내고 승진도 하고 그런 거? 흐음, 제가 바라는 모습은 아니었어요. 아니, 정확히는 제가 바라는 ‘일을 잘한다’는 의미와 다른 듯했어요. 그럼, 책을 잘 만든다는 건? 내용이 좋은 거? 의미 있는 거? 세상에 없던 기획을 하는 거? 아니면, 독자의 인생을 바꿀 만한 책을 만드는 거? 많이 팔리는 책을 만드는 거? 혹은 상을 받거나 매체에서 박수쳐주는 책을 만드는 거? 아닌데. 그런 게 아닌 거 같은데. 대체 뭘까?
그제야 알게 되었습니다. 잘하고 싶다고, 잘 만들고 싶다고, 했던 그 마음에는 실체가 없었어요. “좋고 훌륭하게” “익숙하고 능란하게” “아무 탈 없이 편하고 순조롭게” “아주 만족스럽게” 등등의 좋은 의미는 다 가져다 쓴 것 같은 ‘잘’이라는 부사에 휘둘렸더라고요. 좀 억울했습니다. 실체도 없는 허상의 무게에 짓눌려 그 오랜 시간 힘들어 했다니. 더 즐거울 수 있었는데, 과정을 더 좋아할 수 있었는데, 무엇보다 나를 더 돌보고 아껴줄 수 있었을 텐데.
이제는 ‘잘’이 괴롭힌다는 걸 감지하면 악귀라도 쫓아내듯 고개를 세차게 좌우로 흔들며(실제로 흔듭니다) ‘아냐, 아냐, 속지 마’라고 단호하게 나 자신에게 말합니다. 이미 충분히 잘하고 있으니, 나를 믿고 가보자고 응원도 해줘요. 물론 정말 잘하고 있는지 여전히 의심하지만 넘어갑니다. 일단 ‘넘어가주는 게’ 중요해요. 내가 너 딱 한 번 믿고 넘어간다, 이런 느낌으로 나를 믿어줍니다. 그렇게 순간순간 ‘잘’이라는 악귀로부터 나를 구해주는 거예요. 물론 괴로운 날은 분명 다시 올 테지만, 그때 또 나를 구해주면 되니까요. 이렇게까지 정신승리를 해야 하는 거냐고 할 수도 있어요. 어쩌겠어요. 책을 만드는 이상 ‘잘’에게 시달릴 것은 뻔하고 그렇다면 무슨 수라도 써봐야지요.
아, 일러스트레이터 아방 작가님한테 배운 방법도 있어요. 작가님은 지금까지 그린 그림들을 다 모아두었대요. 내 실력이 늘었는지, 잘 그리고 있는 건지 의심이 들 때 예전 그림을 꺼내보신대요. 그럼 내가 얼마나 성장했는지 바로 알 수 있어서요. 그래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이 방법을 추천한다고 합니다. 못 그렸다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없애지 말고, 다 모아두라고요. 미래의 내가 불안해하고 막막해 할 때를 위해서요.
이 이야기를 듣고 호기심에 몇 년 전 쓴 기획안을 꺼내보았습니다. 와… 너무 놀랐어요. 세상에 이 기획안을 들고 미팅을 했다는 말인가. 웃음이 났어요. 물론 그때는 그게 저의 최선이었어요. 그리고 그 최선들이 쌓여 지금의 나는 그보다 좀 더 변화한 편집자가 되었다는 걸 한방에 알 수 있었지요.
한번은 도통 일이 늘지 않는 것 같다고, 잘하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눈물까지 보이며 하소연하는 동료에게 이 방법을 알려주었어요. 당신이 쓴 첫 번째 기획안, 신간소개자료를 꺼내 보라고요. 제 성화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오래전 파일을 클릭 클릭한 동료는 몇 초 지나지 않아 괴성을 질렀습니다. “아악 아악, 이걸로 책을 만들었다고요?!” 그러곤 마치 남의 글을 읽는 것처럼 키득거리며 즐기더라고요. 잠깐이나마 동료를 구한 순간이었습니다. 아, 물론 과거의 내가 ‘이거 내가 쓴 거 맞아?’ 싶을 정도로 잘한 흔적도 발견하는 때도 많아요. 그럴 땐, 마음껏 나를 칭찬해줍니다. 오, 제법인데? 하고요.
또 하나 힘들었던 건, 마감 무한루프의 삶이었어요. 우연히 사이드 프로젝트를 다룬 <B-Side>라는 짧은 다큐멘터리를 봤어요. 박정민 배우의 ‘출판사 대표’ 이야기가 흥미로웠습니다. 책을 좋아하고, 책을 쓰기까지 한 박 배우는 ‘무제’라는 출판사를 시작했어요. 작가일 때도 편집자의 일이 참 많구나, 느꼈지만 실제로 해보니 더 엄청났대요. 첫 책 <살리는 일>을 출간한 박 대표는 두 번째 책 작업이 더디다고 했습니다. 아니, 사실은 한 번 책을 만들고 나니 그 과정을 또 다시 반복해야 한다는 게 엄두가 안 났대요. 당장 모니터로 뛰어들어가 맞장구치고 싶었어요.
이번 책 끝나면 다음 책, 다음 책 끝나면 그다음 책. 그다음 책 끝나면 그 다음다음 책… 그렇게 무한루프를 돌다 보면 어느새 1년이 훌쩍 지나 있었어요. 그해 만든 책으로 1년을 기억했어요. 아, 올봄에는 그 책 만들고 있었지. 장마 때는 그 책 감리 보느라 고생했지. 뭐, 책 만드는 게 일이니까 당연해요. 그런데 문득문득 또 그 과정을 반복해야 한다는 게, 끝이 없다는 게 숨이 막히곤 했어요. 그러다가도 눈앞의 일정이 있으니 금세 잊고는 무한루프 트랙 위를 달렸죠. 하고 싶은 일, 좋아하는 일이니까요.
신기해요. 그렇게 10년 넘게 책을 만들었는데 어느 날 연간 일정을 논의하는 회의 중에 이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1년을 회사가 아닌, 내가 만든 계획으로 채우면 어떨까?’ 그래서 현재 실험 중입니다. 책 만드는 무한루프는 이어지겠지만, 온전히 내 계획과 실행으로 채우는 1년은 어떨까요. 아직은 모르겠습니다. 일단, 해보고 있어요. 일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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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고 있는 책의 원고로 썼으나, 결이 맞지 않아 빼기로 한 글이에요. 편집자 동료들과 꼭 나누고 싶었던 이야기여서 이곳에 납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