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문화> 7월호 [편집자의 시선]
정말 오랜만에 소식을 전합니다.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벌써 1년 반이 지났네요. 그사이 저는 터틀넥프레스 라는 출판사를 시작했습니다. 4권의 책을 출간했고, 5번째 책을 준비 중이에요.
바쁘게 매일매일을 보내다가, 오늘 아침 문득 브런치가 떠올랐습니다. 쓸고 닦고 기록하고 써야 하는데, 이렇게 또 마음만 먹고 넘어가면 또 몇 달이 흘러 있겠지? 싶어 그대로 달려와 문을 열고 환기부터 해봅니다.
밀린 이야기는 하나씩 써나갈게요. 오늘은 <출판문화>에 연재 중인 글을 가져왔습니다. 가장 최근에 쓴 글이에요. 앞으로 자주 만나요.
*매거진 이미지 뒤에 텍스트로도 덧붙였습니다. :)
김보희(터틀넥프레스 대표. 편집자)
“그래서, 기획을 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
퇴근한 직장인들로 가득한 여의도 음식점에서였습니다. 생태탕과 소주를 사이에 두고 아버지와 저녁을 먹고 있었어요. 평소 일과 관련한 이야기는 전혀 나누지 않는 아버지와 딸이었지만, 그날은 정말 답답해서 물었습니다. 저는 책을 만든 지 2년 차쯤 된 주니어 편집자였고, 아버지는 제가 아는 사람 중 가장 가까이 있는, 인정하는 기획자였거든요.
그런데 돌이켜보면 그건 질문이 아니었어요. 일종의 항의였습니다. 처음 책을 만들기 시작했을 땐 만든 책이 서점에 놓인 것만으로도 기뻤어요. 그런데 자연스레 점점 더 욕심이 생겼습니다. 더 좋은 책을 만들고 싶다, 더 많은 사람이 보면 좋겠다, 더 잘 팔리면 좋겠다. 그럴수록 서점에 놓여 있는 다른 책들이 반짝여 보였어요. 근사한 책도, 잘 팔리는 책도, 독자들의 지지를 듬뿍 받는 책도 참 많았습니다. 나도, 그런 책을 만들 수 있을까. 선망과 질투, 바람이 뒤섞인 마음으로 기획이라는 걸 했어요. 그런데, 도통 모르겠는 거예요. 회사에서 기획 회의라는 것도 하는데, 기획안도 쓰는데, 심지어 명함에는 내가 기획편집자라고 쓰여 있는데 ‘기획’이 정확히 무엇인지, 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아버지에게 항의 섞인 질문을 했던 날은, 기대했던 책이 쓸쓸할 만큼 반응이 없어 힘들어하던 때였습니다. 우리 그러곤 하잖아요. 책이 안 나가면 그 탓을 나에게서 시작해 결국 돌아 돌아 다시 내 탓으로 마무리하는 악순환. 저도 그랬어요. 내가 잘 못해서 그렇구나. 기획력이 없어서 그렇구나. 실력이 없어서 그렇구나. 결국, 나는 감이 없구나. 재능이 없구나.
“기획 ‘잘’하는 법…?”
아버지는 저를 빤히 쳐다보며 잠시 침묵하더니 “나도 모르겠는데?” 하고는 대수롭지 않게 질문을 넘겨버리셨습니다. 다시 왁자지껄한 음식점 안의 소음.
“어우. 뭐든 좀 알려줘봐요. 이게 다 아빠 때문이야.”
애꿎게 아버지를 탓했습니다. 감이 좋은 사람으로, 반짝이는 재능이 있는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이렇게 고생하지 않았을 텐데, 하고 말도 안 되는 떼를 썼습니다. 아버지는 기가 막힌다는 듯 웃으시면서 냠냠냠 밥만 드셨어요. 그 모습이 되게 얄미웠습니다. 얼마간 침묵이 흘렀습니다.
“인마, 기획 잘하는 법 같은 건 나도 몰라.”
“아 쫌… 귀찮으니까 그렇죠? 딸이 여러 명인가? (구시렁구시렁)”
“그런데, 네가 해볼 만한 것들은 있어.”
“쳇. 뭔데요.”
“나도 지금도 하는 것들이야.”
수십 년을 일한 아버지가 지금도 하는 것들? 투덜거리며 밥과 소주에만 집중하다가 귀가 쫑긋해졌습니다.
“매일 사람들 관찰하는 거. 한번 해봐.”
예상 못 했던 답이 돌아와 눈만 껌뻑였습니다. 관찰? 기획 잘하는 법 알려달라니까 갑자기 웬 관찰?
“매일 집을 나설 때 그날 주제를 하나씩 정하는 거야. 예를 들어 오늘은 사람들 헤어스타일만 관찰하겠다. 그러면 그날은 밖에 나가 있을 때 온종일 사람들 머리를 봐. 오늘은 신발이다. 그러면 신발만 보고 다니는 거야. 또 어떤 날은 지하철에 있는 사람들이 뭘 하는지 관찰하겠다. 그러면 책도 보지 말고 네가 있는 칸에 있는 사람들을 관찰해 봐. 뭘 하는지, 뭘 보는지.”
그렇게 관찰하면 일단 요즘 유행을 알게 되고(그때는 트렌드라는 말이 흔하게 쓰이지 않았습니다), 유행할 것들을 짐작할 수 있게 된다고 했어요. 다만 단 몇 번의 관찰로는 알 수 없고, 꾸준히 관찰해야 흐름을 알 수 있고 그 흐름을 아는 게 중요하다는 말도 덧붙이셨습니다. 그게 기획할 때 큰 도움을 준다면서요. 잘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 헤어스타일이나 신발, 지하철에서 뭘 하는지를 관찰하면, 그 흐름을 알면 기획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는 게 대체 무슨 말인가 싶었어요.
“사람들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짐작해볼 수 있으니까.”
그게 아버지의 답이었습니다. 기획을 하려면 사람들의 마음을 알아야 한다더라고요. 사람들이 뭘 좋아하고, 뭘 원하고 필요로 하는지. 세상 사람 다 만나서 물어볼 수 없으니 관찰하라 했어요. 그걸로도 많은 걸 듣게 된다고요. 그 순간 주변을 둘러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음식점 안의 사람들을 한 명씩 바라봤어요. 그러다 유난히 시끄러웠던 대각선 건너편 테이블의 남자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똑같은 와이셔츠 차림 같아 보였지만 핏이 다르고, 미세하게 원단의 패턴이 달랐어요. 또 누군가의 셔츠는 여전히 각 잡힌 주름이 남아 있었고, 그에 비해 등판에 잔뜩 구겨진 주름이 있는 남자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한 명씩 들여다보니 그들의 행동도 보였어요. 테이블 위에 어떤 메뉴가 놓여 있는지도 눈에 들어왔습니다. 사람이 많네, 하고 뭉뚱그려 보았던 음식점이라는 공간이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신기하고, 재밌었어요. 저에게는 그때가 각성의 순간이었습니다.
다음날부터 저는 그날의 주제를 정하고 사람들을 관찰하기 시작했습니다. 첫날은 아버지의 말씀에 첫 예시로 등장했던 사람들의 헤어스타일을, 어떤 날은 신발, 어떤 날은 사람들의 겉옷, 어떤 날은 가방, 비 오는 날엔 우산, 한여름엔 선글라스… 주제는 무궁무진했습니다. 같은 관찰 주제여도 결과 값이 계절마다 달랐기에 질리지 않았어요. 마치 나만의 게임을 하는 듯했습니다.
그때의 저는 한 시간 반이나 걸리던 출퇴근 시간을 운 좋게 자리에 앉으면 쪽잠, 서 있으면 어쩔 수 없이 책을 보거나 손잡이에 매달려 눈을 감고 있는 걸로 채우곤 했는데요. 내 옆에 서 있는 사람, 내 앞에 앉아 있는 (내리지 않는) 사람, 나를 둘러싼 사람, 사람, 사람들이 너무 힘들었어요. 그렇게 사람들 틈에 둘러싸여 있다가 회사에 도착하면 이미 지치고 무기력한 때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관찰을 시작하고부터는 출퇴근 시간의 모든 게 자극이자 인풋이 되어주었습니다.(물론, 출근했을 때 지쳐 있는 건 똑같았습니다만.)
꾸준히 관찰을 하다 보니 조금씩 질문도 생기기 시작했어요. 예를 들어 처음에 헤어스타일을 관찰할 땐 ‘남자들은 다 짧네. 여자들은 생각보다 긴 생머리가 엄청 많다-’라고만 하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짧은 머리도 조금씩 다 다르고, 긴 생머리도 길이나 색, 컬이 다르다는 걸 발견하게 되었고, 헤어스타일만 관찰하던 눈이 자연스럽게 그 사람에게로 옮겨와 저런 헤어스타일을 한 사람은 저런 옷을 입었구나, 저런 신발을 신었구나, 더 나아가 저렇게 행동하는구나, 그런데 왜 그렇게 했을까, 뭐 하는 사람일까, 어디 가는 걸까, 어떤 사람일까…로 이어졌습니다. 관찰이 사람에 대한 궁금증으로 나아가기 시작한 거예요. 그때부터 관찰에 장르가 하나 더 추가되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바라보고 질문하고 스스로 답해봤어요. 그 답을 연결하면 가상의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내 눈앞에 있는 이 사람은 자기만의 이야기가 있는 또 하나의 세계였습니다.
만일 이만한 각성의 순간을 웹소설의 세계에서 경험했다면 ‘눈 떠보니 천재 기획자’가 되어 기획하는 족족 엄청난 베스트셀러가 되고, 사람들의 인생을 바꾸고, 부자도 되고, 사람들을 돕고, 그랬을 텐데… 현실의 주니어 기획자는 어땠냐면요. 기획안의 ‘대상 독자’ 칸에 형식을 바꿔 쓰기 시작했습니다. “~에 관심 있는 2030”이라고 쓰는 게 익숙했는데, 더 이상 그렇게 쓸 수 없었어요. 그간 관찰해온 사람들이 저마다 각자의 삶, 세계가 있다는 게 떠올라서요. 그래서 그들의 이야기를 자세히 써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궁금한 것들은 주변의 비슷한 이야기를 가진 사람들에게 묻고 인터뷰해서 채웠어요. 책을 만드는 동안에는 기획안에 적었던 그 가상의 사람을 자주 떠올렸습니다. 이것이 ‘고객 프로파일링’ 과정이었다는 건 한참 지난 후에 알았어요. 그때의 저는 그저 내가 만드는 이 책을 누가 볼지, 누가 살지 막막했던 마음을 어느 정도 해결한 걸로도 ‘기획’ 주변을 맴도는 안개를 조금 걷은 듯해서 덜 답답하고, 불안했던 것 같아요.
네에, 이게 다였습니다. 각성의 순간을 두 번 맞은 저의 변화는 이게 다였어요. 눈 떠보니 천재 기획자가 된 것도, 베스트셀러를 만드는 미다스의 손이 된 것도 아니었고요. 기획이 쉬워졌냐 하면, 글쎄요. 수월해진 면이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확신을 갖고 기획이 쉬워졌다거나 엄청나게 잘하게 되었다고 답하지는 못하겠어요. 그럼에도 저는 기획 관련 강의를 하거나 기획이 어렵다고 하는 분들에게 늘 이 방법을 추천해요. 저처럼 나는 기획력이 없어, 감각이 없어, 하고 좌절해본 이들에게는 특히나요. 기획의 기본기를 쌓는 데에 이만큼 쉽고 효과 좋은 방법이 없거든요. 물론 당장 효과가 나타나는 진통제나 고카페인 에너지 음료보다는 꾸준히 장복하면 효과가 나타난다는 당근이나 양배추 먹기(몸에 좋다 해서 꾸준히 먹고 있습니다)에 가까운 방법이긴 합니다. 부작용, 거의 없고요. 누구나 할 수 있고요. 반짝 효과가 있는 게 아니라, 쌓이면 쌓인 만큼 효력을 발휘합니다.
사실 이렇게 너무너무 좋다고 추천하고, 또 추천해도 그 효과를 잘 설명하기에 제 표현력이 너무나 부족하고, 또 당장 드라마틱한 변화를 모르겠으니 ‘그게 정말 도움이 되겠어?’ 하는 반응도 많았는데요. <관찰력 기르는 법>이라는 든든한 책을 만나고부터는 이 책에 기대어 설명할 수 있게 되었어요. 관찰의 효능, 한번 보시겠어요?
“관찰력을 기르면 인풋의 질이 높아진다. 특별히 노력하지 않아도 일상적으로 질 높은 정보가 점점 축적된다. 그리고 인풋이 쌓이면 흔히 ‘감성’이라고 하는 것이 몸에 붙는다. 감성이 쌓이면 이번에는 깨닫는 것의 질과 양이 압도적으로 늘어난다. 아웃풋의 질도 아울러 높아진다. 이 궤도에 올라타기만 하면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하는 일만 남는다. 따라서 관찰력이야말로 다양한 능력으로 이어지는 도미노의 첫 블록이다. 관찰력을 기르면 과거 감옥이라고 느꼈던 자신의 몸도 최강의 무기로 바꿀 수 있다. 자신의 뇌를, 감정을, 몸을 좋아하게 되고 그 힘을 마음껏 쓸 수 있다.”
_<관찰력 기르는 법>(사도시마 요헤이 지음, 구수영 옮김, 유유 펴냄)
저자 소개의 첫 문장을 “관찰하는 사람”이라고 쓴 사도시마 요헤이는 일본의 콘텐츠 제작 및 작가 에이전시의 대표이자 편집자입니다. 창작자를 발굴하고 육성하는 일을 하는 터라 “좋은 창작자의 조건은 무엇인가요?”라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는 그는 그때마다 “관찰력”이라고 답한다고 해요. 관찰력이 좋으면 인풋의 질이 높아지고, “인풋의 질이 좋으면 최종적으로 아웃풋의 질도 좋아”지기 때문이라면서요. 그리고 한 마디를 덧붙였는데요. “인생은 길다”는 것이었습니다. 역시 관찰은 장복해야 하는 거였나 봐요.
사실 읽고 계신 이 글도 ‘관찰’을 통해 쓰인 것입니다. 어떤 이야기를 써야 할지 막막할 때 편집자 님이 힌트를 주셨거든요. 저의 기획력과 편집력의 출발점은 어디인지 궁금하시다고요. (‘력’이 얼마나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덕분에 저라는 편집자는 어쩌다 이렇게 기획하고 편집하는 사람이 되었는지 들여다보게 되었어요. 저를 떠올리며 관찰했어요. 통과해온 경험들과 만난 사람들, 좋은 선택과 나쁜 선택 들, 크고 작은 실패와 성공 들. 모든 것이 ‘어쩌다’에 답해줄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출발점을 꼽으라면 아버지에게 따지듯 묻던 여의도의 그 생태탕집이었더라고요.
저는 여전히 집을 나서면 관찰을 합니다. 사람들, 제품들, 건물, 상점, 광고 등등 관찰의 범위도 넓어졌어요. 이제는 일부러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바라보고 질문하고 대답하곤 해요. 관찰이 기획으로 이어지는 나름의 방법도 찾게 되어서 책을 쓰기도 했어요.(<첫 책 만드는 법>이라는 책입니다. 물 흐르는 듯한 홍보…) 그 방법으로 꽤 오래 책도 만들어오고 있고요. 그런데, 그런데요. 그 시선이 이제까지 외부로만 향했다는 걸 회사를 떠나 독립할 때쯤에야 깨달았어요. 단 한 번도 마음먹고 나를 관찰해준 적이 없다는 것을요.
“마지막에 관찰에서 가장 중요한 점을 깨달았다. 그것은 사랑이다. 대상에 대한 사랑이 없으면 좋은 관찰을 할 수 없다. (…) 그리고 좋은 관찰을 하면 사랑이 보다 깊어진다.”
_<관찰력 기르는 법>
요즘 제가 가장 주의 깊게 관찰하는 주제는 ‘나’입니다. 나 자신을 관찰하고, 질문하고, 답하는 과정을 조금씩 해나가고 있습니다. 제법 까다롭고 어려운 주제인데, 그만큼 흥미롭기도 합니다. 시선을 밖이 아니라 안으로 향했을 때 편집자로서 어떤 책을 기획하고 만드는지도 궁금합니다. 이번 관찰이 또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는 저도 아직 모르겠어요. 어쩌면, 혹시 삶을 더 사랑하는 법을 알려줄 수도 있지 않을까요?
_<출판문화> 7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