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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아라빌리 Dec 27. 2023

크리스마스도 결국은 일상

주간일기(12월 셋째 주)

집에 아들의 친구들이 왔다. 밖에서 놀기엔 차가운 날씨라 주말이면 아들한텐 "우리 집에 놀러 올래?" 하는 전화가 종종 온다. 아들은 당장에라도 뛰쳐나가고 싶어 하지만, 가도 된다는 허락을 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쟤네 엄마가 허락한 걸까?(우리 애는 나한테 묻지도 않고 친구들을 부를 때가 종종 있다.)

그 집 아래층에서 싫어할 텐데...(난 위층 때문에 한동안 힘들었고, 우리 아래층 또한 비슷한 상황이겠지.)

초등학교 3학년 아이들이 둘만 모여도 엄청나게 신박한 괴성을 들을 수 있기에, 가도 좋다는 허락을 하더라도 더 놀 거면 우리 집으로 와,라고 아들에게 당부를 한다. 고통 분담이랄까. 한 집에서만 감당하기엔 초3은 너무 한 것들이 많다.


오전에 친구집에 갔던 아들이 오후엔 아이들을 우르르 몰고 우리 집으로 왔다. 현관 너머에서부터 소란함이 밀려들었다. 앗! 그분들이다. 목덜미에서부터 서늘해지는 느낌이 들었는데 역시 예상이 맞았다. 아들이었다.  

한두어 달 넘게 책을 일절 읽지 않고 있었기에 이제 슬슬 책도 좀 읽고 일기도 다시 써볼까? 싶어 몇 달 전에 읽던 오만과 편견을 펼치던 차에 초3들이 몰려온 것이다. 이 책, 결국 해 넘어가겠네, 하는 표정을 남편이 보았던 것인지 "잠시 나갈까?" 했다.

근처 카페에 딱 한 시간만 있다가 오자 하며 찾았던 곳. 처음 가본 곳인데 사람이 많았다. 이 시간에도 사람이 많구나, 하며 적당한 곳에 겨우 자리를 잡았다. 선셋 망고인가? 망고 선셋인가? 암튼 그 비슷한 이름의 스무디가 있길래 "이거 뭔가 이름이 보라카이 같구먼." 하며 시켰는데 별로였다. 남편이 주문했던 커피가 생각보다 맛있어서 집으로 돌아올 때 같은 원두를 사서 왔다. 새 원두를 사면 기분이 좋아진다.

오만과 편견은 결국 그날도 다 읽지 못했다. 지난 가을부터 보던 책인데 아직도 이러고 있다.

교장 선생님께서 갑자기 점심을 먹자고 하셨다. 메뉴는 짬뽕으로 정하셨다.

난 원래 '회식은 좀... 저녁엔 일이 많아서...' 하며 거절하는 편인데 아직까지 점심은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크리스마스 케이크도 먹자고 하셔서 미니케이크도 주문했다. 초까지 불고 싶어 하셔서 "초는 카페에 없습니다." 했지만 눈치 빠른 직원들이 초까지 빌려와서 결국 같이 "후~" 불었다.

직원들한테 고맙고 미안했다. 내가 유난히 눈치를 많이 보는 건가, 싶기도 했지만 역시나 고마운 건 고마운 거고 미안한 건 미안한 거다.  

교장 선생님 눈치는 생각보다 보지 않는 편인데 직원들은 좀 다르다. 아마도 직속 후배라서 그런가 보다, 생각한다. 후배들한테는 비겁하지 않은 사람이 되고 싶다, 대신 할 말 해주는 선배가 되고 싶다,라는 바람이 있는데 결국은 그것 또한 너무 오버인가 싶기도 하다.

아니, 그냥 뭐 크리스마스니까 케이크 하나 먹고 싶은 거고 케이크가 있으니까 초 하나 꽂아서 불고 싶은 건데 또 이렇게 생각이 꼬리를 물고 있구먼.

맛... 없었다.


이건 그냥 소장용...

집에 오니 지난주에 주문했던 수영복들이 도착해 있었다.

오호! 하며 입어봤는데 생각보다 그렇게 크지가 않았다. 분명히 77 사이즈와 88 사이즈도 있었는데...  

"... 대체 왜 몸에 맞는 거지?"

세일 폭이 크니까, 근데 이 사이즈밖에 없으니까, 암튼 너무 귀엽고 예쁘니까, 어차피 또 여행 갈 거니까, 하며 샀던 수영복이었는데 막상 몸에 맞으니 조금 어리둥절했다. 굿프라이스 굿샤핑이지만... 왜 자꾸 시무룩해지는 건지 알 수가 없네.(갸우뚱, 긁적긁적)  


토요일엔 남편과 데이트를 했다.

사실 동네 아이들은 모두 태권도 관장님이 키우고 계신데, 그 관장님이 이번 주말엔 크리스마스 기념으로 무려 1박 2일 동안 도장에서 아이들과 함께 하신 거다. 그 이름도 위대한 '페어런츠 데이'

정말 멋진 분이시다.  

덕분에 남편이랑 오랜만에 영화 보러 갈 수 있었다. 슬램덩크 이후로 처음인가? 아바타 이후로 처음인가? 둘 중에 뭘 먼저 봤는데 모르겠는데, 암튼 슬램덩크랑 아바타 이후로 처음이었다, 남편이랑 영화관 간 거.

저녁은 남편이 검색해 둔 식당에 가서 먹기로 했는데 아무리 헤매어봐도 그곳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이상하다, 여기가 맞는데... 지도를 잘 못 봤나, 하며 살펴보니 더 이상 영업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맛집에 민감한 남편은 이런 일에 조금 침울해진다. 내가 평소에 맛있는 걸 안 해줘서 그런 가 보다(나는 요리 못하기 대회에 출전하면 우승할 자신이 있다. 왜 그런 대회는 없는 걸까?) 3초 정도 반성하다가, 그냥 근처에 있는 가까운 식당으로 들어갔다.

국숫집이었다. 온국수, 비빔국수, 파전과 맥주를 시켰는데 맥주가 제일 맛있었다.

식당에서 사 먹으나 집에서 우리가 밥 해 먹으나 어차피 다 똑같다는 걸 남편이 깨달았겠지? 음식 못 하는 사람이 어디 나뿐이랴. 맥주가 맛있어서 기분이 참 좋았다.

서울의 봄. 영화는 정말 화가 났지만 정우성은 좀 멋졌다.

아! 이게 아니지. 정우성은 좀 멋졌지만 영화는 정말 화가 났다. ㅠㅠ

일요일엔 아들과 리코더 연습을 했다.

아들의 숙제가 리코더 연습이었는데 "할 줄 알아?" 했더니 "아니, 그냥 하는 척만 하면 돼."라고 하길래 분노 급발진. "그게 말이 돼? 선생님이 숙제로 내셨잖아."(이 자식아!!!!!!!!!!!!!!!!!!!!!!! 놀지만 말고!!!!!!!!!!!!!!!!!!!!!!!!! 라는 말은 입 속으로 삼켰던 거 같은데... 확신할 순 없다.)

아들과 함께 리코더를 불기도 하고, 아들이 부는 동안 박수를 치며 "2박자, 1박자, 2박자, 1박자" 박자를 맞추고 있으려니 TV에 종종 나오는 욕쟁이(?) 에어로빅 강사가 된 듯 한 기분이었다.

뭐, 초3 아들 엄마가 그 정도는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카리스마 뿜어내지 않아도 말이 잘 통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은 여전히 간절하다.

저녁은 떡볶이랑 만두

만두를 에어프라이어에 넣고 있으려니 남편이 그건 기름에 튀겨야 맛있는데... 하며 침울해하여 에어프라이어에 거의  구운  기름에 다시 살짝 구워서 기름맛을  해줬다.

"거의 기름에 튀긴 맛이지?"라고 했지만 딱히 동의하지 않는 눈치였다. 담에는 기름에 튀겨줘야 하나, 생각하다가 그냥 담에는 배민으로 주문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어차피 까다로운 남편 입맛에는 이러나저러나 맛이 없을 거니까 수고라도 덜어야지.

일요일 밤엔 태어난 김에 세계일주를 본다. 역시 너무 재밌다.

기분이 잔뜩 좋아져 보라카이에서 사 온 산미구엘 애플을 꺼냈다. 무게 때문에 6캔만 사들고 왔는데 여동생 2캔 주고, 내가 2캔 먹고, 이제 딱 2캔 남아 있다. 집에 와서 먹으니 그때 그 맛이랑은 살짝 다른 것도 같고, 뭔가 써머스비 애플이랑 거의 똑같은 것도 같은데, 하여간 태어난 김에 사는 남자의 여행을 보며 먹기엔 딱 좋은 맛이다. 기부니가 더 좋거등요.


크리스마스엔 청소를 했다. 화초에 물도 주고 화장실 청소도 하고 이불빨래도 했다.

크리스마스도 결국은 일상인 것이고 일상이 뱅글뱅글 무탈하게 잘 돌아가는 것이 가장 큰 행복임을 아는 나이가 되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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