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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unjung Lee Dec 07. 2020

미술관에 가는 사람들

파리의 로댕 미술관에서

한 여인이 다가온다. 누군가에 쫓기듯 그녀는 시계와 내 얼굴을 번갈아 보며 초조하게 묻는다. <생각하는 사람(Le Penseur)>은 어디에 있죠? 파리의 로댕 미술관(Musée Rodin)에서 안내 아르바이트를 하는 몇 개월 동안, 화장실 위치 다음으로 가장 많이 받았던 이 질문에 난 능숙하게 설명한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녀는 몸을 틀어 내 손끝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돌진한다. ‘PARIS’라는 글씨가 박힌 가이드북을 옆구리에 끼고 달려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미술관에 가는가?


가이드북에 소개된 파리에서 절대 놓치지 말아야 할 작품을 보기 위해서? 평소 좋아했던 그림을 가까이에서 느끼기 위해서?  잘 알지 못했던 작가와 작품을 발견하기 위해서? 로댕 미술관에서 일하며 지켜본 나의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에 비추어 보면, 미술관에 가는 사람들은 다음의 여섯 가지 유형으로 분류될 수 있다.  


오귀스트 로댕, 생각하는 사람(Le Penseur), 파리 로댕미술관


첫 번째는 '유명 작품 집착'형이다. 이 유형에 속하는 이들은 하늘이 무너져도 루브르 미술관(Musée Louvre)에서는 <모나리자(La Joconde)>를, 로댕 미술관에서는 <생각하는 사람>을 제 눈으로 봐야 한다. 인증샷을 찍는 건 당연지사다. 하지만 웬만한 유명 작품들을 다 봤다 싶으면 다른 작품들은 무심한 듯 시크하게 지나친다. 이들은 무엇을 볼지에 관해서는 확고히 견지하고 있으나, 그것을 왜 봐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심고 하지 않는다. 한 번은 <생각하는 사람>의 위치를 묻는 관람객들이 하도 많길래 도대체 이 작품의 어떤 점이 그들을 매료시키는지 궁금해서 한 미국인 관광객을 붙잡고 되물은 적이 있다. 왜 이 작품을 봐야 하나요? 그는 당황한 눈빛으로, 그러나 왜 그런 바보 같은 질문을 하냐는 듯 명랑하게 말했다. 그야 <생각하는 사람>이니까 꼭 보고 가야죠!

  

두 번째는 유명 작품은 아니지만, 평소 보고 싶었던 작품을 꼭 봐야만 하는 '특정 작품 마니아'형이다. 이 타입의 사람들은 보통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에 조예가 깊으며 이러한 안목의 소유자인 자아에 대한 고상한 우월감을 갖고 있다. 이들은 보통 안내데스크에 들러 보고 싶은 작품이 현재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는지, 그 위치가 어디인지를 확인한 뒤 안심한 상태로 관람을 시작한다. 자칫 이 확인 절차를 생략하는 경우, 전시실에서 찾는 작품을 볼 수 없기라도 하면 고작 나 같은 아르바이트생을 붙잡고 아쉬운 마음을 주절주절 토로하곤 한다. 로댕의 <환상, 이카로스의 누이(L’illusion, sœur d’Icare)>를 직접 보기 위해 파리까지 왔어요. <성당(La Cathédrale)> 같은 손 조각 작업을 좋아해서 꼭 보고 싶었는데 왜 안 보이나요. 간혹 이 과정에서 감정이 격해지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들은 자신이 투자한 물리적, 심리적 비용을 거들먹거리며 환불을 요구하기도 한다.


세 번째는 ‘아무것도 몰라요’형이다. 로댕에 대한 사전 지식이나 파리에서 꼭 봐야 하는 예술작품 리스트는 접하지 않은 채, 갓 세상의 빛을 본 신생아처럼 순진무구한 마음으로 미술관 문턱에 들어서는 이들이 이 유형에 속한다. 이 사람들은 유명한 작품과 그렇지 않은 작품을 구분하는 것에 집착하지 않으며, 작품 설명 라벨을 일일이 읽으며 시간을 보내는 일에도 별 관심이 없다. 이들은 그저 마음 가는 대로 전시장을 누비면서 작품을 편견 없이 바라보고, 내면을 동요시키는 작품을 발견하는 순간의 아름다움을 즐긴다. 특별히 기대하는 것이 없으니 환희와 감동은 배가 되고 관람을 마친 뒤에는 대부분 만족스러운 얼굴로 출구를 나서곤 한다.   


네 번째는 ‘가이드 의존’형이다. 이들은 지식을 얻어가겠다는 진지한 열정과 요연한 목적을 갖고 미술관을 찾는다. 약간의 지출이 있더라도 오디오 가이드를 대여하는 것은 기본이오, 좀 더 직접적인 소통을 원하면 가이드나 도슨트 투어를 하기도 한다. 따라서 이 유형의 사람들이 미술관에서 보는 것은 자연스레 오디오 가이드에 수록된 작품들 위주이고 가이드나 도슨트가 설명해주는 작품들이다. 사실 이들에게 보는 행위보다 더 중요한 것은 듣고 배우는 것, 즉 지적 허기를 전문가의 설명으로 채우는 것이다. 이들의 또 다른 특징은 작품 자체에 대한 코멘트보다는 오디오 가이드나 가이드의 역량을 평가하는 말을 남기기를 좋아한다는 것이다. 전 세계 여러 미술관을 가봤지만, 이 기계는 제가 본 어느 가이드보다 훌륭해요! 오늘 가이드의 설명은 매우 유익했어요!    


다섯 번째는 ‘고독한 예술가’형이다. 거장의 작품을 습작하기 위해 거의 매일 미술관에 출근하는 예술학도들이 이 유형에 속한다. 이 예술학도들은 오로지 한 작품 앞에서 영겁의 시간을 보내며 오늘은 기필코 그 작품의 비밀을 알아내겠다는 다짐을 한다. 이들은 로댕의 <키스(Le Baiser)>나 <지옥의 문(La Porte de l’Enfer)> 같은 작품 앞에 터를 잡고, 속세와 절연한 승려와 같은 비장한 마음가짐으로 모든 에너지를 시각에 집중시켜 보는 것에 온 힘을 쏟는다. 그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한 무언가를 보기 위해서, 포착하기 위해서, 이를 붓과 연필로 재현하기 위해서. 이들에게는 감히 다가갈 수 없는, 어쩐지 고독한 선지자의 아우라가 뿜어져 나온다.   


마지막으로 여섯 번째는 ‘불타는 전사’형이다. 미술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이나 큐레이터, 갤러리스트, 미술 전문 기자와 같은 미술 관련 종사자들이 대개 이 유형에 속한다. 이들은 전쟁터에 나가는 전사의 마음가짐으로 미술관에 들어선다. 전시를 보기 전, 작품과 작가에 대한 철저한 사전 조사를 통해 정보를 장전하는 것은 물론이다. 이들은 단순히 작품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A 작품 옆에 왜 B가 놓여있는지, 전시실의 조명은 어떤 상태인지, 관람객의 동선은 어떠한지 등 수십 가지의 질문을 던지며 전시를 관찰하고 분석한다. 전시 관람 후에도 집, 학교, 직장에서 전시에 대한 분석을 이어간다.  


대부분의 사람은 이 여섯 가지 유형을 상황과 기분에 따라 자유롭게 넘나든다. 그러나 매우 드물지만, 이 유형을 모두 뛰어넘는, 그 어느 유형에도 속하지 않아 날 당황하게 하는 사람도 존재한다. 한 번은 오십 대 즈음으로 보이는 한국인 단체 관광객 팀이 로댕 미술관에 들른 적이 있었다. 이들은 전시 관람을 마치고 다시 안내데스크 앞을 지나 미술관 밖으로 나가려던 참이었다. 그때 이 단체팀의 어느 남성분이 내가 한국인인 것을 눈치채고는 슬그머니 다가와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어이 한국 아가씨, 여긴 뭐 볼 게 하나도 없네. 뭔가 확 와 닿는 게 하나도 없네!  


그렇다. 슬프지만 작품과 교감하지 못하는 이들도 존재한다. 어쩌면 그는 미술관에 들어오기 전부터 파리 시내를 구석구석 걸어 다닌 탓에 너무나 피로한 상태여서 제대로 전시를 둘러볼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을 수 있다. 나 역시 다리가 너무 아픈 날엔 뭘 보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이 몽롱한 기분으로 미술관을 휘젓고 다니니까. 혹은 이 아담한 미술관에서 그는 길이라도 잃었던 걸까. 아니면 그에게는 전시에 집중할 수 없는 어떤 우환이라도 있는 게 아니었을까. 그도 아니면 그저 아무것도 보려 하지 않으니,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것이었을까......


그의 말에 대꾸할 문장을 찾지 못해 눈만 껌뻑이던 내 얼굴을 봤는지 안 봤는지, 그는 큰 목소리를 자랑하듯 카랑한 목소리로 한 마디 더 덧붙였다. 하도 볼 게 없길래 그냥 정원에 있는 카페에서 커피나 마셨어. 그리고 난 후 그는 동네 약수터에 가는 마냥 두 팔을 허공에 대고 둥글게 몇 번 휘젓더니, 내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황황히 문밖으로 사라졌다. 미술관에서 우리가 보는 것이 무엇인지에 관한 수많은 질문을 내게 남기며.      

 






* 이 글은 필자가 파리의 로댕미술관에서 일하던 2018년에 작성되었습니다.  
* 이미지 출처 :  http://www.musee-rodin.fr/fr/collections/sculptures/le-penseu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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