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아사 마사아키-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
친구는 술집을 하나 차리고 싶다고 말했다.
치킨, 떡볶이, 카페에 이어 술집 역시 포화상태로 접어든지 오래라고
핀잔을 주었지만 개의치 않고 자기가 꿈꾸는 바를 이야기했다.
자기 술집은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이었으면 좋겠고
담배를 맘껏 피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인간의 풍류를 논할 때 담배와 술을 빼놓을 수 없다는 부연 설명과 함께.
풍류라.......
풍류는 멋스럽고 풍치가 있는 일.
또는 그렇게 노는 일을 말한다.
확실히 타인에게 피해 주지 않고 즐기는 담배와 술은 운치 있다.
혼자 즐겨도 함께 해도 술과 담배는 삶을 즐겁게 해준다.
책도 마찬가지이다.
시작하기 어려워서 그렇지 인생의 풍미를 더하는데 책만 한 것은 없다.
친구와 연인은 말할 것도 없다.
이처럼 인생의 풍류,
즐거움은 재치 있게 보여주는 나름 최신 애니메이션이 여기 있다.
평생 지브리 애니메이션만 봐왔던 우리에게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의 그림체는
다소 적응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콜라주 기법을 사용한 것 같은 배경이 나오는가 하면
7살 여자아이처럼 발랄한 느낌을 보여주기도 한다.
마지막 장면에선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처럼 초현실적이기까지 하다.
다양한 영상미를 통한 풍성한 표현력은 이 영화의 매력 중 하나이다.
스토리도 훌륭하다.
적당주의라고 이야기하지만 어처구니없이 던져졌던
떡밥들을 영화 내내 모조리 회수한다.
요망하게 던진 떡밥을 논리적으로 회수하면서
B급 영화란 느낌을 받은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는 A급 영화로 변모한다.
단순한 개그 소재인 줄 알았던 다양한 요소들이
교묘하게 연결됐다는 걸 확인하는 순간 감탄과
함께 묘한 쾌감에 빠진다.
이러한 연결, 인연은 영화의 중심 소재이기도 하다.
대학생인 ‘선배’는 학교 후배인 검은 머리 아가씨를 보고 한눈에 반한다.
선배는 일명 ‘최눈알(최대한 눈앞에 알짱 거리기)’ 작전을 통해
후배의 눈에 들기 위해 노력한다.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는 이 둘의 하룻밤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하룻밤이라고 하지만 실상 사계절을 하루에 겪는,
유식한 말로 옴니버스 애니메이션이다.
계절이 넘어갈 때마다 적절한 BGM과 이미지로 자연스럽게 혹은
어물쩍 넘기는 솜씨는 대단하다.
봄에서 여름으로 건너갈 때는 어디선가 매미 울음소리가 들리고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갈 때는 애처로운 귀뚤소리가 청각을 채운다.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갈 땐 ‘팬티 대장’의 기침 소리와 함께
낙엽에 칼바람이 부딪히는 소리로 해당 계절을 알린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전부 선배와 검은 머리 아가씨의 이야기로 채웠다면
이 영화는 지루하게 진행됐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봄, 여름, 가을은 검은 머리 아가씨의 풍류,
청춘의 낭만, 유희를 설명하는데 할애한다.
술, 축제, 연극으로 이야기를 다채롭게 꾸민 후
사랑이라는 소재를 소개하면서 영화를 완성한다.
이 영화는 선배와 검은 머리 아가씨가 주인공이지만
가장 중요한 히로인은 고집불통 ‘이백’이다.
이백은 많은 점에서 검은 머리 아가씨와 반대편에 서 있는 인물이다.
이백은 늙었고 친구도 없으며 인생의 낙도 없이 사는 노인이다.
그는 삶은 덧없고 외롭고 공허하다고 생각한다.
인생은 서로 뺏고 황량하다고 믿는다.
이백은 모든 걸 다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베일에 싸인 신비의 술 ‘모조 전기 브랜디’,
검은 머리 아가씨가 찾고 있던 어린 시절 동화책인 ‘라타타담’,
감기를 낫게 하는 명약 ‘윤폐로’까지.
하지만 그의 앞의 설명처럼 행복하지 않다.
평생을 지독하게 살았던 이백은
검은 머리 아가씨가 병문안 왔을 때 비로소 행복을 느낀다.
이백 할아버지는 검은 머리 아가씨에게
모든 걸 다 가졌지만 고독하다고 고백한다.
그러자 그녀는 이백에게 이렇게 이야기한다.
이백 씨는 고독하지 않아요.
다른 사람들과 이어져 있어요.
당신이 빼앗아 간 것이 돌고 돌아
사람들에게 행복을 주고 있어요.
당신이 고독을 원한다 해도 모두와 이어져 있고
당신이 시작한 인연이 모두를 이어주고 있어요.
오늘 밤은 당신이 선사한 길고 근사한 밤이에요.
사실 이백은 감기에 잘 듣는 명약이 있었다.
하지만 그의 감기를 치료한 것은 명약이 아니라
자신은 고독하지 않다는 검은 머리 아가씨의 말이었다.
소박하고 낙천적인 이야기지만
그 안에 뿌려진 풍류와 낭만 덕분에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는 풍부하고 근사한 애니메이션이 된다.
사랑스러운 혹은 잔망스러운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를 보고 나면
길거리로 뛰쳐나가 흥청망청 술을 마시고 싶기도 하고
길거리 축제에서 모르는 사람에게 말을 걸어도
될 것 같다고 느껴진다.
검은 머리 아가씨의 긍정적 에너지 덕분이다.